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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뿌듯한데 좀 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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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8-2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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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얼음 위에서 무난히 끝난 서울 민족통일대회… 민간통일운동에 새로운 활력 넣어

사진/ 민족통일대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북쪽 대표단. 남쪽의 행사관계자들은 "우리의 대접이 너무 소홀하지 않았는가" 하는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사진공동취재단)
“꿈만 같다.”

김이현숙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대표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이다. 물건너간 것으로 생각한 8·15 민족통일대회가 서울에서 열려 별 탈 없이 끝났기 때문이다. 남북 여성대회 남쪽 대표를 맡은 그로서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을 터다. 물론 이런 복받치는 감정이 그의 몫만은 아닐 것이다.

애초 많은 걸 바라지 않아


남북 양쪽 대표단 530여명은 지난 8월15일 대회 막을 올린 뒤 사진·미술 전시회, 부문별 상봉모임, 공동학술토론회, 예술공연 행사를 마치고 창덕궁을 둘러본 뒤 17일 서해 직항로를 이용해 평양으로 훌쩍 떠났다. 남북 관계는 그렇게 또 한 고비를 넘기고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남북한이 함께 8·15 해방을 축하하기 위해 서울에 모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민간 통일운동 관계자들은 애초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지난해 평양에서 열린 통일대축전 때의 불상사로 심한 홍역을 치른 탓이었다.

하지만 이번 서울 행사는 민간 통일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행사 운영 측면에서 준비기간이 짧았던 탓에 군데군데 허술함이 드러나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무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해 8월 평양 대회에서 잃어버린 신뢰도 많이 회복했다. 행사의 세 축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7대 종단, 통일연대의 단합도 돋보였다. 특히 지난해 평양에서 불거진 여러 불상사의 배후세력으로 눈총을 받은 통일연대쪽의 성숙된 자세는 호평을 받았다. 20여명의 소속 인사가 정부로부터 행사 참가 불허조처를 받았지만 서울 행사의 성공적 개최와 보수세력에게 공격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당국의 방침을 잘 따랐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커보인다. 8·15 해방을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이 함께 경축하는 자리치고는 어쩐지 썰렁했다. 뭔지 모를 무거운 분위기가 내내 행사장을 감쌌다. 남쪽 환영공연이나 남북 합동예술공연이 펼쳐질 때 열기가 잠시 고조되기도 했으나 전반적으로 잔칫집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대회에 참석한 양쪽 대표들 사이의 허심탄회한 얘기를 나눌 기회도 턱없이 부족했다. “원래 5천여명이 참석하는 규모의 대회를 열기로 돼 있었는데 참석자가 10분의 1로 줄었죠. 남쪽 당국에서 사사건건 간섭하고 나오죠. 행사장인 워커힐에서 한 발짝도 다른 곳으로 못 나가게 말리죠. 어떻게든 이번 행사만은 무사히 치러야 한다는 공감대 때문에 다들 참은 거죠.” 남쪽 추진본부 핵심 관계자의 하소연이다.

하지만 남쪽 대회 추진본부와 지난해 평양 통일축전에 참가한 일부 관계자들은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북쪽 대표단을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요. 지난해 평양 통일대축전 때는 북쪽에서 없는 살림에도 남쪽 대표단에게 융숭한 대접과 각종 편의를 제공했는데…. 북쪽 손님에 대한 우리의 대접이 너무 소홀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요. 정부의 처지를 이해하지만 지나치게 간섭하고 통제하는 모습이 좋아보이지는 않네요.”

전면적 개혁·개방 대비한 포석

사진/ 6·15 정상회담 사진을 관람하는 남북대표단 일행. (사진공동취재단)
모두들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모습이었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기는 정부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수시로 행사장을 들여다보는 통일부나 국정원 관계자들의 얼굴에는 잠시도 긴장감이 떠나지 않았다. 이번 민족통일대회 행사의 성패 여부가 앞으로 줄줄이 이어질 다른 남북관계 개선일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북쪽 관계자들도 비슷한 처지에 놓인 듯했다. 그들은 지금 겪고 있는 총체적 어려움을 돌파하기 위한 종합적인 그림이 이번 행사로 훼손되길 원치 않았다. 이전 같으면 북쪽 대표단이 짐을 싸들고 돌아가겠다고 큰소리를 칠 만한 해프닝도 여러 차례 불거졌으나 그때마다 자제력을 발휘했다. 남쪽 정부가 통일연대 소속 일부 범민련 관계자들의 행사 참가를 일찌감치 막은 것이나, 몽양 여운형 선생의 딸 려원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의 묘소 참배 요구를 묵살하다가 마지못해 나중에 허용한 것 등은 북쪽 대표단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한 사건들이었다. 또 남북은 오는 9월에 열릴 예정인 남북청년학생대회에 한총련이나 범청학련 남쪽본부 소속 학생들의 참가 허용 여부를 둘러싸고 내내 신경전을 벌였다. 15일 사진전을 앞두고 남쪽 당국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친필이 든 사진을 비롯한 북한 체제 선전 성격의 사진을 걸지 말아달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개막식이 늦춰졌고, 모처럼 남북 대표단이 함께 몸을 부딪치며 어우러질 수 있는 놀이마당 행사가 취소되는 사태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북쪽은 사태를 벼랑 끝까지 몰고가지 않았다. 타협의 기술도 때때로 선보였다. 예술공연 등의 내용 가운데 정치색을 배제하자는 남쪽의 요구를 대부분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양보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뜻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관철시킨 것들도 적지 않았다. 려원구 의장의 부친 묘소 참배도 이뤄졌고, 김정일 위원장의 친필이 든 사진도 예정대로 전시장에 내걸렸다.

사진/ 몽양 여운형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는 딸 려원구씨. (연합뉴스)
서울에 온 북쪽 대표단의 면면을 감안해 남쪽 당국에서 더 세심하게 배려해야 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북한 전문가들은 서울땅을 밟은 북쪽 대표단 가운데 상당수는 사회 지도자급 인사들이라고 평가한다. 민·관의 구별이 없는 북쪽에서 이들은 언제든 정부 부서의 핵심 요직을 꿰차고 들어가 남쪽과의 주요 회담자리에 나올 수 있는 인사들이다. 남한의 총리급에 해당하는 인사들도 수두룩하다. 6·15 남북정상회담 때 이희호 여사와 자리를 같이한 려원구 의장이나, 김영대 민화협 회장, 장재언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 강영섭 조선 그리스도교연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박태화 조선 불교도연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등은 북쪽의 주요 행사 때마다 주석단에 앉을 만큼 높은 서열의 인사들이다. 이 가운데 장재언 회장은 남쪽의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해당하는 조선적십자회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남북교류에 핵심적인 구실을 해왔거나 앞으로도 활동이 주목되는 민화협이나 아태평화위(아태) 관계자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그들은 틈만 나면 이번 8·15 민족통일대회를 함께 치를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김정일 위원장의 결단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온 북쪽 고위급 인사들 가운데는 처음으로 서울땅을 밟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남쪽의 정부 관계자는 김정일 위원장이 이런 결단을 내린 데는 앞으로의 본격적 남북교류는 물론 전면적인 개혁·개방을 대비한 포석도 있어보인다고 귀띔했다.

‘6·15 남북공동선언 이행’. 북쪽 대표단이 서울에 가져온 메시지는 이 한 구절로 압축할 수 있다. 북한은 대회 기간 내내 남북 정상이 합의·서명한 공동선언을 실천하는 것만이 민족이 살길이라고 주장했다.

서울 답방 무작정 미룰 수 없게 돼

북쪽의 의도는 <조선중앙텔레비전> 보도 내용에서도 잘 드러난다. 방송은 16일 서울에서 열린 8·15 민족통일대회 폐막 소식을 전하면서 남북 각계 대표 만남에서는 “북과 남의 각 계층이 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뜻과 행동을 같이 해나가는 의견들이 교환됐으며 ‘자주 통일’ 이정표인 6·15 공동선언의 기치를 따라 북과 남의 단체들의 연대와 단합, 협력과 교류를 강화해나가는 것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막을 내린 민족통일대회든, 남북 장관급 회담이든, 앞으로 줄줄이 잡혀 있는 각종 남북 공동행사들 모두가 6·15 남북공동선언 실천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6·15 남북공동선언의 또 다른 핵심내용인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문제다. 북한이 이 선언의 실천을 강조할수록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도 무작정 미룰 수 없게 된 셈이다. 물론 북쪽이 남쪽의 공동선언 불이행을 빌미로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 요구 압력을 비켜갈 수도 있다. 문제는 역시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부문이다. 미국의 대북 강경기조가 유지되고 남쪽이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제1항의 실천은 요원한 과제다.

8·15 민족통일대회는 남쪽 민간단체와의 공고한 연대를 통해 미국의 공세를 막아보자는 북쪽 당국의 의도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김명철 조선농업근로자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15일 개막식 연설에서 “전쟁은 곧 민족 공멸을 뜻하므로, 전쟁을 반대한다. 각 계층 인민 대중들이 힘을 합쳐 반드시 평화를 지켜내야 한다”고 몇 차례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앞으로도 북·미 관계가 남북 민간차원의 통일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앞으로 한동안 남북 민간 통일운동이 정치적 바람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장관급회담 이후 남북관계 일정표

회담 및 교류

시기

장소

 남북 군사당국자회담

 빠른 시일 내

 미정

 8·15민족통일대회

 8월14일~17일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남북 실무대표접촉

 8월17일~20일

 금강산

 경협추진위 2차회의 및 실무협의회

 8월26일~29일

 서울

 4차 남북적십자회담

 9월4일~6일

 금강산

 남북 축구대회

 9월6일~9일

 서울

 금강산관광 활성화 2차 당국회담

 9월10일~12일

 금강산

 5차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사업

 추석(9월21일) 계기

 금강산

 금강산댐(임남댐) 공동조사 실무접촉

 9월 중순

 금강산

 태권도 시범단 상호 교환

 9월 중순, 10월 하순

 평양~서울

 부산아시아경기대회 북한선수 참가

 9월29일~10월14일

 부산

 8차 장관급회담

 10월19일~22일

 평양

 북쪽 경제시찰단 남쪽 파견

 10월 하순

 서울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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