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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북한에 ‘KAIST’가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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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6-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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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과학 인재 길러낼 최초의 남북합작 국제대학 ‘평양과학기술대학’ 첫 삽

사진/ 평양과기대 설립 부지를 둘러보는 김진경(맨 왼쪽) 총장 등 설립추진위 관계자들. (동북아교육문화협력재단)
남북한이 6월12일 마침내 평양과학기술대학 착공을 위한 첫 삽을 뜬다.

북한 교육성으로부터 설립허가를 딴 지 1년3개월 만이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본딴 이 대학은 최초의 남북합작 국제대학으로 불린다. 하지만 착공식은 예상과 달리 평양과기대가 들어설 평양시 근교 낙랑구역에서 조촐하게 치러질 예정이다. 북쪽 입장을 배려해서다. 남쪽에서는 파트너인 동북아교육문화협력재단(이사장 곽선희) 소속 관계자 10여명만 참석한다. 북쪽에서는 주로 교육성 관계자들이 나와 남쪽 손님들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다른 요란한 남북 공동행사와 달리 방송이나 신문사 기자들이 따라붙지도 않는다. 겉치레보다는 내실을 다지겠다는 남북한의 각오가 크게 작용했다.

북한 당국, 33만평 땅 선뜻 내놔


사진/ 평양과기대는 남한의 어느 대학 못지않은 첨단교육시설을 갖출 예정이다. 사진은 조감도.
조용한 출발과 달리 남북한 당국이나 민간 관계자들이 이 대학에 거는 기대는 매우 크다. 지식정보산업 육성에 남다른 공을 들이는 북한 당국은 33만평의 노른자위 땅을 선뜻 내놨다. 평양시내에서 개성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대학 건립 부지는 군사적으로 상당한 요충지이나, 첨단산업 육성이라는 전략적 우선순위를 감안해 북한 군부에서도 흔쾌히 양보한 땅이라는 게 재단 관계자의 귀띔이다. 또 과학기술대 건립은 국책사업으로 지정돼 노무인력을 포함한 공사에 필요한 각종 건설장비를 우선적으로 지원받는다.

평양과기대의 면면을 뜯어보면 북한 당국이 군침을 삼킬 만하다. 이 대학을 잘만 활용하면 북한 당국이 당장 필요로 하는 정보통신(IT), 생명과학기술(BT), 국제무역 분야 등에서 전문기술을 갖춘 인재들을 비교적 단기간에 대량으로 길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올 들어 부쩍 21세기=정보산업시대, 첨단과학기술=컴퓨터산업이라고 등식화하면서 IT산업의 육성이 경제회복을 위한 획기적인 도약의 발판이라고 강조해왔다. 김영윤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한 보고서에서 “전략적으로 선택한 첨단산업 즉 IT, 바이오 등에 국내외 자본과 기술을 집중 투자해 이를 수출산업으로 키움으로써 경제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자는 것이 북한 경제개발 전략의 뼈대”라며 “이는 경제 재건을 위해 경공업을 우선적으로 육성하는 전통적인 산업발전 단계를 밟지 않고 곧바로 첨단산업으로 직행한다는 구상”이라고 설명했다.

또 전문가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북한 최고의 IT 전문가라고 평가한다. 그가 거의 날마다 인터넷을 즐긴다는 얘기는 구문이 된 지 오래다. 초고속 통신망 구축을 비롯해 게임 소프트웨어나 각종 콘텐츠 개발 등 IT분야에서 남북 경협사업이 유난히 성과를 보이는 것도 김 위원장의 정보강국 건설 의지에 힘입은 바 크다. 그는 지난해 5월과 올 1월 중국 상하이 등에 자리잡은 IT 산업단지의 발전상을 직접 둘러본 뒤 지식정보 산업화에 더욱 박차를 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평양과기대는 이런 우호적인 분위기를 등에 업고 첫 닻을 올리게 된 셈이다.

의심의 눈초리에 맘고생

사진/ 서울벤처밸리를 본뜬 '지식산업단지' 등 산학협동체가 들어설 평양과기대 가상도와 설립허가서.
북쪽 교육성과 남쪽 동북아교육문화협력재단은 2003년 9월 대학원 개교를 목표로 정보통신공학부(컴퓨터·인터넷·멀티미디어·정보통신·기계자동화) 900명, 농생명공학부(생명·유전·식품·에너지·환경·고분자공학 등) 400명, 상경학부(국제무역·경영정보·경영경제·회계학·실용영어) 300명의 학생들을 우선 뽑기로 뜻을 모았다. 인천국제공항을 설계해 유명해진 정림건축이 맡은 대학 건물은 대학 본부격인 종합정보센터를 비롯해 강의동, 기숙사, 교수 숙소, 식당, 강당, 체육관 등으로 짜여 있다. 초대 총장으로는 김진경 옌볜과학기술대 총장이 이미 내정된 상태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 옌볜에서 성공적으로 과학기술대학을 꾸려온 경험이 있는 김 총장은 한국을 비롯해 해외동포 가운데 우수한 교수와 연구원을 초청할 수 있는 인사권을 쥐게 된다. 한국에서는 KAIST가 학사운영에 대한 폭넒은 자문역을 맡고, 국내 다양한 대학의 최고 연구진이 교수로 참여할 예정이다. KAIST는 중장기적으로 공동학위제 운영까지 염두에 둔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도 김일성종합대학이나 과학기술교육의 본산인 김책공대의 교수진들이 참여한다. 공대는 대학원 중심, 상대는 학부와 대학원이 함께 운영되며, 장기적으로 남북한 교수 240명과 학생 2천명 규모의 종합대학으로 커나가게 된다. 사업이 예정대로 진행되면 학술교류도 본격적으로 이뤄져 남북 교류협력이 질적으로 한 단계 도약하는 발판이 마련되는 셈이다. 이 대학은 앞으로 50년간 북한 교육성과 공동으로 운영된다.

남쪽 재단 관계자들에 따르면 국내 벤처업계, 그 중에서도 KAIST 출신 벤처 기업인들이 평양과기대 건립에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 대학 한쪽에는 서울벤처밸리를 모델로 한 산학 협동체 형식의 ‘지식산업단지’, ‘창업보육센터’ 등이 들어설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각종 콘텐츠나 소프트웨어 분야 등에서 북쪽의 숙련 기술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신제품을 만들어낸다면 세계시장에서 충분히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벤처업계뿐 아니라 다른 대학에서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달려가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12월에는 한국외국어대와 한밭대 총장이 현지 터를 직접 둘러보고 남북 대학 간 교류협력 문제를 협의하고 돌아왔다. 따라서 대학 건립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협력이 본격화되면 평양과기대는 경쟁 우위요소만 흡수해 남쪽의 여느 대학 못지않은 경쟁력을 뽐낼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사실 북한 당국은 처음부터 과기대 설립에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부 관계자는 “북한 당국은 체제 유지에 끼칠 악영향 등을 감안해 지금도 여전히 남북한 사이의 교육협력 공동사업은 대단히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적게는 수백명에서 수천명의 남북한 교수와 학생들이 그것도 평양에서 함께 어울려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숙식을 함께 한다는 것은 상상치도 못한 일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이어 “솔직히 평양과기대의 앞날이 순탄치만은 않겠으나, 남북한 신뢰 회복에는 크게 기여할 것”이라며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실제로 대학 건립에 깊숙이 관여한 남쪽이나 해외동포 몇몇 관계자들은 말 못할 심적 고초를 겪은 것으로 알려진다. 북한 당국에서 대학 건립 의도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남북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분위기가 훈풍을 타면서 북한 당국의 태도가 크게 누그러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다가 김진경 옌볜과학기술대학 총장이나 곽선희 이사장 등의 꾸준한 설득과 헌신적인 대북 지원활동도 북한 당국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큰 보탬이 됐다는 게 재단 관계자의 전언이다.

‘벽돌 1장 쌓기 운동’ 모금 캠페인

자금조달 문제도 만만치 않은 과제로 보인다. 재단 쪽은 우선 정보통신대학원, 본관(기초공사), 식당, 교수·학생 기숙사 건설 등 1단계 공사를 마친 뒤 학교 문을 열 계획이다. 이를 포함해 학부가 문을 여는 2005년까지 약 400억원의 공사비가 들어갈 것으로 추산된다. 여기에다 중장기적으로 지식산업단지와 생명공학 실험실 등이 완공되는 2010년까지 또 적지 않은 자금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돼 어쩌면 평양과기대의 성패는 투자자금 조달 여부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재단 쪽은 ‘평양과학기술대학을 우리들의 손으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벽돌 1장 쌓기 운동’ 등 활발한 대중 모금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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