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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남한은 과속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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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09-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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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전식 대남정책 활용해 평화 분위기 조성… 당당한 접근으로 수세적 대응 벗어나야

(사진/6·15 남북공동선언)
지난 6월 남북 정상회담을 전후해 나타난 통일담론 중 주목되는 것은 북한의 변화의도 및 범위와 남북관계 속도조절론이다. 대북 불신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새롭게 논의할 필요는 없겠지만 속도조절론은 다소 의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동안 북한의 폐쇄정책 및 대미 일변도 외교를 비판, 북한이 하루속히 개방정책을 채택할 것과 남한과의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해왔기 때문이다.

우리로서는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금강산지역을 개방하고 내륙지방인 개성지역까지 개방한 북한의 정책을 환영하고, 남북 정상회담을 비롯해 이산가족 상봉, 경의선 복원 등 전향적인 대남정책을 적극 수용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이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물론 55년 동안의 적대관계가 몇번의 회담이나 선언으로 완전히 해소될 수 없음은 불문가지이다.

북한이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남한을 포함해 어떤 자본주의 국가들의 도움을 받더라도 경제적 활로를 모색하겠다는 실용주의적 사고 때문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물론 남북관계 개선과 경제회생의 궁극적 목적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치적 권위를 극대화시키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문제 해결을 고리로 연방제를 관철시켜 김정일 위원장을 ‘고려연방공화국 대통령’으로 만들어 보려는 속셈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북한을 두려워 말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북한의 의도가 성공하는 것은 전적으로 남한의 대응태도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북한의 의도가 어디에 있든 우리가 거기에 빠지지 않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강조되어야 할 것은 북한의 숨겨진 의도를 두려워하는 소극적인 대처가 아니라 대남정책을 활용하는 적극적인 대처가 북한체제보다 남한체제가 더 우수하다고 자랑해온 사람들의 태도일 것이다. 즉, 북한의 ‘속도전식’ 대남정책을 적극 활용하여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시켜 한반도에 평화가 깃들게 만드는 것이 21세기 통일시대를 맞이하는 지혜일 것이고 통일전략일 것이다.

그러나 남한은 아직도 수세적이다. 물론 1950년 6·25전쟁 이후 북한의 호전성을 보아온 우리로서는 당연한 태도겠지만 우리는 지나치게 ‘북한 공포증’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진정으로 자신감을 가질 때도 되었다고 생각된다. 경쟁과 대결의 자세를 화합과 협력의 자세로 바꿀 때도 되었다고 생각된다.

사실 해방이후 남북관계는 경쟁과 대결의 연속이었다. 특히 6·25전쟁은 남북한간 체제경쟁을 심화시킨 주범이었다. 6·25전쟁의 후유증은 세계적인 냉전이 종식된 현재까지 남한을 괴롭히고 있다. 남한은 북한에 대한 불신에 사로잡혀 상대가 어떤 결정을 하면 그 저의가 무엇인가부터 의심해 본다. 이러한 관행은 남북 정상회담 이후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북한 변화의 저의가 무엇인가? 전략의 변화인가 전술의 변화인가? 등등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북한의 체제유지적 통일전략 주목

(사진/6·15남북공동선언 이후 대북관계 개선 독도에 대한 불협화음이 일고 있다. 반김정일 서명운동을 벌이는 김영삼 전 대통형의 선언문과 <한국논단>의 기사 제목들)
당연한 말이지만 북한에 대한 경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또한 너무 성급한 기대도 금물이다. 아직도 한반도에는 냉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법적으로는 휴전상태이므로 언제 다시 전쟁이 발발할지 모르고, 북한과 미국간에는 언제든지 긴장이 고조될 수 있는 사안들이 미사일 문제를 비롯해 여럿 있다. 따라서 현재 잘 진행되고 있는 남북관계도 언제 깨질지 모르는 취약성을 안고 있다.

이러한 취약성을 보완하는 방법은 남북한 모두의 피눈물나는 인내 외에는 대안이 없다. 남북한은 당장 관계를 단절하고 싶은 유혹을 물리쳐야 하고, 우발적인 무력충돌 방지를 위해 군사적 신뢰구축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며, 북한은 미사일 문제의 투명성을 통해 북-미관계를 개선해야 하고, 남한은 미국과의 긴밀한 공조를 통해 훼방을 놓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다음으로 북한의 대남전략 변화 여부 문제이다. 북한의 대남전략은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이 제시된 1980년부터 대남혁명을 통한 ‘체제확산’ 전략으로부터 ‘체제유지’ 전략으로 바뀐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인 1991년 제시된 ‘1민족 1국가 2제도 2정부론’ 및 ‘느슨한 연방제론’은 분명히 사회주의 체제만이라도 지켜야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연방제 통일전략’은 현재까지도 변함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 증거는 남북 정상회담 이후인 지난 8월15일 북한이 ‘6·15 남북공동선언 지지 정부 정당 단체 연합회의’를 통해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개의 제도, 두개의 정부에 기초한 연방제 통일국가를 건설할 것’을 결의한 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북한의 연방제 통일전략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연방제 통일전략은 매우 수세적이고 체제유지적이다. 그리고 연방제 통일전략은 남북한을 ‘사실상’의 별개국가로 상정하고 각 분야의 교류협력을 통해 실리를 획득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고려연방공화국창립방안’은 우리의 ‘민족공동체통일방안’ 중 남북연합단계와 유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당 강령과 당규약에 나타난 ‘대남적화’ 규정 부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김정일 위원장이 지난 8월12일 언론사 사장단과의 면담에서 당강령이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당규약에 대해서는 당대회틀 통한 개정의사를 분명히 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지속적인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김정일 위원장이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북한의 속도를 맞추지 못해

(사진/냉전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대학가에 정상회담을 환영하는 깃발과 대자보가 붙었다)
현재 북한의 변화 방향은 ‘경제강국’ 건설로 잡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북한은 어떤 외부지원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동족인 남한에 대해서는 더욱 큰 기대를 가지고 북한은 ‘통 크게’ 대남관계 개선 속도를 최대한 높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은 북한의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과속하고 있지 않으냐는 비판이 있지만 우리는 오히려 북한의 속도를 맞추지 못하고 있다. 과속에 대한 염려는 오히려 북한이 해야 할 형편이다. 지난 55년간의 분단기간을 감안하고 통일시한을 고려하면 현재의 속도는 오히려 느린 감이 있을 정도이다.

이제 공은 남한으로 넘어왔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넘어온 공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두고 갑론을박만 하고 있다. 모든 정책은 국민적 지지를 필요로 하지만 평화유지의 호기를 놓치지 않는 지도자들의 혜안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전현준/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hjchon@ku.kinu.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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