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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선거판 유령, 개헌론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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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7-1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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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구조 개편 논의 정치판 전면에 급부상… 민심 살피지 않는 정략적 이해 난무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권력구조의 틀을 뜯어고치자는 개헌론이 또다시 정치판을 떠돌고 있다. 개헌론자들은 하나같이 현행 헌법이 문제투성이임을 강조한다. “국가 리더십의 붕괴와 정치의 부패를 몰고 온” 것도 현행 헌법이요, “IMF에 경제주권 일부를 넘겨준”것도 현행 헌법탓이며, “지역분할 심화와 계층 간의 갈등”도 현행 헌법 책임이다. 잘못된 모든 것의 책임은 죄다 헌법 때문이다. 문제의 근원을 따지고 들면 결국 헌법에 귀책사유가 있다는 시각인 것이다. 그래서 “현행 헌법의 5년 단임 대통령제도는 ‘1인 장기집권방지’라는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고(박상천 민주당 정치개혁특위 위원장), “현행 헌법은 실패한 헌법”이라고 당당하게 주장(이인제 민주당 의원)하는 것이다.

헌법을 바꾸면 국운이 살아난다?

사진/ 정치판에 떠도는 개헌론의 불씨는 어디로 옮겨붙을 것인가.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문제제기 차원의 개헌론을 거부하지는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정용 기자)
그러나 국민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 것인지는 미지수다. 이화여대 조기숙 교수는 “개헌 얘기가 많이 나오는 것은 정당의 실패를 헌법의 실패로 은폐하려는 시도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민주당 천정배 의원도 “개헌론에 나름의 타당성이 있지만 개헌이 안 돼서 정치가 이꼴이라고 생각하는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의 여러 문제들이 헌법 탓만은 아니라는 견해다.


현 정권 출범 이후에도 숱한 개헌론이 제기됐지만 이번엔 사뭇 조직적이고 결사적이다. 민주당 내 정치개혁특위는 7월8일, 헌법관계소위원회를 열어 개헌 논의 확산을 위한 세부 추진 일정과 공천회 개최 등을 논의했다. 본격적인 공론화 작업에 돌입한 것이다. 정균환 원내총무도 “100% 찬성한다”고 거들고 나섰다. 이인제 의원은 조만간 법조계 인사 등이 참여하는 개헌연구모임을 꾸려 ‘개헌 전도사’로 나설 예정이다. 자민련도 쌍수를 들고 반긴다. 김학원 총무는 “국회에 권력구조 개선위원회를 설치해 대선 이전에 결론을 내자”고 맞장구쳤다. 당장 결판을 내자는 것이다.

사진/ 박상천 최고위원은 프랑스형 분권적 대통령제를 대안으로 주장한다. (한겨레 김경호 기자)
개헌론이 무성해지면서 개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정치지형이 개헌 세력과 비개헌 세력으로 나누어지는 듯한 모양새다. 현재로선 정치적으로 소외된 민주당 내 비주류와 자민련 등 제3세력이 개헌에 적극적이고, 정치적 주류인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와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 및 이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비개헌 세력이다. 이런 세력분포만 보더라도 올해 안에 헌법을 고쳐 대선을 치르는 일은 물리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현실적으로 개헌을 하려면 국회의석의 3분의 2 이상의 찬성과 국민투표라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제1당과 제2당의 다수세력이 연내 개헌을 부정하고 있다. 개헌 세력이 일단 개헌에 필요한 절대의석을 확보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을 모를 리 없는 개헌 세력이 연내 개헌을 주장하는 까닭은 뭘까. 권력구조 개헌론은 늘 정치세력 간 연대와 이합집산의 매개고리로 작용해왔다. 개헌을 명분으로 여러 정치세력이 헤치고 모이는 정치권 새판짜기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권력구조 개헌론은 이념과 정책이 다른 정치세력을 견고하게 이어붙이는 강한 접착제였다. 문제는 접착제의 유효기간이 별로 길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동안 개헌을 명분으로 정치권 이합집산이 여러 차례 이뤄졌으나 약속은 번번이 지켜지지 않았다.

이참에 나온 개헌론도 이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선이 다가왔으니 드디어 개헌론이 나올 때가 된 것이다. 개헌론을 제기하는 주체들의 면면을 봐도 정치적으로 소외된 세력들이다. 이들은 현재의 정치현실을 뒤흔들어야 입지가 넓어지는 게 당연한 이치다. 본인들의 의도야 국가와 민족을 위한 선의일 수 있지만 개헌론에 정략적 의도가 담겨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나름의 명분 내세워 ‘재기 발판’으로

사진/ 개헌론의 운명은 여론의 행배에 달려 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집권하면 개헌문제를 공론화할 방침이다. (이정용 기자)
그럼에도 개헌론이 상당한 파장을 낳고 있는 것은 개헌론 자체에 있는 나름의 명분 때문이다. 적어도 정치권에선 단임제와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개헌의 필요성에 대해 일정한 공감대가 이뤄진 상태다. 그간 4년중임제, 정·부통령제, 내각제 등 개헌론이 끊임없이 불거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개헌 논의 자체를 부정하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조차 “집권하면 개헌 문제를 공론화해 이른 시일 안에 매듭짓겠다”고 말할 정도가 됐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도 “문제 제기 차원의 개헌론엔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인정했다. 이제 정치권의 어느 세력도 개헌 논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 셈이다. 또한 이인제 의원을 제외한 나머지 개헌 세력은 반드시 연내에 개헌을 실현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대선공약으로 개헌을 내걸고 국민의 심판을 받자는 쪽이다. 개헌론 자체에 공감한다면 일정상으론 크게 무리가 없는 주장인 셈이다.

개헌론에 대한 정파별 태도와 이면에 깔린 이해관계를 들여다보면 올해 대선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민주당에서 개헌론을 합창한 이인제 의원과 박상천 최고위원, 정균환 총무는 자주 접촉해 조율한 흔적이 역력하다. 세 사람 모두 널리 알려진 ‘이원집정부제’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굳이 ‘프랑스식 분권적 대통령제’라는 용어를 고집하고 있다. 이는 박 최고위원의 제안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원집정부제라는 용어는 ‘권력 나눠먹기’라는 부정적인 인상을 주고,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대치적 개념을 담을 수 없으므로 ‘프랑스형 분권적 대통령제’라는 말을 쓰자는 박 최고위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나름의 논리로 철저히 무장하고 있다. 노무현 후보가 “현행 헌법으로도 책임총리제를 통해 권력을 분산할 수 있다”고 주장하자, 박 최고위원은 “대통령의 선의에만 맡기면 시행을 장담할 수 없으며, 대통령이 총리를 언제든 해임할 수 있으므로 헌법으로 제도화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고 반박했다.

이 의원이 연내 개헌으로 시기를 못박은 데는 복선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연내 개헌론을 당에선 노무현 후보체제를 흔드는 채찍으로 쓰고, 외부적으론 연대 도모를 위한 당근으로 활용하겠다는 의도다. 김윤수 공보특보가 노무현 후보의 교체를 전제로 이 의원의 당 총재나 총리직에 대해 운을 뗀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박 최고위원과 정 총무는 “노 후보의 당선 가능성에 대한 회의는 있지만 일단 공식적으로 후보 자격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또한 박 최고위원은 “정치권 재편을 겨냥해 개헌론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며 일단 개헌론의 순수성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8·8 재보선 결과나 노 후보의 지지율에 따라 정 총무나 박 최고위원의 태도가 어떻게 돌변할지는 미지수다. 박 최고위원의 한 측근은 “재집권을 하려면 외연확대가 필수적이고 외연확대를 위해선 ‘반이회창 연대’의 정치권 재편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선 개헌이라는 매개고리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개헌론이 곧바로 민감한 현실정치와 직결돼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비주류 생존의 무기… 시나리오 무성

노 후보 쪽은 개헌론이 후보 흔들기를 위한 포석이 아니냐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노 후보가 당 공식기구의 의견과 어긋난다는 점을 알고서도 ‘연내 개헌 불가’라는 쐐기를 박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한화갑 대표 역시 “이원집정부제는 권력을 분리하자는 취지는 좋지만 내각과 대통령이 싸워서 조화를 못 이룬다”고 비판적 태도를 취했다. 민주당 주류를 이루고 있는 ‘노-한 투톱체제’가 흔들릴 가능성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 밖으로 눈을 돌려보자. 내각제론자인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올해 초 이미 프랑스형 이원집정부제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전향의사’를 밝힌 바 있다. 그는 연내 개헌은 어렵지만 개헌 세력이 일단 뭉치자고 주장한다. 박근혜 의원도 “연내 개헌은 어렵기 때문에 대선공약으로 제시할 수 있다”고 김 총재와 비슷한 견해를 내놨다. 김 총재나 박 의원이나 정치적으로 매우 다급한 처지에 놓여 있다. 무엇인가 계기가 절박한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정몽준 의원은 개헌론에 일정한 거리를 뒀다. 그는 “개헌 문제는 장기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의원선거와 대선이 엇박자로 있는 것은 문제다. 다만 지금 개헌을 거론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런 태도는 자신의 지지율이 급격히 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정략적 의도가 다분한 것으로 판단되는 개헌론에 섣불리 가담했다가 오히려 손해를 입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잖아도 뜨고 있는 터에 괜히 실점의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지금 개헌을 생각하는 국민은 한 사람도 없다”고 펄쩍 뛴다. 서청원 대표는“지금 헌법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잘라 말했다. 한나라당으로선 이회창 후보가 노무현 후보를 크게 앞질러가는 터에 정국이 개헌론에 휩쓸리면서 요동치는 상황이 달가울 리 없는 것이다.

어찌 됐든 개헌 세력은 개헌론을 공론화하며 몸집불리기를 시도할 태세다. 이 과정에서 개헌을 둘러싼 논란은 지속될 전망이다. 재보선 이후의 결과에 따라 정치판이 크게 요동칠 경우 개헌론이 탄력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 하락과 정몽준 의원의 부상 등 변수들이 속출하면서 정치권엔 개헌과 신당 창당을 둘러싼 여러 가지 시나리오들이 어지럽게 나돌고 있다. 노무현 후보와 쇄신파, 개혁모임 등이 주축을 이루는 개혁 신당설, 민주당 비주류와 제3세력이 새로운 정당을 창당해 이한동 국무총리나 고건 전 서울시장 등을 옹립하는 시나리오, 민주당 비주류와 제3세력이 정몽준 의원을 대표선수로 내세우는 시나리오 등 판본도 가지가지다. 현재로선 아직 개헌론의 유효기간을 속단하기 어려운 셈이다.

정말로 헌법을 바꾸고 싶다면…

그러나 문제는 개헌론자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국민의 눈에는 지금의 개헌 논의가 정략적 이해관계에 따른 문제제기로 비친다는 점이다. 한화갑 대표도 “정당 간 합의는 이뤄질 수 있지만 국민의 동의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시간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권력구조 개편은 헌법의 중요한 뼈대를 바꾸는 일인데 선거정국의 와중에 번갯불에 콩 구워먹는 식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개헌론자들이 입을 맞춘 듯 한목소리를 내는 ‘프랑스형 분권형 대통령제’라는 것도 그렇다. 도대체 그것이 우리 현실에 얼마나 적합한 제도인지 검증된 바가 없다. 프랑스에서도 대통령과 총리의 정당이 다른 ‘좌우동거내각’이 자주 나타나면서 비효율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프랑스 시라크 대통령은 대선 승리 이후 좌우동거체제의 비효율성을 비난하는 선거운동을 벌여 6월9일 총선 1차투표에서 중도우파의 압승을 이끌어냈다. 이로써 프랑스에서도 좌우동거정부는 막을 내릴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이다. 또한 프랑스와 달리 정당이 이념과 정책이 아니라 사실상 지역으로 나뉜 상황에서 프랑스식 제도가 얼마나 실효를 낳을지도 의문이다.

결국 개헌론의 운명은 여론의 향배에 달려 있다. 연내 개헌에 대해선 싸늘한 시각이 다수지만 개헌을 대선공약으로 제시해서 헌법에 대해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보자는 데 대해선 얘기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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