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총은 총이고, 축구는 축구다

416
등록 : 2002-07-03 00:00 수정 :

크게 작게

서해교전에도 불구 축하편지 보낸 북한 축구협 회장… 남북 친선축구 성사될까

사진/ 분단으로 인해 경평축구가 중단된 뒤 90년 10월에 치른 "남북통일 축구 교환경기'. 남북한 선수들이 경기를 마친 뒤 서로 운동복을 바꿔입고 운동장을 돌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귀측 축구단의 연승은… 겨레에게 또다시 기쁨을 준 민족공동의 승리로서… 우리 민족끼리 힘과 지혜를 합치면 더 큰 저력으로 나라의 자주통일도 가져올 수 있다는 확신을 주고 있다.”

6·29 서해교전이 불거진 다음날인 6월30일 북한 축구협회 회장이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 앞으로 보낸 축하편지의 한 토막이다. 상당히 이례적인 반응이다. 한편에서는 남북한 사이의 군사충돌을 남조선 군부의 계획적인 군사적 도발행위라고 규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월드컵에서 선전한 한국 축구대표팀에게 덕담을 건넨 것이다. 편지의 내용만 훑어보면 이번 서해교전 사태가 오는 9월로 예정된 남북국가대표팀 친선축구에 별다른 악영향을 끼칠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남북 축구는 애초의 민간차원 수준을 넘어 북-미, 남북관계 등 정치적 변수로부터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정몽준에게 주는 북한의 선물?


사진/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의 역할에 따라 남북 축구시합의 성사여부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북한 당국은 그에게 '선물'을 줄 것인가. (이용호 기자)
이번 군사충돌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남북 축구 성사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무르익고 있었다. 유럽-코리아재단 이사자격으로 지난 5월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고 돌아온 박근혜 의원은 북한 축구대표단이 오는 9월8일 방한해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한국 축구대표단과 시합을 벌인다고 밝혔다. 박 의원과 함께 방북했던 재단의 지동훈 이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약속한 만큼 반드시 지켜질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행사가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위한 사전 분위기 조성작업의 하나라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재단 쪽은 월드컵이 끝나면 곧바로 대한축구협회(회장 정몽준)와 협의해 북한 축구대표단을 맞을 준비에 박차를 가할 작정이었다. 지 이사는 “조만간 정몽준 회장과 장 자크 그로하 재단 이사장이 만나 서로 (남북한)축구 친선경기를 잘 치르기 위한 준비사항을 논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정몽준 회장으로서는 월드컵 이후 숨 돌릴 틈도 없이 남북 축구 성사에 나서게 된 셈이다. 유럽-코리아재단은 이름 그대로 유럽과 남북관계 증진을 위해 세운 단체다. 이사장은 프랑스 사람인 그로하 현 서울주재 유럽연합상공회의소 대표가 맡고 있다. 재단의 성격상 독자적으로 남북 친선축구 시합을 치르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그래서 이들은 비록 북한 축구대표단의 초청 주체는 유럽-코리아재단이긴 하지만, 대한축구협회 나아가 정몽준 회장 개인이 행사의 비중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고, 어떤 구실을 하느냐에 따라 남북 축구시합의 성사나 성패 여부가 갈릴 것으로 본다. 그만큼 이번에도 정 회장의 능력과 수완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재단 쪽도 대한축구협회가 공식적으로 이번 행사를 함께 준비하기로 결정된 상태라고 확인해주었다. 남북 축구대표 선수들이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함께 뛸 경우 정 회장으로서는 또 한번 전성기를 구가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위상을 드높인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에 이어 다시 세계 언론의 조명을 받을 남북 축구시합까지 일궈낸다면 정몽준의 주가는 더 이상 오를 데가 없을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온다.

정 회장은 월드컵을 앞두고 남북 축구 단일팀을 꾸리기 위해 막판까지 심혈을 기울인 당사자다. 북한 당국도 그의 제안에 긍정적 입장을 표명하면서도 번번이 정치적 이유를 내세워 시기상조론을 펴왔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남쪽의 다른 단체나 인사들을 대하는 것과는 달리 정 회장의 제안에 대해서는 여지를 남겨온 것으로 전해진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의 끈끈한 인연을 감안해 보답 차원에서 그의 아들인 정 회장에게 언젠가 ‘선물’을 줄 생각을 품어왔다는 게 관계 소식통의 귀띔이다. 이런 북한 당국의 속마음은 6월30일 정 회장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리광근 북한 축구협회회장은 편지에서 “귀측 축구선수단이 쾌거를 가져오는 데 기여한 남측 축구협회 회장이며, 제17차 세계축구선수권대회 남측 조직위원회 위원장인 정몽준 선생이 앞으로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나가는 데 크게 이바지하리라는 기대를 표명한다”고 밝혔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남북 축구가 서해교전 같은 불상사가 일어났음에도 아예 물건너 갔다고 판단하기에는 일러 보인다.

뜨거운 축제의 마당이었던 경평축구

사진/ 지난 5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고 돌아온 박근혜 의원은 북한축구대표단이 서울을 방문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근혜의원제공)
많은 사람들이 남북 축구에 주목하는 까닭은 이 행사가 한민족차원에서는 월드컵 못지않은 폭발력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경평축구는 1929년 경성(서울)팀과 평양팀이 서울 휘문고보에서 처음 열린 뒤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친선경기를 벌이다가 46년 정치적인 이유로 중단됐다. 모두 8회에 걸쳐 23경기를 치렀다. 이후 남북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갈라서면서 축구공 대신 총부리를 겨누다가 90년 10월, 남북화해 바람을 타고 서울과 평양에서 ‘남북통일축구 교환경기’가 단 한 차례 열렸다. 그 뒤로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놀랍게도 경평축구가 열린 당시의 열광적인 분위기는 지금의 뜨거운 월드컵 열기와 너무나 흡사했다. 29년 경평축구 첫 시합이 벌어지던 사흘 내내 무려 7천여명의 관중이 경기장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관중 수다. 그때는 텔레비전이 널리 보급되지 않아 집이나 거리에서 응원을 할 수 없던 탓에 모두들 축구 운동장이나 그 근처로 달려갔던 것으로 보인다. 술집을 비롯한 모든 가게는 문을 닫았고, 거리나 차 안에는 경기장을 오가는 응원객들로 넘쳐났다. 경기가 끝나면 승패에 상관없이 서로 포옹하고, 어깨동무를 한 채 노래를 부르고 막걸리로 축하파티를 질펀하게 벌였다. 그야말로 오늘날 서울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신명나는 축제판을 당시에도 벌인 셈이었다. 일반 시민들이 열광적인 성원을 보낸 것은 경평축구가 당시 일제 식민통치에 따른 설움을 달래고 민족 에너지를 결집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이 경평축구 부활에 주목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일제 때 민족 자존심을 일깨운 축구가 민족화합의 물꼬를 트는 데 크게 기여할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특히 이들은 남북 축구가 통일문제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젊은이들의 생각을 바꿀 수도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고 있다. 월드컵 열기를 주도한 학생이나 청년들이 여세를 몰아 통일축구 응원에 나선다면 남남갈등은 물론 남북갈등의 벽도 쉽게 넘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섞인 기대다.

외신도 남북 축구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6월22일치에서 “월드컵 대회가 끝난 뒤 남북한 축구대표팀 사이의 친선경기 성사 여부는 표류상태의 남북관계 개선 여부를 가늠해볼 수 있는 ‘리트머스 테스트’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신문은 이어 남쪽의 열성 스포츠팬들의 말을 인용해 “축구나 다른 스포츠가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 평화협상 재개를 위한 ‘처방전’이 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남북 축구의 가치나 위상이 더 높아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북한 당국 강한 집착 보여

사실 월드컵 이전에도 남북 축구경기를 성사시키기 위해 정부는 물론 서울시·대한축구협회 등이 북한 당국에 구애작전을 줄기차게 펼쳤다.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경평축구 부활은 공약의 단골메뉴였다. 북한은 남쪽의 다양한 채널로부터 제안을 받을 때마다 나중에 두고보자는 식으로 피해 많은 이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하지만 최근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이미 남쪽 국가대표팀과의 축구시합일자를 구체적으로 합의했으며, 남쪽에서 벌어진 월드컵의 주요 경기장면을 녹화해 일반 주민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전에 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나아가 남쪽 선수들의 기량을 공개적으로 칭찬하는 등 월드컵 열기에 동참하는 제스처를 보여줬다. 최근에는 남북 양쪽에 다수의 사상자를 안긴 극단적인 총격전이 벌어졌음에도 북한 축구협회회장은 축하 서신을 보내왔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은 북한 당국의 남북 축구경기 성사에 대한 강한 집착과 기대감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