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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장상 청문회는 무엇을 남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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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8-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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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층의 도덕성에 문제제기로 대선에 '후폭풍'

사진/ 청문회에서 답변을 하고 있는 장상(왼쪽)씨와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표결 장면. 장상씨는 청문회 기간 내내 무책임한 답변을 계속해 의혹을 증폭시켰다. (이용호 / 이정용 기자)
장상 국무총리 지명자에 대한 국회 인준 거부 이후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다. ‘장상 후폭풍’이 몰아치고 있는 형국이다. 이 싸움은 단순히 책임 떠넘기기에 멈추지 않고 12월 대선에까지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장상씨와 비슷한 약점을 안고 있는 점도 정치공방을 더욱 부추기는 요인이다.

사회지도층을 향한 국민의 분노

사상 첫 여성 국무총리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퇴색시킨 채 장상씨의 인준이 거부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여러 가지 요인을 지적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장상씨의 도덕성과 신뢰성 상실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다시 말하면 국민은 고위 공직자에게 강한 도덕성과 신뢰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에 대해 국민이 분노하고 좌절한 상황이므로 ‘부패의 척결’이 이번 개각의 일차적인 목표여야 했다. 국민의 도덕성에 대한 요구가 어느 때보다 강한 상황에서 장상씨의 도덕성 미흡은 결정적 흠결이 될 수밖에 없었다.


총리 지명 직후 언론을 통해 제기된 의혹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장상씨는 일관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신뢰성에 흠집이 난 채 청문회에 임한 장상씨는 청문회 기간 내내 ‘내가 한 것이 아니다’, ‘모르는 일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등 무책임한 답변을 계속하여 의혹을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증폭시켰다. 고위 공직자의 기본적 덕성인 도덕성과 신뢰성 부족이 부각되었고, 안타깝게도 첫 여성 총리의 탄생이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인준 거부 소식이 전해지자 ‘잘했다’는 평가와 함께 ‘인준을 거부한 국회의원들은 그럼 장상보다 깨끗하냐’는 비아냥의 소리도 적지 않게 나왔다. 여성계를 의식해서 따질 것은 정확하게 따지되 인준은 해주자는 분위기였던 한나라당이 반대로 돌아선 것- 물론 자유투표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은 청문회를 지켜본 국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곤혹스러움을 피해가기 위해 자유투표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은 인준 거부를 주도한 셈이 되었다. 대통령 후보가 장상씨와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는 한나라당이 왜 인준을 거부했을까 의아해하는 국민도 적지 않다.

그러나 국민의 분노는 장상 개인을 향한 것이 아니다. 총리 지명 이전에 충분한 내부의 사전검증을 통해 흠결이 없는 사람을 지명하지 못한 대통령과, 대통령의 사람들을 향한 것도 아니다. 이중국적 또는 미국 국적 취득, 병역 기피 의혹, 부동산 투기와 이를 위한 위장전입, 집의 크기, 엄청난 예금액수 등 장상씨의 문제가 우리 사회 이른바 ‘특별’ 지도층의 일반적 행태라는 점에 ‘보통’ 국민은 좌절하는 것이다. 미국 국적을 얻기 위한 원정출산이 일부 부유층에서 중산층으로까지 확대되어 미국(미국에 가기 힘들면 미국의 영토인 괌)에 가서 출산하는 산모가 한해에 몇천명이 넘는다는 기막힌 현실과 맞물려 국민의 절망은 더욱 깊어졌다. 국민으로서의 의무는 포기하고 혜택만 누려왔던 이른바 지도층의 행태가 앞으로는 줄어들 것인가. 총리가 될 줄 알았다면 아들의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장상씨의 말은 역설적으로 앞으로 공직에 진출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병역·납세 등 국민으로서의 최소한의 의무를 충실히 하고, 좀더 높은 도덕성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작은 희망의 불씨가 될 수 있다.

장상씨 지명 소식이 전해졌을 때 환영의 목소리가 매우 높았다. 정부의 힘이 빠져 있는 임기 말에 국면전환용으로 내세웠다고 평가절하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여성 참여확대의 선례를 만들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사실 한국의 여성 정치참여는 지나치게 낮다. 제16대 국회의원 273명 가운데 여성 의원은 16명으로 여성의 정치참여 비율은 5.9%에 불과하다. 전 세계 평균 여성의회참여율 13.9%의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다. 2002년도 국제의원연맹(IPU)의 발표에 따르면 179개 나라 가운데 96위에 머물고 있다. 장관은 2명으로 11.1%인데, 여성부 장관을 제외하면 여성 장관은 단 1명(환경부 장관)밖에 되지 않는다.

여성 참여확대의 선례 만들어

사진/ 국무총리 국회 인준이 거부된 뒤 대책을 논의하고 있는 민주당 한화갑 대표. 이번 사태를 둘러싸고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이정용 기자)
유엔은 정책결정과정 및 정치 분야에 여성 참여 30%의 확대를 권고했는데, 이는 21세기 들어 젠더 라운드(Gender Round)로 불릴 만큼 전 세계적인 추세다. 남녀 동등한 정치참여가 사회 전체의 총체적 능력을 배가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자 민주주의의 완성을 향한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며 미완성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의 정치적 소외는 결국 남성중심의 기득권(old boys network)을 바탕으로 그 사회가 지니고 있는 인적 자원을 비효율적이고 불합리하게 경영한 결과다. 장상씨가 비록 도덕성의 벽을 넘지 못해 국회 인준에는 실패했지만 여성 진출의 길을 넓히는 데 일조했다고 볼 수는 있다. 국회의 인준 거부도 도덕성과 신뢰성에서 적지 않은 문제가 노출된 장상 개인에 대한 거부이지 여성 총리에 대한 거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사청문회 대상의 확대도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인사청문회는 대통령에게 권력과 권한이 집중되는 대통령제에서 의회가 시민의 관점에서 공직자의 자질과 도덕성을 검증하는 대단히 효과적인 행정부 견제수단이다. 인사청문회는 공직 후보자의 자질과 능력, 개혁성, 도덕성 등을 그동안 살아온 자취와 발언, 재산형성 과정 등을 통해 공개적으로 치밀하게 검증함으로써 그 적격성 여부를 전체 의원과 국민이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의의가 있다. 인사청문회는 고위 공직자의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업무수행 능력, 정치지도자로서의 도덕적 권위, 국민대표로서의 정치적 감각, 시대상황 변화와 사회집단 현상에 대한 정책조망력 등을 검증함으로써 인선에 대한 국민적 합의와 승인을 이뤄내는 제도적 장치다.

또한 인사청문회는 대통령의 인사권에 대한 국회의 견제기능을 담당한다. 행정부의 모든 직책에 대한 임명권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지만 국회의 인준권한은 대통령의 임명권한과 대등한 가치를 갖는다. 청문회는 지명자에 대한 적대적 행위가 아니다. 법으로 보장된 의회의 권한이자 의무이다. 고유한 인사권을 내세운 대통령의 인사권 남용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이자, 국정운용에 적합한 사람을 철저하게 가려내는 의무인 것이다.

청문회는 윽박지르는 자리가 아니다

인사청문회는 고위 공직자를 취임에 앞서 사전 검증하는 장치다. 인사청문회가 없을 때는 고위 공직자의 임명이나 선출 이전에 직무수행 능력이나 도덕성을 사전에 검증할 기회가 없었다. 오로지 임명권자의 판단과 결정으로 인사가 이뤄지다 보니 부적절한 인사도 많았고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인사청문회는 이런 부정적 영향을 줄이는 구실을 한다.

그러나 그동안 인사청문회는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청문회는 잘잘못을 가리는 법정이 아니다. 의원들도 잘잘못을 판정하는 심판관이 아니다. 증인들 또한 범죄자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청문회는 의원들이 증인들을 불러놓고 ‘네 죄를 네가 알렸다’는 식으로 윽박지르거나 호통을 치며 혼내는 자리인 것처럼 운영되어왔다. 인사청문회도 마찬가지다. 직무능력을 따져보기보다는 시비를 걸고 흠집을 내거나 감싸안기에 급급했다. 그나마 국무총리에 대해서는 활발했지만 정치적 중요성이 그다지 크지 않은 대법관이나 헌법재판소 재판관에 대한 청문회는 형식적이었다. 이제 인사청문회도 제자리를 잡게 될 것을 기대해본다.

손혁재/ 참여연대 운영위원장 nurison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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