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은 굼뜬 최고위원회로 분란 거듭, 한나라당은 너무 안정돼서 불안
“제왕적 총재 시대의 조종이 울렸다.” 지난 4월2일 민주당에 이어 한나라당도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하기로 하자 언론은 잔뜩 의미를 부여했다. 집단지도체제는 한국정치의 고질적 병폐인 1인총재제를 대체할 특효약으로 받아들여졌다.
신속성과 효율성에 관한 논란
그로부터 석달이 지난 요즘. 정치권 안팎에는 집단지도체제에 대한 회의론이 무성하다. “책임과 권한이 불분명한 현재의 집단지도체제에선 아무런 결론도 내릴 수 없고 당직자들도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다.”(정범구 전 민주당 대변인) “이회창 총재 사퇴 이후 겉보기에 좀 나아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당은 여전히 이회창 후보 중심으로 쏠려 있다. 그에게 비판적인 사람은 당에서 결코 중용될 수 없다.”(김원웅 한나라당 의원) 언론에서도 민주당의 각종 당직인선에 대해 ‘권력 나눠먹기’라는 비난을 퍼부으며 집단지도체제에 뭇매를 때렸다. 집단지도체제는 출발부터 위태롭게 흔들렸다.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한 민주당은 민주적 정당운영의 표본을 창출하겠다는 의지가 넘쳤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한화갑 대표는 끊임없이 정치력을 의심받았다. 일부 당직자들은 ‘최고위원회 무용론’을 외쳤고 “아! 옛날이여”를 외치는 인사들도 나왔다. 의사결정의 신속성과 효율성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였다. 1인 보스정치를 청산할 만병통치약쯤으로 여겨지던 집단지도체제가 왜 이런 처지에 몰렸을까. 원인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우선 출범 직후 지방선거가 닥쳐 상황 자체가 어려웠다. 추미애 최고위원은 “선거라는 비상국면에선 효율성이 최우선시된다. 그런데 집단지도체제는 대응이 굼뜨고 신속한 의사결정이 어려워 출발부터 힘들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한 대표의 정치력 부족도 원인으로 지적된다. 한 대표는 첫 회의에서 지명직 최고위원안을 내놨지만 비주류의 반발에 부닥쳐 처음부터 지도력에 상처를 입었다. 한 대표는 첫 당직인선에서 김원길·박병윤·정범구 의원 등 ‘한화갑 대표 만들기’에 발벗고 뛴 인물들을 발탁했다. 집단지도체제의 핵심은 권력분점이다. 제왕적 총재가 사라진 자리를 최고위원들의 이해와 합의로 채워야 하는 것이다. 비록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지리한 논쟁과 소모적인 토론이 수반될지라도. 그런데 한 대표는 다른 최고위원들의 의견을 널리 구하고 설득하는 포용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한 핵심 당직자는 “한 대표는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자주 ‘나한테 맡겨달라’고 얘기한다. 이런 말투는 꼭 DJ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집단지도체제적 사고와는 거리가 멀다”고 비판했다. 서청원 대표는 무엇으로 사는가
최고위원들 사이의 복잡한 역학관계와 힘겨루기도 집단지도체제의 정착을 방해했다. 당 3역 인선에서 배제된 정대철 최고위원은 김한길 전 의원을 국가전략경영연구소장으로 강하게 밀었고 한 대표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노 후보 쪽에선 김 전 의원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 대표와 최고위원, 대선후보 사이에 박자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지방선거가 참패로 끝나자 집단지도체제에 대한 비난이 고조됐다. 김원길 총장과 박병윤 정책위의장, 정범구 대변인은 최고위원들과 집단지도체제에 불만을 나타내며 사퇴해버렸다. 공멸의 위기감을 느낀 최고위원들은 지난 6월23일 심야회동을 통해 밤늦도록 통음하며 속얘기를 나눴다. 당직인선은 주류와 비주류가 적절히 타협하는 모양새로 매듭지어졌다. 다음날 최고위원회의는 모처럼 분란 없이 만장일치로 당직인선안을 통과시켰고, 갈등은 봉합됐다. 나쁘게 표현하면 계파 간 나눠먹기였고, 좋게 표현하면 권력분점이었다.
1인총재의 공백이 너무 커서 집단지도체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것일까. “권력 나눠먹기라고 비판하는데, 그럼 혼자 다 먹으라는 얘기냐. 집단지도체제는 권력이라는 파이를 여럿이 나눠먹는 것이고, 1인총재체제는 총재가 독차지하는 것이다. 문제는 합리적인 원칙과 기준이 있느냐의 여부지 무조건 나눠먹기라고 매도해선 안 된다. 수십년 동안 내려온 1인지배체제를 하루 아침에 바꾸기는 쉽지 않다. 당분간 우왕좌왕, 우물쭈물, 오락가락하는 게 불가피하다. 지금은 조정기고, 비용을 지불해야만 한다.” 정동영 의원의 얘기다. 시행 초기의 혼란은 정착을 위해 지불해야 할 수업료라는 것이다. 추미애 최고위원은 “지방선거 후보 공천심사과정도 총재와 실력자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던 이전의 공천심사위원회보다 훨씬 투명하고 합리적이었다”며 “집단지도체제가 최선은 아니더라도 최악의 결론은 피할 수 있는 제도”라고 말했다.
지난 5월10일, 뒤늦게 서청원 대표 중심의 집단지도제체를 출범시킨 한나라당은 오히려 안정됐다. 그러나 소리가 나게 돼 있는 집단지도체제가 안정돼 있다는 게 한나라당이 안고 있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집단지도체제 반대가 대세였다. 정권교체에 혼선이 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지금은 대여 공세 등 부담스런 대목은 서청원 대표가 지고 가고, 이회창 후보는 대권 행보에만 전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 핵심당직자의 말이다. 사실 이회창 후보를 비롯한 한나라당 주류는 노무현 돌풍과 비주류 반발을 꺾기 위해 마지못해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런데 요즘 그 효과를 톡톡히 누린다.
모두 한나라당만의 독특한 역학관계 때문이다. 최고위원들 다수는 민정계 출신이다. 그러나 이회창 후보는 소수파인 민주계 서청원 의원을 밀었다. 그 덕에 경선에서 최다득표를 했고, 당 대표가 됐다. 결국 서 대표는 독자적으로 힘을 행사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 서 대표의 생존법은 이른바 ‘장수론’. “이회창 후보를 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한 대표”라는 것이다. 서 대표는 당의 주요 현안을 이회창 후보와 사전 협의한다. 대선 후보에 대한 “예의” 차원이라고 설명한다. 다른 최고위원들은 이회창 후보를 위해 분골쇄신하겠다는 서 대표를 흔들 명분이 없다. 서 대표를 흔드는 것은 곧 이 후보에 대한 반란이다. 이 후보의 측근 참모도 이 사실을 인정했다. “우리 최고위원 제도는 민주당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일단 다수당이어서 현재의 파이가 크다. 정권교체 이후 나눠먹을 미래의 가치는 더욱 크다. 서청원 대표가 있지만 이회창 후보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 1인지배체제 종식을 명분으로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했지만 실질적 주인은 여전히 이회창 후보라는 것이다.
한나라당 ‘폭풍 전야의 고요’
이런 현실에 도전하고 의문을 제기할 세력들은 대부분 제거됐다. 반이회창 기치를 내걸었던 박근혜 의원은 탈당했다. 최병렬·이부영 의원은 대선후보 경선 패배 이후 침묵하고 있다. 김덕룡 의원이 “집단지도체제로 바뀌었다고 당내 민주주의가 정착된 게 아니다”라고 외치지만 영향력은 적다.
더욱이 한나라당은 모든 논공행상을 8·8 재보선 이후로 미뤘다. 국회 상임위원장과 주요 당직이 누구에게 주어질지 아직 모른다. 주류, 비주류 모두 배분결과를 지켜봐야 한다. 그동안 반이회창 기치를 들었던 몇몇 비주류 중진도 최근 서청원 대표를 만나 국회 상임위원장 자리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도권 한 의원은 “최고위원들은 대부분 이회창 후보에게 충성했던 사람이다. 또 상임위 배정, 공천심사, 당직 배분 등 여전히 현실적인 이익이 남아 있다. 당직을 내놨지만 이회창 후보의 힘이 자리 배분을 결정한다는 것은 모두 다 아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집단지도체제가 실시됐지만 이회창 총재 때나 본질적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나라당도 결국 내부 갈등이 폭발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개혁성향의 한 재선의원은 “아직 갈등을 촉발할 만한 이해관계의 충돌이 없었다. 그러나 상임위원장과 당직 배분 등 실권이 나뉘면서 불만은 터져나올 것이다”고 말했다. 이회창 후보의 측근 인사도 “지금이야 모두 참고 있지만 대선 전후 ‘포스트 이회창’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르면 집단지도체제는 심각한 내분에 빠져들 것”이라 전망했다. 한나라당의 안정은 서 대표 중심의 집단지도체제가 탄탄한 때문이 아니다. 향후 권력 배분을 기대하고 사실상 오너인 이회창 후보를 바라보면서 현재의 권력욕구를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분란이 거듭되고 소리가 요란하지만 차츰 안정감을 찾아가는 민주당, 너무 안정적이어서 오히려 불안한 한나라당. 두 당의 집단지도체제에 대한 중간평가는 이렇게 요약된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사진/ 민주당 한화갑(왼쪽) 대표가 끊임없이 정치력을 의심받으면서, 일부 당직자들은 ‘최고위원회 무용론’을 외치고 있다. (이용호 기자)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한 민주당은 민주적 정당운영의 표본을 창출하겠다는 의지가 넘쳤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한화갑 대표는 끊임없이 정치력을 의심받았다. 일부 당직자들은 ‘최고위원회 무용론’을 외쳤고 “아! 옛날이여”를 외치는 인사들도 나왔다. 의사결정의 신속성과 효율성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였다. 1인 보스정치를 청산할 만병통치약쯤으로 여겨지던 집단지도체제가 왜 이런 처지에 몰렸을까. 원인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우선 출범 직후 지방선거가 닥쳐 상황 자체가 어려웠다. 추미애 최고위원은 “선거라는 비상국면에선 효율성이 최우선시된다. 그런데 집단지도체제는 대응이 굼뜨고 신속한 의사결정이 어려워 출발부터 힘들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한 대표의 정치력 부족도 원인으로 지적된다. 한 대표는 첫 회의에서 지명직 최고위원안을 내놨지만 비주류의 반발에 부닥쳐 처음부터 지도력에 상처를 입었다. 한 대표는 첫 당직인선에서 김원길·박병윤·정범구 의원 등 ‘한화갑 대표 만들기’에 발벗고 뛴 인물들을 발탁했다. 집단지도체제의 핵심은 권력분점이다. 제왕적 총재가 사라진 자리를 최고위원들의 이해와 합의로 채워야 하는 것이다. 비록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지리한 논쟁과 소모적인 토론이 수반될지라도. 그런데 한 대표는 다른 최고위원들의 의견을 널리 구하고 설득하는 포용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한 핵심 당직자는 “한 대표는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자주 ‘나한테 맡겨달라’고 얘기한다. 이런 말투는 꼭 DJ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집단지도체제적 사고와는 거리가 멀다”고 비판했다. 서청원 대표는 무엇으로 사는가

사진/ 한나라당 서청원 대표의 생존법은 이른바 ‘장수론’. “이회창 후보를 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한 대표”라는 것이다. (이용호 기자)

사진/ 박근혜 의원 등 이회창 체제에 도전하고 의문을 제기할 세력들은 대부분 제거된 상태다. (이용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