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재보선 승패가 대선 판도 결정… 느긋한 한나라당과 다급한 민주당 정면충돌
“아직 8·8 재보선이 남아 있다. 진짜 경쟁은 지금부터다”, “재보선에 지면 공든 탑이 무너진다.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6·13 지방선거에서 압승한 한나라당과 이회창 후보의 측근 참모들은 요즘 재보선에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다. 노무현 민주당 후보와의 진검승부처를 8·8 재보선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8·8 재보선은 간단치 않다. 6월24일 현재 재보선 확정 지역은 10곳. 대법원 확정판결만 기다리는 지역도 4곳에 이른다. 최소 10곳, 최대 14곳에서 선거를 치른다. 사실상 미니총선인 셈이다. 정치적 의미는 더욱 크다. 14곳 가운데 8곳이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나머지 6곳은 한나라당 우세 지역인 영남 3곳, 민주당이 우세한 호남·제주에 3곳씩이다. 균등하게 나뉜 셈이다. 한나라당이 또 승리하면 12월 대통령 선거전까지 상승세를 계속 이어나갈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 반면 지방선거 참패 이후 동요하는 민주당과 노무현 후보는 걷잡을 수 없는 위기로 내몰리게 된다. 이회창·노무현 두 후보 모두 사활을 걸고 매달릴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전국 10곳서 이·노 대리전 치러
한나라당은 발빠르게 움직인다. 민주당이 지방선거 참패로 내분을 겪고 있던 지난 6월18일, 일찌감치 출마 희망자를 공모하기 시작했다. 선거에 걸림돌이 될 만한 요인들을 하나둘 제거하고 있다. 지난 6월20일, 김문수 사무 제1부총장은 상향식 공천 포기를 선언했다. “대법원 판결 등 비정상적 상황에서 치르는 선거인 만큼 경선원칙을 적용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여기엔 깊은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 이회창 후보의 한 측근은 “자유경선으로 경쟁력 없는 지역 인사가 후보로 선정되면 지방선거에서 마련한 상승 분위기가 꺾일 수 있다. 좀 비판받더라도 경쟁력 있는 후보를 출마시키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말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경선불복 논란이 재연돼 전열이 흐트러지는 사태는 어떻게든 막겠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지방선거 때 경선결과에 불복한 무소속 출마자들 때문에 적지 않은 홍역을 치른 바 있다.
‘뜨거운 감자’인 YS의 둘째아들 김현철씨 문제도 해결했다. 한나라당 안에서는 YS의 정치적 영향력을 고려해 현철씨를 공천하거나, 그가 출마한 마산 합포에 후보를 내지 말자는 의견이 제기됐다. 그러나 부패정권 심판론을 외쳐온 한나라당이 자기 모순에 빠지고, 역풍이 불어 보선 패배로 이어질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했다. 결국 한나라당은 최근 독자후보를 내기로 결정했다.
한나라당은 특히 수도권에서 인물로 정면승부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지방선거 때 재미를 본 ‘부패정권심판론’ 같은 메가톤급 쟁점을 또 발굴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참신하고 경쟁력 있는 인물만이 승리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23일 마감예정인 후보자 공모기간을 25일까지 연장했다. 이상득 사무총장은 “더 좋은 사람들이 공모에 응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총장은 “공모신청자 가운데 적당한 후보가 없으면 영입에 나설 수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수도권 승리를 확신할 만한 ‘대어’를 낚기 위해 발벗고 영입작업을 펼치겠다는 것이다.
이미 재보선 지역별로 영입 대상자를 선정한 뒤 설득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한나라당 안에서는 김현철씨를 구속했던 심재륜 전 고검장, 김대중 대통령의 세 아들 비리를 파헤친 차정일 전 특별검사, 탤런트 유인촌씨 등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심 전 고검장의 경우 김민석 의원(민주당) 지역구인 영등포을에 출마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나돈다. 이들이 한나라당 영입 제안에 화답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몸값이 치솟고 있는 이들이 흙탕물 싸움을 감내하며 반쪽짜리 국회의원에 도전할지도 의문이다. 한나라당 한 핵심 인사는 “심 고검장 등이 난색을 표해 영입에 다소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이 인사는 그러나 “적어도 수도권 두곳 정도는 참신한 인물을 대표주자로 내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회창 후보가 직접 설득에 나서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소장 참모진 일각에서는 장기표씨를 영입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한 참모는 “영원한 재야인 장기표씨가 수도권에 출마해 노 후보의 개혁성에 의문을 제기하면 노풍은 다시 부활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 보수적인 이회창 후보의 약점은 보완된다”고 말했다. DJ 셋째아들 홍걸씨 비리를 파헤쳐온 이신범 전 의원을 경기,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폭로 주역인 박계동 전 의원을 서울 재보선 지역 가운데 한곳에 출전시키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한나라 “대어 없네”… 민주 “노 뜻대로”
민주당은 사정이 아주 복잡하다. 민주당은 지난 6월20일 재보선을 전담할 ‘8·8 재보선 특별기구’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재보선 뒤 재경선’으로 배수진을 친 노무현 후보에게 기구인선 전권을 부여해 사실상 공천권을 인정했다. 노 후보는 24일 김근태 상임고문을 특별기구 위원장에 선임했다. 6월 말까지 기구를 완비하고 외부인사 영입에 나서 늦어도 7월10일까지는 출마자 선정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그러나 상황이 뜻대로 될지 예측할 순 없다. 당장 당 전체가 깊은 혼돈과 패배주의에 빠져 있다. 조직국 한 핵심 관계자는 “지금 재보선에 대해 구체적인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당 내분과 패배주의 때문에 모두들 손을 놓고 있다”고 전했다.
노 후보 쪽 소장 참모와 쇄신파 의원들은 이른바 ‘노무현 컬러’로 정면돌파하자고 목청을 높인다. 몇몇 의원들은 “노 후보가 자기 색깔에 맞는 경쟁력 있는 후보를 낙점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국민경선 이후 대세로 굳은 상향식 공천원칙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다급하다.
그러나 ‘노무현 컬러’가 현실화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일단 공천할 만한 인물이 마땅치 않다. 민주당 일각에선 영화배우 문성근, 시사평론가 류시민, 아나운서 손석희,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 변호사 이정우씨 등을 영입하자는 의견이 나온다. 이들을 수도권에 포진하면 젊은 유권자들 사이에서 노무현 돌풍을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관론도 적지 않다. 문성근씨는 ‘노사모’ 활동에 가장 적극적인 인사다. 노사모 안에서조차 문씨를 공천하면 측근정치로 비판받고 역풍이 거세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류시민씨는 비판적 논객으로 인기가 있지만 득표력은 미지수다. 손석희씨는 영입 대상자로 거론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는 태도를 보인다. 손씨는 “민주당에서 공식적으로 제안받은 바 없는데 내 이름이 계속 나오고 있다”면서 “말도 안 된다. 나는 출마 안 한다”고 잘라 말했다. 386의 정치세력화를 준비해온 ‘제3의 힘’ 대표인 이정우 변호사도 마찬가지. 최근 이 변호사와 접촉한 제3의 힘 한 인사는 “이 변호사는 지방선거 직전까지도 여야 소장파 의원들을 상대로 새 정치를 위해 헤쳐모이자고 제안했다”면서 “그러나 금배지에 연연하는 모습에 실망해 다시는 여의도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고 말했다. “민주당 입당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민주당 내부의 복잡한 역학관계도 노 후보의 선택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한 당직자는 “지방선거에 참패한 노 후보가 각 계파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물린 민주당 내부의 현실을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후보자를 자기 색깔로 공천한다는 것도 어렵다”고 말했다. 실제 김중권·한광옥 두 전직 민주당 대표가 각각 영등포을과 금천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다. ‘마당발’ 김상현 고문은 광주북갑에 눈독을 들인다. 이종찬 전 의원도 종로보선이 최종 확정되면 설욕전에 나선다는 각오다. 배수진을 친 노무현 후보에게 사실상 8·8 재보선 공천권이 주어졌지만 선택의 폭은 그리 넓지 않다. 노 후보는 이를 의식한 듯 21일 실무당직자들과 간담회에서 “51%로 당선될 상황이면 입맛에 맞지 않는 후보라도 내야 한다”고 말했다. 당선 가능성을 최우선에 둘 뿐 자기 색깔을 고집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뻔한 얼굴로 등돌린 민심을 달랠 수 있겠느냐는 비관론도 적지 않다.
진짜 경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8·8 재보선. 12월 대선에 앞서 반드시 넘어야 할 진검승부를 앞둔 이회창·노무현 두 후보의 속마음은 과연 어떨까. 승리의 여신이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다만 재보선에 패배하면 후보자격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는 노 후보 쪽이 훨씬 다급하다. 이 후보 쪽 역시 인물난을 겪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다. 이 후보 쪽 한 정무참모는 “우리나 민주당 모두 시간이 없고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는 민주당 후보군이 다 짜인 뒤 외부인사를 징발해도 늦지 않다”고 말했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사진/ 8·8재보선이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사활이 걸린 일대격돌이 될 전망이다. 한나라당은 인물로 승부한다는 전략으로 후보자 선정에 들어갔다. (이정용 기자)

사진/ 민주당은 다급한 처지임에도 당내 역학관계로 후보자 선정에 난항을 겪을 전망이다. (이정용 기자)

사진/ 각 정당의 영입 대상자로 거론되는 인사들. 맨 왼쪽부터 심재륜 전 고검장, 차정일 전 특별검사, 영화배우 문성근씨, 아나운서 손석희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