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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올 가을에 김정일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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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6-1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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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소식통 이병화 국제농업개발원 원장…2005년 이전에 북한을 주식회사 체제로 바꿀 것

사진/ 북한의 은밀한 내부사정에 밝다고 알려진 이병화 원장. 그는 ‘북한-러시아 극동지역 정착촌’ 건설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이정용 기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올 가을에 서울에 온다. 물론 그에 대한 많은 불신이 쌓여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올해 안으로 서울땅을 밟기로 결심한 상태다. 적절한 방문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을 뿐이다.”

이병화(57) 국제농업개발원 원장. 그는 북한의 은밀한 내부사정에 밝은 손꼽히는 소식통으로 알려져 있다. 89년부터 중국 동북3성-러시아 극동-북한을 잇는 3각 농업협력사업에 손대면서 자연스레 북한과도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하지만 그는 좀처럼 언론에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가 벌이는 사업들은 대개 뜸을 오래 들여야 하는 것들이어서 한건 하고 손을 뗄 수 없었던 탓이다. 이런 그가 모처럼 입을 연 것은 한마디로 답답해서란다. 북한은 지금 내부적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개혁·개방 조처들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으나 남쪽에서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쉽다는 것이다. 이 원장은 중국과 러시아 극동을 떠도는 탈북자들을 위한 대규모 정착촌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당사자이기도 하다. 참고로 그는 인터뷰 내용의 상당부분을 북한 당국의 고위 관료를 비롯해 러시아 쪽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콘스탄틴 폴리코프스키 극동연방지구 대통령 전권대리인의 측근, 유럽상공회의소 고위 간부 등 김정일 위원장이나 그 측근과도 교분이 두터운 인사들로부터 전해들은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 가운데 폴리코프스키는 김 위원장이 지난해 8월, 무려 24일간 러시아 전역을 돌 때 밀착 동행한 인사다.

러시아·중국 방문 뒤 충격 받아


김 위원장의 답방을 확신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북쪽 고위 인사를 비롯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측근들로부터 여러 차례 얘기를 듣고 확신을 갖게 됐다. 김 위원장은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하고 있다. 여러 장애요인이 적지 않지만 그래도 현 정권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서울에 한번 내려가는 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는 남쪽 정부 초청에 따른 답방 형식을 띠지 않고, 남쪽 대기업 회장의 초청을 받아 오는 식으로 방문할 수도 있다. 그는 이미 방문하고 싶은 곳까지 정해놓았다. 삼성전자(반도체부문)·삼성에버랜드·대우조선소·포항제철 등 주로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와 있는 기업들이다. 서울로 내려올 때는 기차를 이용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경의선의 연결은 그래서 중요하다. 사실 김 위원장이 결단만 내리면 경의선은 하루 만에라도 뚫릴 수 있다.

김 위원장이 특별히 남쪽 기업들을 방문하려는 까닭은.

지난해 1월 그는 중국 상하이의 놀라운 경제발전상에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오죽했으면 ‘천지개벽’이라는 발언까지 흘러나왔겠느냐. 그를 수행한 측근들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중국과 8월의 러시아 방문 이후 많이 달라졌다고 하더라.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아랫사람에게 경제개발 전략을 새로 짜라고 재촉하는가 하면, 정보통신(IT) 분야에 집중적으로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최근 그가 남쪽 대학의 공대 교수를 불러 IT분야 강의를 맡기고, 평양과학기술대학 건립사업을 지원하는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지난번 러시아 방문길에서도 자본주의 체제를 온몸으로 배웠다고 하더라. 특히 철강·석유 등을 틀어쥐고 있는 큰 덩치의 공기업이 어떻게 해체되면서 민간인의 손에 넘어가는지 등에 대해 관심을 표시했다.

다른 이유도 있을 것 같은데.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시 모든 일정을 함께한 콘스탄틴 폴리코프스키 극동연방지구 대통령 전권대리인의 측근을 만났더니 김 위원장이 한 말 가운데 아직도 기억하는 얘기가 있더라. “권력을 유지하고 행사하기 위해서는 당과 군부를 잡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게 돈이다. 돈은 무한하지만, 권력은 유한하다.”

김 위원장을 더욱 초조하게 만드는 것은 중국에 이어 러시아가 곧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마이크 무어 WTO 사무총장은 러시아가 내년 9월 이전에 가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렇게 되면 북한만 더욱 외톨이가 되는 꼴이다. 김 위원장은 폐쇄경제를 고집해서는 국제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깨닫고 있다. 그의 ‘통 큰 정치’가 경제분야에서도 진가를 발휘할지 주목해야 한다. 특히 김 위원장은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대학교수가 돈을 받고 침을 놓는다든지, 군부 장성들이 큰 기업체를 성공적으로 경영하는 것을 목격하고 크게 놀랐다고 하더라. 러시아에 가서는 공식 환율과 암시장 환율 사이의 큰 격차를 어떻게 줄일 수 있는지, 이를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활용할 방법이 있는지 등을 많이 질문했다. 또 러시아에서는 시장경제로의 체제 전환기에 굶어죽는 사람들이 없었는지 등에 관심을 많이 보였다고 하더라.

러시아에 탈북자 정착촌을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김 위원장은 과연 어떤 비전을 갖고 있다고 보는가.

그는 빠르면 2005년 이전에 북한을 주식회사 체제로 바꿀 것이다. 모든 국영회사를 민영화하겠다는 구상이다. 우선 해외동포의 자본부터 시작해 외국인 투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내부적인 준비를 갖추고 있다. 속된 말로 그는 주식회사 북한의 대표이사로 변신하는 셈이다. 중국식 기업경영을 적극 도입해, 북한의 당 관료나 군부들을 경영 일선에 내세워 돈을 벌게 할 것이다. 그래서 우선 북한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을 지금의 150달러에서 300달러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목표를 세운 것으로 알고 있다.

김 위원장이 남쪽 기업에 거는 기대도 적지 않을 텐데.

현재 김 위원장이 눈독을 들이는 분야는 IT·반도체·조선·전기·철도·농업 따위다. 해주와 남포 등에 조선소를 유치해 세계 수준으로 키우고 싶어한다. 그는 특히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경영 스타일을 배우고 싶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에 대해서도 남다른 호감을 갖고 있다. 다소 엉뚱한 얘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김 회장은 앞으로 김정일 위원장의 경제 자문 구실을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김 회장은 남쪽에서는 실패하고 부패한 기업인으로 낙인찍혔지만, 북한에서는 아직도 쓸모 있는 기업인으로 인식된다.

러시아 극동지역에 탈북자들의 정착촌을 만드는 데도 공을 들이는 것으로 안다.

북한 쪽 비공식 통계에 따르면 탈북자들은 80년 이후 지난 20년 동안 중국에 18만명, 옛소련에 2만3천명, 몽골에 5천명 등 모두 20만8천명이 살고 있다. 이 중 일부는 이미 사망했고, 일부는 북한으로 다시 돌아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쨌든 이들을 위한 정착촌 건립이 시급한 과제다. 그래서 남한과 러시아 극동 정부와 협의해 1차로 2만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북한-러시아 극동지역 정착촌’을 세울 계획이다. 이들을 단순히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줘서 나중에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고자 한다. 정착시설을 다섯곳에 분산해 산업단지를 조성할 구상이다. 가령 수산-캄차카, 농업-연해주, 가스·광업-사하자치공화국, 임업-하바로프스크, 철도·공작기계-하바로프스크 식으로 나눌 계획이다. 현지 러시아 지방정부와는 이미 상당한 합의가 이뤄졌고, 남한 정부에는 곧 종합 마스터플랜을 건의할 작정이다. 정착촌 건립에 필요한 자금은 한국 정부에 갚아야 할 옛소련 부채를 활용하는 방안을 여러모로 고민하고 있다. 러시아 극동정부 쪽은 정착촌 건립이 극동지역 개발을 촉진하고 부족한 노동력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측면에서 선호하고 있고, 남북한 당국도 싫어할 까닭이 없다고 본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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