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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꺼지지 않는 ‘답방설’ 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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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6-1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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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위원장은 김 대통령 임기 내에 답방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 내린 듯

사진/ 2000년 6월14일 2차 남북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답방은 김대중 대통령 임기 내에 가능할까. (청와대사진기자단)
김 위원장의 올해 안 답방이 과연 이뤄질까. 역사적인 6·15 남북정상회담 2돌을 넘기고, 현 정부의 임기도 끝물에 이르렀으나 이상하리만치 ‘답방설’ 불씨는 꺼지지 않는다. 남북한 양쪽 당국이 물밑에서 뭘 구체적으로 준비하는 움직임이 포착돼서가 아니다. 답방설은 주로 김 위원장이나 그 측근들을 접촉했던 다양한 국내외 인사들의 입을 통해서 꾸준히 나오고 있다. 백남순 북한 외무상도 지난 5월 러시아 방문 중에 불쑥 “김 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서울 방문을 원하고 있다”고 밝혀 눈길을 끈 바 있다.

신변안전 보장해줄 수 있는 정권은…

답방 전망에 대한 남쪽 정부 관계자들의 견해는 다소 엇갈린다. “김 위원장이 오긴 올 거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여건이긴 하지만 정치·경제 모든 측면에서 지금 김대중 정권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남쪽에 와야 남는 장사를 할 수 있으리라는 점을 북쪽은 잘 알고 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2차 정상회담은 또 몇년, 아니 몇십년 뒤에나 성사될지 모른다.” “글쎄. 이제 그(김 위원장)의 답방은 물건너간 것으로 봐야 하는 것 아니냐.”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파격적인’ 김 위원장의 평소 처신을 근거로 그가 답방할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 쪽에 서 있는 관계자들도 적지 않았다.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은 물건너간 것 아니냐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개인 견해로 말하면 그는 반드시 서울에 내려올 것으로 본다. 그는 지금 기회만 엿보고 있다. 그는 남북한 주민 양쪽에 약속은 꼭 지키는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남기고 싶어한다. 더구나 그는 최근까지도 스스로 답방 약속을 재확인하고 있다. 그는 답방을 피할 명분보다는 어떻게든 성사시킬 명분을 찾고 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문제는 시기와 여건이다. 그의 성격으로 판단해보건대 전격적으로 서울 방문시기를 발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이전에는 아무도 모른다. 김 위원장 그 자신만이 알 뿐이다.” 사견임을 전제로 한 통일부 관계자의 분석이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당분간 극적인 장면 연출을 즐길 것이고, 실리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다들 체념하고 있을 때 그의 서울 방문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그 시기는 언제쯤일까. “답방은 빅, 빅 카드다. 이는 남북한 당국의 공통된 인식이다. 이왕 쓸 카드라면 제대로 쓰겠다는 것이다. 어느 한쪽이 손해본다고 생각하면 그의 답방은 성사되기 어렵다. 문제는 이해득실이라는 것이 고정적이지 않고 카멜레온처럼 시기와 주변 여건 등에 따라 매우 유동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답방시기가 오락가락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적기는 반드시 오리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현 정권의 임기가 다하기 전에….”

눈여겨볼 대목은 김 위원장이 김대중 정권 임기 내에 답방기회를 놓치면 다음 ‘거사’는 기약할 수 없다고 다들 강조하고 있고, 실제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우선 다음 정권을 누가 잡든 김대중 대통령만큼 김 위원장의 답방을 목놓아 기다리는 인물이 나오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꼽는다. 양김(김대중-김정일)은 단 한 차례 얼굴을 맞댄 사이지만 눈만 쳐다봐도 상대방이 무엇을 생각하고 원하는지 훤히 알 만큼 서로의 속내를 꿰뚫어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곧 김 위원장의 답방시 신변안전과 성과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서로 속내를 잘 아는 만큼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기가 쉽다는 얘기다. 김 위원장과 그 측근들이 가장 염려하는 남쪽에서의 신변안전 보장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전직 대통령 가운데 한 인사가 공공연하게 ‘김 위원장이 서울에 내려오면 불행한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고 발언한 대목과 관련해 크게 분노를 터뜨린 적이 있다. 북한 당국은 이 발언을 김 위원장에 대한 신변안전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이를 계기로 북한 당국은 김 위원장의 신변안전 보장과 관련해 김 대통령만큼 믿을 만한 대통령이 나오기 어려울 것이라는 내부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대미 관계와 답방, 어떻게 연계하나

김 위원장 측근들은 또 답방을 통해 무엇을 얻어갈 수 있을지에 촉각을 곤두세워왔다. “김 위원장의 서울 방문 자체로 그는 남북한 주민들로부터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합법성과 정통성을 지닌 한반도 다른 반쪽의 명실상부한 지도자임을 인정받게 된다. 남쪽 정부가 이미 베를린 선언에서 밝혔지만 그는 답방으로 전력·도로·철도 등 각종 사회간접자본을 지원받을 수 있게 된다. 그가 서울에 와 남쪽 국민이나 내외신을 향해 대놓고 ‘좀 도와달라’고 하면 남쪽의 야당이나 보수층에서도 제동을 걸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다른 정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 관계자는 “이런 것들도 다음 정권보다는 현 정권과 타결을 보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을 북쪽 지도부가 하고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국의 강경일변도 대북정책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김 위원장이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서울땅을 밟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다. 북쪽이 대미관계와 서울 답방을 어떻게 연계해 실리를 취할 요량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의 답방 최우선 목적이 자신들의 생존이 걸린 부시 행정부의 강경 대북정책을 흔들어놓는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 대목과 관련해서도 전문가들은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추구해온 현 남한 정부와 정책 조율을 맞추는 게 북한 당국으로서도 최선일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는다. 남쪽 정부는 지난해 초 김 대통령 주재로 열린 첫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김 위원장의 답방 때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 확립을 위한 남북 정상 간 합의를 도출키로 했다고 밝혔다. 이는 일종의 ‘평화선언’ 구상으로 미국의 한반도 해결에의 주도적 위상을 흔들고, 개입 여지를 크게 줄일 수 있는 비장의 카드였다. 이게 미리 알려져 미국의 거친 반발을 산 적이 있지만 순조롭게 이뤄졌을 경우 남북관계가 지금처럼 미국에 질질 끌려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남북한 당국은 여전히 평화선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처럼 정부와 민간 여러 소식통들의 견해를 모아보면 김 위원장으로서는 김대중 정부 임기 중의 답방이 실보다 득이 많다는 잠정적인 결론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실제로 그의 답방이 성사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도 많다. 설령 김 위원장이 불쑥 답방하겠다고 구체적인 시기를 알려온다 해도 남쪽 정부가 선뜻 수용할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그가 오겠다는데 두 손을 들고 환영할 일이지,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북한에서 적절한 답방 여건을 내세우듯 남쪽 당국 처지에서도 국민 여론과 야당 태도 등 눈치를 살펴야 할 것들이 수두룩하다. 북한 못지않게 남쪽에서도 적절한 사전 환경조성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당장 대통령 선거 등 복잡한 정치일정 등을 앞두고 답방이 이뤄질 경우 신북풍이라는 오해를 불러와 역풍을 맞기 십상이다. 사실 이것저것 고려하고 피하다 보면 현 정권 임기 안에 답방 일자를 잡는 것은 무척 어려워 보인다. 정부 외교안보팀의 한 핵심 관계자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답방 타이밍(시기)이 답방의 성공 여부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룰 의제나 조건 같은 것들은 어쩌면 부차적인 문제다. 그만큼 타이밍이 중요하다. 그래서 운도 어느 정도 따라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타이밍이 합의되지 않으면 결국 답방도 무산될 수밖에 없다. 우리도 정치적 이해득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탓이다.”

차기 정부에서도 합의사항 지켜질까

북쪽의 고민은 과연 김 위원장이 서울에 가서 합의한 것들이 남쪽의 차기 정부에서도 제대로 지켜질지에 있다. 답방하기에는 김대중 정부 임기 중이 적기이기는 하나, 임기 중에 합의사항들을 실천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고, 차기 정권은 누가 잡을지 오리무중이기 때문에 답방 결정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견해도 내부에서 힘을 얻고 있다는 후문이다. 일각에서는 남북한이 클린턴 행정부 말기 북-미 정상회담 성사 직전 무산된 전철을 밟는 것 아니냐는 비관적인 전망도 내놓는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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