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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한반도가 출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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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8-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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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주변국 향한 잰 걸음 돌진…경제살리기 외길 수순에 나선 듯

북한이 뭔가 작정한 듯 거침없이 변화의 소용돌이로 돌진하고 있다. 남북관계를 비롯해 수렁 속에 빠져있던 북-미, 북-일 관계가 대화 분위기로 급반전되고 있고, 중국과 러시아도 각기 목소리를 높이며 한반도 문제에 거간 노릇을 자처하고 나섰다. 거센 변화의 머리 부분인 북한이 꿈틀거리면서 몸통이나 꼬리 부분인 관련국들도 덩달아 요동을 치는 격이다. 급기야 북한은 남북장관급회담 예비접촉을 시작하면서 동시에 미국에 유엔사 장성급회담을 열자고 요구했다.

거침없는 몸동작, 변화의 소용돌이

사진/ 북한의 거침없는 행보는 지속될 것인가. 아세안지역안보포럼에서 자리를 함께한 북한 백남순 외무상과 최성홍 외무장관. (AP연합)
6.29 서해교전 이후 미국과 남한은 책임소재를 따지고 재발방지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판문점 장성급회담을 열자고 줄곧 요구했다. 북한은 단호하게 거절해왔다. 그런 북한이 태도를 바꾼데는 이 참에 뭔가 결판을 내겠다는 야무진 속셈이 엿보임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관심의 초점은 북한이 기존 입장에서 얼마나 물러서느냐에 있다. 겉옷만 갈아입고, 사고는 그대로이면 이런 변화들은 언제든 바람빠진 풍선처럼 무의미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남북관계 일정부터 보자. 경의선 연결, 이산가족 상봉 문제 등을 논의할 7차 장관급회담이 서울에서 열린다. 우선 남북대화를 시동 걸어놓을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장관급회담은 빠르면 8월 안에 이뤄질 전망이다. 그 뒤 지난 4월 열리기로 했다가 돌연 취소된 남북경협추진위원회.금강산관광촬성화를 위한 당국간 회담 등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에 앞서14일에는 8·15 공동행사에 참가할 북한 대표단 100여명이 서울에 온다. 오랜만에 일본과의 정부간 공식대화도 열린다. 7월31일 브루나이에서 열린 북·일 외무장관회담에서 양쪽은 8월중에 국교 정상화를 위한 외무성 국장급 회담과 인도주의적 현안 논의를 위한 적십자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두 회담에서는 중단된 쌀지원 재개 문제를 비롯해, 과거청산, 일본인 행불자, 북송 일본인처 고향방문 문제 등이 중점적으로 다뤄진다.


사진/ 7차 장관급회담 실무회담을 위해 금강산에서 만난 남북대표들. (사진공동취재단)
여기에다 서해교전으로 물건너간 것으로 여긴 미국과의 대화의 문도 다시 열린다. 아세안 지역안보포럼(ARF)에 참석중인 콜린 파월 미국무장관과 북한 백남순 외무상은 비공식으로 만나 대화재개 의지를 서로 확인했다. 이에 따라 북·미 양쪽은 이달 안에 뉴욕 대화채널을 통한 미국 특사 방문 일정 협의에 들어간다.

북한은 6.29 서해교전 이후 본격적으로 선보인 개혁.개방 조처, 이례적으로 신속한 북한의 서해교전 발생 유감 표명, 백남순 외무상의 ARF 참석등을 통해 한반도 변화의 주도권을 유감없이 휘두르고 있다. 특히 때마침 열린 ARF에서 보여준 백 외무상의 전방위 활동은 국제무대에서 북한의 외교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또 포럼 참석 내내 가식없는 유연한 태도를 보여줘 다른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는 게 정부 관계자들의 귀띔이다. 특히 남한의 최성홍 외교부 장관은 지난 4월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자신의 인터뷰 내용을 구실삼아 북한이 남북경협추진위원회까지 무산시킨 적이 있어 왠지 서먹했으나, 북한대표단은 최 장관을 깍듯이 예우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북한 대표단은 "남북장관급회담 등이 잘되면 좋겠다"며 "국제무대애서 싸우지 말고 새로운 문화를 가꿔가자"는 덕담도 건넸다.

사진/ 백 외무상과 비공식적으로 만난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 (AP연합)
북한으로서는 서해교전이라는 악재를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을 비롯해 일본·중국 외무장관 등과 번갈아 회담을 열어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챙겼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평가다. 북한은 이 밖에도 타이·오스트레일리아·유럽연합·브루나이 등과도 외무장관 회담을 열어 달라짐 면모를 유감없이 선보였다. 역시 가장 주목을 끈 것은 파월 국무장관과의 전격회동이었다. 이 만남은 파월 국무장관이 먼저 제의해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위축됐던 북한한테는 적지않은 자신감을 심어준 것으로 보인다. 15분이라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북·미 사이의 고위급 접촉은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18개월 만에 이뤄진 것이다. 백 외상은 특히 파월 국무장관과 만나 "성과 있는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풀어가자. 관대하게 친구로서 취급해달라"고 말하면서 재래식 무기 협상과 관련해서도 "미국과 마주 앉아 토론할 것"이라며 유연한 태도를 보여 눈길을 끌었다. 가와구치 요치코 일본 외상과의 만남은 2000년 10월 이후 중단된 북·일 수교교섭을 다시 시작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또한 괴선박 사건 이후 중단된 대규모 쌀 지원의 물꼬를 트게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북한은 남한-미국-일본 3개국과의 동시 대화 재개로 당장은 수십만t의 쌀을 확보할 가능성이 커 최근시동을 걸고 있는 경제개혁 추진에 큰 힘을 얻게 됐다. 북한이 회담에 어떤 보따리를 풀어놓느냐에 따라서 다른 경제적 지원도 받을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정면돌파 없으면 정권 위기로 치달아

그렇다면 북한 변화의 끝은 어디일까. 중국과 러시아의 뒤를 부지런히 쫓아갈까. 북한과 오랜 인연을 맺어온 기업인들과 정보기관 관계자들은 이 물음에 뜻밖의 간명한 답을 내놓는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외길이다." 북한 정권은 지금 배수의 진을 치고 있다는 얘기다. 또다시 구태를 답습하면 벼랑에서 떨어지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정공법으로 위기를 돌파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들이다. 물론 이 돌격대의 선두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자리잡고 있다. "군수경제인 제 2경제는 1단계 목표를 달성햇으나, 여기에 전념하느라 민생경제 부문인 제1경제가 엉망이 돼버렸다.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 이제부터라도 제1경제를 살리는 데 몰두할 테니 좀 도와달라." 98년 말 남한 유력 기업인을 만난 자리에서 김 위원장이 한 말이다. 이 기업인은 김 위원장이 지금 '이중, 삼중고'를 겪고 있을 것이라고 귀띔한다. 그는 현재 김 위원장이 이끄는 북한의 상황을 일종의 '풍선효과'로 설명한다. 어느 한쪽을 누르면 다른 한쪽이 불쑥 튀어나오고, 튀어나온 곳을 다시 누르면 다른 곳이 또 불룩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다 보면 풍선이 제 모습을 갖추기 어렵게 되고, 잘못 다루다 보면 언젠가 터질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북한 내 어떤 불만세력을 간신히 잠재우면 또다른 불만세력이 생겨나는 이치와 비슷해보인다. 또 군수경제를 키워놓으면 민간경제가 엉망이 되고, 민간경제에 눈을 돌리면 금방 군수경제가 삐걱거리는 악순환이 지속되고 있다.

김 위원장은민간부문을 정상으로 되돌려놓기 위해 나름대로 무진 애를 쓴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관측통들은 체제 내 보수강경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강산을 남한 관광객에게 개방한 것이나, 올해 아리랑축전 형식을 빌려 외국인들에게 평양을 개방한 것도 이런 고육지책의 하나라고 말한다. 김 위원장은 특히 아리랑 축전에 심혈을 쏟은 것으로 보인다. 북한 주민들이 이 기간을 앞으로 더 큰 폭의 문호개방에 대비한 심리적인 적응기간으로 삼도록 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금강산관광도, 아리랑축전도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결과를 낳았다. 아리랑 푹전은 국가 재정에 주름살만 하나 더 늘게 한격이 됐다.

북한 지도부에 더 큰 위기감을 안겨준 것은 한두달 전에 단행된 것으로 알려진 물가와 환율인상 조처였다. 정보 관계장에 따르면 김 위원장이 애초 가격인상 조처를 단행하며 겨냥한 것은 북한 주민들이 장롱 속이나 김칫독 안에 숨겨둔 달러나 식량 등 각종 생활물자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달러나 식량등의 가격을 올려놓으면 이들 돈이나 물자들이 암시장 못지않게 제대로 가격을 쳐주는 일반 시장으로 쏟아져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 공급 물량으로 초기 시장경제 도입을 원활하게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뜻밖이었다. 달러도 물건도 별로 나오지 않았다. 물론 앞으로 좀더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북한 지도부로서는 적지않게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북한 주민들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국가 자원뿐 아니라 민간부문에서의 공식.비공식 자원도 바닥을 기고있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는 얘기다.

내부 개혁의 한계, 대외관계로 극복

북한이 이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외길'밖에 없다는 표현이 나오고 있는 배경이다. 전문가들은 북한 내 극심한 불균형 현상을 정상화하는 방법은 충분한 물적.인전 자원의 공급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말한다. 북한이 한눈팔지 않고 대외관계 개선과 개혁.개방 조처 병행이라는 외길을 제대로 걸어간다면 사정은 많이 달라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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