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개월간 축구대표팀만큼의 ‘제도개선’몸부림… “못해먹겠다”는 불평도 가득
만약 ‘정치 월드컵’이란 게 있다면 한국의 정치는 세계 몇강에나 들 수 있을까. 아마 국민 대다수는 “몇강은커녕 본선에 들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고개를 내저으리라. 한국 축구대표팀의 월드컵 4강 진출 이후 정치권에서도 ‘정치의 업그레이드’가 화두로 떠올랐다. 한나라당은 ‘업그레이드 코리아’를 기치로 내걸었고, 민주당도 ‘한민족 대도약 프로그램’의 하부계획으로 ‘업그레이드 정치’를 내세웠다. 축구의 비약적인 발전을 본떠 정치도 한 단계 질을 높이자는 얘기다.
8·8재보선만 후보 낙점하자?
제도적으론 한국정치도 이미 업그레이드가 한창 진행 중이다. 국민을 정치에 끌어들였고(국민경선제), 권력의 배분(집단지도체제)을 꾀했으며, 민주적 리더십 창출(상향식 공천제)을 시도했다. 민주당의 실험은 한나라당까지 달뜨게 했다. 한나라당도 어쨌든 대선후보 경선을 실시했고, 상향식 공천제를 명문화했다. 민주당이 도입한 집단지도체제는 박근혜 의원의 한나라당 탈당 명분으로 작용해 정치지형의 변화까지 촉발시켰다.
정치 업그레이드의 시발점은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한 지난해 11월8일이었다. 정치발전을 가로막은 만병의 근원으로 지목된 1인보스체제의 해체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 뒤 민주당은 잇따라 새로운 제도적 실험에 나섰다. 김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서는 전횡을 휘둘러온 1인보스에 대한 퇴출명령서였고, 3김시대의 종언을 확인하는 사망진단서였던 셈이다. 드디어 한국의 정치도 바뀌어 가는 듯했다. 그러나 지방선거가 끝난 뒤 이런저런 수군거림이 나오더니 아예 대놓고 제도적 후퇴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민주당에선 8·8 재보선에 한해 ‘낙점’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튀어나왔다. 최고위원들 때문에 못해먹겠다는 당직자들의 불만은 갓 도입된 집단지도체제의 비효율성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한나라당도 중앙당이 직접 후보를 공천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집단지도체제가 도입됐지만 당내 누구도 진정한 집단지도체제라고 내놓고 말하진 못하는 게 한나라당의 현실이다. 여성후보의 정치권 진입은 뛰어넘기 어려운 장벽임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 그간의 정치적 실험은 실패한 것일까. 정치는 여전히 바꾸기 어려운 ‘현실’이며, 제도의 발전과 현실정치의 변화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는 것일까. 천덕꾸러기 취급 받는 상향식 공천제
“돈들이 많이 오갔다. 경선이 빈번해지면서 당 조직의 타락현상을 부추겼다. 처음엔 안 그랬는데 경선이 거듭되더니 대의원들이 차츰 이상하게 변하더라. 의당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한번은 구청장 후보의 요청에 따라 오전 10시에 대의원들이 지구당 사무실에 모였는데 ‘밥도 안 사느냐’는 대의원들의 요구가 나왔다. 아침밥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밥을 사라니, 웃지 못할 일이었다.” 민주당 수도권지역 한 초선의원의 고백이다. 공천현장을 누빈 당 조직국의 한 관계자도 “후보들이 경선과정에서 현금이나 식사제공 등 어떤 방식으로든 대의원들에게 돈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돼 있다. 괜찮던 대의원들도 돈에 맛을 들이는 것 같았다”고 현장경험을 털어놨다. 그는 “국회의원의 주례 금지처럼 돈 살포를 막기 위한 특단의 조처가 필요하다”며 극약처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지방선거 이후 민주당에선 상향식 공천제에 대한 불만이 속출했다. 당 조직국에서도 선거참패의 중요한 원인으로 경선에서 비롯된 조직이완과 본선경쟁력 약화를 꼽았다. 경선에서 탈락한 후보들이 불출마 서약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바람에 민주당 후보들이 탈락한 사례는 부지기수다. 경기도 가평·시흥, 전남 강진, 광주 북구, 서울 강북 등이 대표적인 지역이다. 이들 지역에선 선거운동 과정에서 돈봉투를 둘러싼 잡음도 적잖이 불거졌다. 함승희 의원은 “자질이 부족하고 함량이 떨어지는 후보들이 나와서, 각종 연고와 돈으로 대의원을 포섭한 뒤, 경선에서 떨어지면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선거를 망치는 것”이라고 상향식 공천제의 부정적인 측면을 포괄적으로 진단했다.
한나라당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김문수 제1사무부총장은 지방선거 직후 ‘상향식 공천포기’를 선언하기도 했다. 사실 김 의원은 생생한 체험자였다. 지역구(경기도 부천소사)의 부천시장 후보 경선에서 강간 등의 전과 7범이 경선을 통과한 것이다. 김 후보는 “선거에서 지더라도 절대로 안 된다”며 버텼고, 결국 후보를 교체했다. 그런 만큼 김 의원의 문제의식이 심각했던 것이다. 정병국 의원의 지역구인 경기도 양평과 가평에선 경선이 끝나자마자 서약서를 내팽개치고 경선에 불복한 후보들이 “대통령 후보도 경선에서 떨어진 뒤 탈당해 출마했는데 우리라고 왜 그래선 안 되느냐”며 항의하기도 했다. 한나라당 한 재선의원은 “인격이나 경쟁력보다는 돈을 잘 뿌리는 사람이 공천된 경우가 많았다. 당에서 지명하는 것보다 못한 경선도 있었다”고 지적했다.
정당 민주화를 상징하는 대표상표로 대접받던 상향식 공천제는 이처럼 지방선거를 겪은 뒤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이나 한나라당 모두 상향식 공천제 자체를 포기해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차츰 힘을 얻고 있다. 고쳐야 할 허점은 많지만 이전으로 되돌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영국에서도 80년 전엔 선거 때면 후보자들한테서 향응을 제공받은 취객들로 거리가 넘쳐났다고 한다. 현재의 진통은 민주적 제도가 뿌리내리기 위한 초기의 비용이다. 감수해야 한다.” 민주당 조직위원장인 이호웅 의원의 지적이다. 한나라당 김홍신 의원도 “당장 마땅한 해결책은 없지만 그렇다고 중앙당이 일방적으로 공천권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되돌아가선 안 된다”고 말했다. 지난해 민주당 특대위에서도 상향식 공천제 시행상의 문제점을 우려했으나 “시행착오가 나오더라도 결국 당원과 대의원들 스스로가 판단하고 깨닫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 관계자가 전했다. 당원과 대의원들이 공천권을 행사하는 만큼, 그 잘못과 책임도 결국 그들 몫이라는 것이다.
제도는 좋은데 왜 현실에선 왜곡되는 것일까. 지구당의 당원구조와 정당문화가 좋은 제도가 뿌리내리기 어려운 토양이라는 진단이 많다. ‘귤화위지’(중국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심으면 탱자로 변한다는 뜻)라는 것이다. “문제는 현재의 동원정당체제다. 지구당에서 평소 당원들을 관리하다가 선거 때가 되면 이들을 동원하는 방식을 고쳐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 민주당 정동영 의원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직장인이나 전문인 등을 당원으로 확보해야 한다”며 인터넷을 활용한 전자지구당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호웅 의원은 “좋은 후보는 중앙당 차원에서 집중적으로 홍보를 해주는 등의 중앙당 개입이 필요하다”며 “선거법을 고쳐 일반인 누구나 제약 없이 정당경선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선관위가 정당행사의 감시를 맡을 수 있도록 법을 고쳐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은 말이 국민경선이었지 솔직히 당원경선이었다. 그렇지만 분명히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당과 이회창 후보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 이회창 후보의 핵심 참모는 “동원정당의 한계를 극복하고 정당의 취약한 대중적 기반을 확대해야만 아래로부터의 공천이라는 국민경선제와 상향식 공천의 취지를 살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당명부제는 어디로 갈 것인가
국회에서도 진일보한 제도들이 여럿 선보였다. 지방선거 정당명부제가 도입돼 진보적 정당이 약진하는 등 정당의 지형에도 변화의 조짐이 엿보였다. 정당법상의 여성후보 할당제도 강화됐다. 지난 2월 개정된 국회법 114조2항(자유투표)은 “의원은 국민의 대표자로서 소속 정당의 의사에 기속되지 아니하고 양심에 따라 투표한다”고 명시돼 있다. 드디어 의원들의 자유투표제가 법제화된 것이다.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해서 굳이 법까지 만들 필요가 있느냐는 물음이 나올 법도 하지만 이 조항을 만드는 데 50년 이상이 걸렸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국회법 20조2항은 국회의장이 당선된 다음날부터 당적을 가질 수 없도록 했다. 의장의 중립성을 둘러싼 논란에 획이 그어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제도적으로 미흡한 점도 수두룩하다. 헌법재판소의 1인1표제에 대한 위헌판결에 따라 지난 지방선거에선 정당명부제가 도입돼 민주노동당이 약진할 수 있었다. 제도개선의 위력이었다. 그러나 아직 국회의원선거에서 정당명부제를 어떤 방식으로 도입할지에 대한 협의는 진행되지 않는다. 국회 관계자는 “경험에 비춰볼 때 이 논의는 총선이 코앞에 다가온 2003년 말에야 진행될 것 같다”고 내다봤다. 지난해 발족한 ‘올바른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실현을 위한 노동·시민사회단체 연대회의’는 1인2표제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고, 의석배분 기준을 독일의 5%에서 2.5%로 낮출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고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유권자가 지지 정당에 투표하고 득표율에 따라 각 정당에 의석을 배분하자는 것이다. 김홍신·김원웅 의원 등 한나라당 일각에선 “비례대표의 비율이 늘어나면 정당의 보스가 의원들을 통제할 수 있는 무기를 더욱 늘려줄 뿐”이라며 대안으로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주장한다. 비례대표 명부를 결국 정당의 보스가 작성하게 돼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는 한나라당이 이회창 후보의 1인보스체제를 유지하느냐, 아니면 실질적으로 정당의 지배구조를 민주적으로 개선하느냐와 연계된 문제로 보인다. 노무현 민주당 후보도 중대선구구제 전환을 지역정치 극복의 대안으로 내놨다.
여성의 정치진출 확대를 위한 제도적 장치들도 많이 도입됐다. 성과는 미약했지만. 민주당은 4월25일 후보경선에서 여성후보가 남성후보와 경쟁해 2위 안에 들면 결선투표를 거치지 않고 중앙당이 결정하기로 공천이 진행 중인 와중에 긴급히 당헌을 고쳤다. 그러나 상향식 공천제는 여성들에겐 족쇄로 작용했다. 민주당 여성국의 한 관계자는 “경선에서 대부분 여성후보는 탈락했다. 남성 당직자들끼리 뭉치고 대의원들이 여성에 대해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한 탓에 제도적으로 진일보한 상향식 공천제가 여성정치인에겐 정치권 진입을 가로막는 장벽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국회의장 자유투표’변신 시금석 될듯
한국의 정치판에선 지난 6개월 사이에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정치제도 개선이 이뤄졌다. 국민이 실감하지 못하는 사이 정치에서도 나름의 변신시도와 거듭나려는 몸부림이 있었던 셈이다. 가히 ‘정치혁명’이라 일컬을 만하다. 그러나 정치는 언제든 제도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위력을 지녔고, 정치인들은 나무랄 데 없는 제도도 형편없는 무용지물로 전락시킬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 아닌가. 방탄국회는 여전히 계속됐고, 국회는 때를 넘기도록 원구성조차 못했다.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국민의 시선은 여전히 따갑다. 그럴듯한 제도를 만들었다고 정치가 한꺼번에 좋아지고, 정치인들이 일거에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국회의장 선출이 진정한 자유투표 방식으로 진행될지 여부는 정치권 변신노력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의장 선출뿐만 아니라 일반 정책사안에 대해서도 자유투표를 확대하는 것이야말로 정치를 업그레이드하는 핵심이 될 것이다. 국민이 눈여겨 지켜볼 대목이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사진/ 민주당의 ‘국민경선’은 국민들을 정치에 끌어들인 히트상품이었다. 뒤이어 한나라당도 대선후보 경선을 실시했다. (이용호 기자)
정치 업그레이드의 시발점은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한 지난해 11월8일이었다. 정치발전을 가로막은 만병의 근원으로 지목된 1인보스체제의 해체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 뒤 민주당은 잇따라 새로운 제도적 실험에 나섰다. 김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서는 전횡을 휘둘러온 1인보스에 대한 퇴출명령서였고, 3김시대의 종언을 확인하는 사망진단서였던 셈이다. 드디어 한국의 정치도 바뀌어 가는 듯했다. 그러나 지방선거가 끝난 뒤 이런저런 수군거림이 나오더니 아예 대놓고 제도적 후퇴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민주당에선 8·8 재보선에 한해 ‘낙점’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튀어나왔다. 최고위원들 때문에 못해먹겠다는 당직자들의 불만은 갓 도입된 집단지도체제의 비효율성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한나라당도 중앙당이 직접 후보를 공천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집단지도체제가 도입됐지만 당내 누구도 진정한 집단지도체제라고 내놓고 말하진 못하는 게 한나라당의 현실이다. 여성후보의 정치권 진입은 뛰어넘기 어려운 장벽임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 그간의 정치적 실험은 실패한 것일까. 정치는 여전히 바꾸기 어려운 ‘현실’이며, 제도의 발전과 현실정치의 변화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는 것일까. 천덕꾸러기 취급 받는 상향식 공천제

사진/ 국회법 20조2항은 국회의장이 당선된 다음날부터 당적을 가질 수 없도록 했다. 2000년11월 검찰 수뇌부 탄핵안 처리를 놓고 의장을 모셔가려는 한나라당과 저지하려는 민주당 의원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용호 기자)

사진/ 축구의 비약적인 발전처럼 정치도 한 단계 질을 높여줄 것을 국민들은 바라고 있다. 총선연대의 촛불시위. (이용호 기자)

사진/ 제도적으론 한국정치도 이미 업그레이드가 한창 진행 중이지만, 지방선거가 끝난 뒤 아예 대놓고 제도적 후퇴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터져나오고 있다. (이용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