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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2002년 7월, 평양은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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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8-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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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 교수의 10년 만에 다시 쓰는 방북기… 시장경제 싹트고 새 농촌 만들기 열풍

사진/ 체육인 최홍희씨 묘소를 찾은 필자 김필영 교수.
북한 여행은 지난 1992년 가을 이후 거의 10년 만이었다. 북한 사회과학원쪽과의 학술교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지난 7월10일 평양땅을 밟았다. 순안공항에서 승용차를 타고 평양 시내로 들어가면서 변화의 바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시민들의 옷차림이 예전에 비해 많이 화려해졌고 옷맵시 또한 세련돼 보였다. 90년대 초 베이징 사람들의 옷차림이 현재의 평양 사람들 옷차림과 비슷했다. 지금 베이징 사람들의 옷차림이 서울 사람들의 그것과 크게 차이나지 않을 정도가 되었으니 10년이 지나면 평양 사람들의 옷차림도 그렇게 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양에서 묵었던 해방산여관 앞뜰에는 선술집과 간이식당들이 여럿 널려 있었다. 원래 6월 말에 공연을 마치기로 한 아리랑축제가 7월 중순까지 연장되는 바람에 참가자들의 편의를 위해 마련된 것들이었다. 새롭게 보였던 것은 평양의 젊은 남자들이 ‘탈피’를 안주로 곁들여 대동강맥주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현상이었다. 대동강맥주는 최근 새로 선보이기 시작한 평양생맥주를 일컫는다. 평양 시내 곳곳에는 사람들로 붐비는 대동강맥주 선술집이 눈에 띈다. ‘탈피’란 ‘북어포의 껍질을 벗긴다’는 뜻으로 선술집에서 직접 껍질을 벗긴 북어포를 찢어서 초간장에 찍어 먹는 것을 말한다. 평양 남자들이 가장 즐기는 안줏거리다.

세련된 옷차림에 달라진 분위기 실감


사진/ 북한 어린이들이 놀이시설에서 환하게 웃으며 뛰고 있다. (조선화보)
북한 남자들이 즐기는 또 다른 놀거리는 주패놀이다. 화투는 60년대 북한에서 금지됐고 대신 주패가 등장했다. 주패란 서양에서 카드놀이에 사용하는 트럼프를 이용해 자체적인 놀이방법을 마련한 북한식 카드놀이다. 남자들은 틈이 나면 주로 주패놀이를 하면서 심심풀이로 담배 따먹기를 한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물풀이 보일 정도로 맑은 대동강가에서 노인들이 풀밭에 정답게 둘러앉아 주패놀이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주패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평양 남자들에게 사랑받는 놀이로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나라를 가든 항상 관심을 가지고 들르는 곳이 있다. 바로 시장이다. 10년 전 평양에 갔을 때는 시장이 없었다. 국가가 경영하는 상점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장이 생겨나 이곳에서 과일을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호기심에 시장을 보고 싶다고 안내원에게 요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안내원은 현재 열악한 시장사정 때문에 외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장마당을 공개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시장은 평양에서는 ‘장마당’으로 통했다. 장마당이 만들어졌다면 이는 북한이 일단 시장경제 초기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을 뜻한다. 성장 초기단계에 있는 나라는 어디를 막론하고 시장 공개를 꺼린다. 외국인들이 시장에 나와 있는 상품들을 보면 그 나라의 열악한 경제사정을 한눈에 알 수 있기 때문이다.

7월 중순 평양에서 미국돈 1달러를 북한돈 2.2원에 바꿨다. 묵고 있던 여관 앞마당에서 어느 남자와 담배를 나누어 피우며 나눈 대화에서 달러의 암시세를 파악할 수 있었다. 190원에서 200원에 해당하는 금액과 맞바꿀 수 있는 1달러는 평양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구매력을 부여한다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북한식 시장 장마당은 미공개

사진/ 북한 사람들의 옷맵시가 예전보다 훨씬 세련돼 보인다(왼쪽). 뱃놀이하는 사람들이 멀리 보이는 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오른쪽). (한겨레 임종진 기자)
평양 사람들의 평균 월급은 110원이다. 이들은 이 월급을 과연 어디에 쓸까. 식량을 배급받으니 먹고사는 문제로는 월급을 전혀 사용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외국인들은 외화와 바꾼 돈을 쓰다 보면 평양의 물가를 금방 알 수 있다. 어느 금은방 창문에 붙여놓은 가격표를 보았더니 순금 1g에 1700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는 노동자 한명이 순금 1g을 사기 위해서는 월급을 한푼도 쓰지 않고 15달 이상을 모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묵던 여관 앞뜰에서 만난 북한 사람들이 국가의 열악한 배급사정을 귀띔해주었다. 그래서 미흡한 단계지만 북한에서 비공식적인 시장경제의 싹들이 움트고 있다는 사실을 알수 있었다.

10년 전 방북 이후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김일성 주석의 죽음이다. 6월 중순 태권도 대부인 최홍희씨가 평양에서 세상을 떠났다. 김 주석과 최씨는 생전에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 그래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부친과 친분이 두터웠던 사람들을 어떻게 대접했는지 궁금했다. 안내원은 최씨가 사망했을 때 평양에서 국장을 지냈다고 했다. 그의 주검은 국군묘지에 해당하는 애국열사능에 안치됐다. 내년에 평양에서 열릴 예정인 세계태권도대회는 아마도 민족무술인 최씨를 기리는 행사가 될 것 같다. 최씨에게 장군이란 단어를 사용했더니 안내원은 이 호칭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만 붙일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에서 군 장군은 ‘장성’으로 불렸다. 또 다른 새로운 사실은 주석이란 명칭이 사실상 폐지됐다는 점이다. 이 호칭은 김일성 주석 외에 어느 누구도 사용할 수 없도록 법적으로 명문화해놓았다.

평양에서 묘향산으로 향하는 향산읍으로 이어진 고속도로는 예나 지금이나 달리는 자동차들이 많지 않았다. 길가의 풍경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가뭄 탓인지 논에 심어놓은 벼들이 간혹 누릇누릇하게 말라가는 모습도 보였다. 심어놓은 옥수수와 콩은 아직 꽃이 채 피지도 않은 상태였다. 북쪽이라 아마 조금 늦는 것 같았다. 안내원의 말을 들으니 향산에는 청천강에서 나는 쏘가리 매운탕과 단고기(개고기)가 유명한 것 같았다.

저녁밥을 먹은 뒤 현관에 나와 화단의 꽃들을 구경하는데 버스 몇대가 도착했다. 이 버스에는 평양·묘향산·남포 등을 구경하기 위해 중국 집안현에서 온 한족들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고구려 역사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마침 세계식량기구 소속의 파키스탄인과 독일 농업활동가 한 사람이 같은 여관에 묵게 됐다. 이들은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에 산다는 한 젊은 청년과의 대화내용을 들려주었다. “부끄럽지만 우리나라에서 현재 식량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목표는 농촌의 도시화에 있습니다”라면서 스스럼없이 말을 이어나가는 그의 솔직한 태도에 감명받은 모양이다.

빼어난 경관의 평양 교외 골프장

사진/ 아리랑 축전에서 대집단체조를 보여주고 있다. (조선화보)
새벽 일찍 일어나 여관 뒤편으로 흐르고 있는 청천강에 나가보았다. 강물은 대동강처럼 맑지는 않았다. 여관에서 나오는 폐수들이 청천강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것을 보고 갑자기 쏘가리 매운탕에 대한 기대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쏘가리 매운탕을 취소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평양에서 들은 말이지만 쏘가리는 더러운 물에는 자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매운탕에 사용하는 쏘가리는 아마도 상류에서 잡은 것인가보다. 쏘가리 매운탕을 맛보지 못해 꽤 서운했다.

평양에서 미국에서 온 동포 가톨릭 신부를 만났다. 평양 성당에는 사제가 없기 때문에 미사를 위해서 일년에 몇 차례씩 들른다고 했다. 미사가 없을 때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궁금해 물어보았더니 주로 골프를 친다고 대답했다. 평양 교외에 자리잡은 18홀 골프장은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골프장이라고 한다. 사용료는 1인 기준 100달러. 지나가는 말투로 “만약 광복절 행사 때 평양에 다시 올 수 있다면 그때는 반드시 골프장을 이용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안내원은 이제는 광복절보다는 남북 정상이 만들어낸 6·15 공동선언일을 북한에서는 더 중요한 명절로 치고 있다고 말했다.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올 때는 비행기로 왔지만 돌아갈 때는 기차를 이용하고 싶었다. 여러 차례 안내원에게 부탁해 어렵사리 북한 당국으로부터 열차여행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백번 잘한 결정이었다. 평양역은 여느 역처럼 사람들로 붐볐다. 12번째 객차에 있는 좌석을 잡았다. 맨 앞 객차 두칸은 평양에서 베이징까지 운행되는 침대칸 열차였고, 그 다음 두칸은 러시아 침대칸 객차로 심양과 하얼빈을 거쳐 모스크바까지 가는 것이었다. 그 뒤로 식당차와 신의주까지 가는 일반석 객차가 연결되어 있었다.

타고갈 객차는 옛 동독에서 만든 것으로 탑승료가 제일 비싸다는 말을 들었으나 안은 몹시 무더웠다. 선풍기가 달려 있었으나 작동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뒤편에 연결된 러시아 객차는 에어컨이 잘 돌아가 추울 정도였다. 옮겨타고 싶었지만 베이징행이 아니어서 어쩔 수 없었다. 승무원에게 부탁해 러시아 객차의 빈자리에서 쉴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이 여성 승무원은 모스크바와 평양을 오가는 ‘오리엔트’라는 열차에서 15년 동안 일해왔다. 10년 만에 다시 찾은 평양에 대한 인상을 말하자 그도 뒤질세라 변화상을 늘어놓았다. 98년과 99년에 걸친 흉년과 기근에 대한 상황도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아이 컴퓨터 사줬더니 게임밖에 안해”

사진/ 능라도 유원지에서 장기 두는 모습을 구경하는 사람들. (조선화보)
열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기 위해 불을 빌리려 하니 맥주를 한잔 권하는 사람이 있었다. 신의주에서 중국과 무역을 하고 있다는 40대 초반의 이 사업가는 알고 보니 안내원과 짜개바지 친구 사이였다. 짜개바지란 어릴 때 대소변을 쉽게 볼 수 있도록 바지 밑이 터진 것을 말하는데, 짜개바지 친구란 속된 말로 불알친구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기 아들에게 컴퓨터를 사주었더니 게임만 하고 공부를 하지 않아서 머저리가 되어버렸다며 아주 속상해했다.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경제력이 있어 보이는 이 남자는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만 계시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날씨가 좋을 때면 음식을 마련한 뒤 친구들을 초청해 공원이나 야외에 나가 함께 식사하면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낙이라고 말해주었다.

만 하루가 넘는 시간을 열차 안에서 보내자니 꽤 지루했다. 잠이 오지 않아 담배를 피우기 위해 객차와 객차 사이 공간으로 나갔다. 하바로프스크로 3년간 돈벌러 간다는 원산 출신의 한 북한 노동자를 만나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친구들은 심심풀이로 한글로 쓰인 장기알을 사용해 담배내기 장기를 두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심심풀이로 장기를 두며 담배 따먹기를 하는 반면, 지식층이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주패놀이를 즐기는 것 같았다.

동남아로 3년간 출장간다는 40대 초반의 평양 출신 공무원들이 주패놀이에 나를 끼워주었다. 그 중 성격이 호탕한 한 사람은 술까지 권했다. 집에서 증류하여 참숯으로 정제한 소주였다. 맛이 아주 좋았다. 그는 가방 속에서 안줏거리로 여러 가지를 내놓았다. 바다소라와 오이무침, 도라지무침, 가지무침, 깨떡, 찰떡, 만두 등이었다. 정말 진수성찬이었다. 술잔을 주고받으며 민족과 통일에 관한 이야기도 나눴다. 역시 한민족임을 느낄 수 있었다. 신명이 나기 시작한 다른 사람이 특별한 것을 맛보게 해준다며 뭔가를 꺼냈다. 명란젓이었다. 마늘을 섞어 양념한 것이었는데 짜긴 했지만 맛은 제법 괜찮았다. 그리고 ‘오가리’라는 것을 꺼내기에 나중에 알고 보니 어릴 때 도시락 반찬으로 겨울에 거의 매일 먹었던 무말랭이무침이었다.

그렇게 정을 나누다 보니 어느덧 열차는 신의주에 닿았다. 여권과 세관검사가 시작됐다. 검사는 예상보다 간단하게 끝났다. 북쪽 보안원이 탄 객차와 식당차 등이 떨어져나가고, 내가 탄 열차는 고추잠자리가 하늘을 가득 메운 신의주 하늘을 뒤로 하며 압록강 철교를 건너 중국땅 단둥을 향하고 있었다.

공무원들의 중국 현지 학습 열기

열차가 베이징에 가까워지자 지루한 여행을 한 북한 사람들은 각자 밖을 내다보고 시내를 바라보며 기뻐했다. 갑자기 옆에 있던 평양 출신 공무원들이 시내 고층 건물들에 붙어 있는 중국어 간판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묻기 시작했다. 40살을 갓 넘어보이는 공무원들은 아마도 한자를 배우지 않아서 간판 글자들을 잘 읽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묻는 대로 읽어주었다. 계속 되풀이해 다른 간판에 쓰인 내용을 묻고 또 묻고 하는 행동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 보였다. 나름대로 느낀 바가 있어 중국에서는 이미 1970년대에 ‘마오쩌둥 주석 만세’와 같은 구호는 사라졌음을 알려주었다. 그들은 태어나 처음으로 조국을 떠나 외국으로 출장을 가는 길이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여러 착잡한 상념들이 교차하는 듯 느껴졌다.

김필영/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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