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생명 연장술로 이용된 개헌 논쟁… 대의명분 이면의 밀약과 음모, 배신
개헌 논쟁에는 늘 그럴듯한 대의명분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이면에는 정략이 도사리고 있고, 합종연횡과 배신은 언제나 한묶음이었다.
1990년 1월 여소야대 국면. 집권 민정당 대표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YS)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JP) 신민주공화당 총재는 3당합당을 결행했다. ‘구국의 일념’을 내세웠지만 본질은 내각제 개헌을 통한 권력분점 밀약이었다. 절대강자가 될 수 없었던 3명은 권력 나눠먹기에 합의했다. 그러나 거대여당 민자당의 대표최고위원이 된 YS는 마음이 바뀌었다. 민자당 후보로 92년 대선에 출마하는 프로그램을 가동시킨 것이다. 박준병 사무총장 등 민정계와 공화계는 합당 당시 내각제 합의문을 유출시키며 불씨를 살리려고 애썼다. YS는 “그런 약속이 국민 ‘위’에 있을 수는 없다. 분당도 불사한다”며 당무를 거부하고 경남 마산으로 낙향했다. 민정계와 공화계는 결국 손을 들었고, 92년 4월, YS는 민자당 대선후보로 확정됐다.
논쟁의 중심에는 3김이 있었다
그러자 정주영 국민당 후보, 이종찬 새한당 대표가 내각제 개헌론에 불을 지폈다. DJ도 가세했다. “96년 실시될 15대 총선에서 국민이 내각제 개헌에 찬성하면 남은 대통령 임기를 포기하고 내각제를 추진하겠다.” 내각제를 고리로 약자들이 연합함대를 구축해 거함 YS와 맞서려는 계산이었다.
정치인들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자기 주장은 구국의 결단으로 포장했고, 상대 주장은 무조건 정치적 음모로 몰아세웠다. 96년 개헌논쟁은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97년 대선 때문이었다. JP는 신년 회견사에서 “내각제 개헌을 위해서는 누구와도 협력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약자의 입장에 있던 JP는 그해 4·11 총선에서 여권인 신한국당의 참패를 예상하고 이 카드를 던졌다. DJ는 “여당이 JP와 내각제를 추진하고 있다”며 ‘내각제 음모론’으로 맞섰다. 그러나 총선 결과 야당인 국민회의가 패하자 태도를 바꿨다. DJ는 96년 9월24일 “내각제를 전제로 한 자민련과의 대선 공조”를 선언했다. 독자적 집권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자민련과 권력을 나누기로 결심한 것이다. 신한국당은 4년 중임제 개헌론으로 맞불을 놨다. DJ와 JP는 “제2의 유신개헌 음모”라고 비판하는 한편 내각제 비밀협상을 진행했다. 그해 11월, DJ와 JP의 대리인 김용환 자민련 사무총장이 내각제 개헌과 각료배분 기본원칙에 합의했다. DJP연대가 가속도를 내자 김윤환 신한국당 상임고문 등 여권 내 내각제 추진세력들도 JP와 접촉하며 기회를 엿봤다. 결국 대통령인 YS가 나서 “임기 중 내각제 개헌은 없다”며 논쟁을 봉쇄했다.
그러나 97년 3월, 신한국당 대선주자인 이한동·이홍구 고문이 내각제 개헌론을 들고 나왔다. 한보비리나 김현철씨의 국정농단 같은 권력형 비리를 막으려면 권력분산이 필수라는 논리를 동원했다. 그러나 속내는 이회창 대세론에 위기를 느낀 여권 내 다른 대선주자들을 내각제 고리로 묶으려는 것이었다. 이회창 대표는 “내각제 거론 금지”를 당론으로 채택하며 맞섰고, 그해 6월 신한국당 후보로 선출됐다.다급해진 DJ는 10월27일 밤늦게 청구동 집으로 JP를 찾아가 DJP 공조를 성사시켰다. 내각제 개헌을 대선공약으로 내걸고, 집권하면 2000년 총선전에 개헌을 마무리한다고 선언했다.
권력에서 밀려난 이들의 마지막 몸부림
97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된 DJ. 곧 생각이 바뀌었다. JP와 자민련은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했지만, 청와대와 민주당은 “나라 경제가 어렵고 개혁과 구조조정을 계속한다”며 개헌 불가를 외쳤다. 물론 개헌의석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난관도 있었다. JP는 “대통령과 총리가 권력을 분점하는 이원집정부제로 절충하자”며 타협안을 제시했다. DJ는 신당창당설로 자민련을 뒤흔들었다. 권력은 냉혹했다. 7월21일(몇년??) JP는 “나도 할 만큼 했다”며 손을 들었다. DJP 약속이 폐기되자 2002년 대선을 노리는 거물들이 앞을 다퉈 중임제 개헌논쟁을 촉발시켰다. 2000년 초반 이인제 민주당 상임고문이 4년 중임제 정·부통령제 개헌을 역설했다. 이한동 총리와 박근혜·김덕룡·이부영 의원까지 대열에 합류했다.올 들어서도 한 차례 내각제 개헌 서명파동이 일었다. 지난 2월, 김원기·천용택·박상규 의원 등 민주당 쇄신연대 소속의 일부 중진들이 ‘내각제 신당’ 서명작업을 추진하려다 논란 끝에 무산됐다. 그러나 경선에서 노무현 돌풍이 일자 논의는 쑥 들어갔다. 돌이켜보면 내각제 논의는 언제나 정치적 소외세력이 주도했고, 이면엔 언제나 권력을 둘러싼 치열한 다툼이 숨어 있었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사진/ 3김은 개헌론을 통해 권력에 다가섰다. DJ는 내각제를 고리로 JP와 공조를 이뤄냈다. (이용호 기자)

사진/ YS의 '구국의 결단'에도 내각제가 숨어 있었다. (보도사진연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