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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워싱턴의 의심은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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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6-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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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의 북한 체제 회의론 급부상…프리처드 방북해도 큰 성과 없을 것

사진/ 부시 정부 내에서 북한 체제가 스스로 무너지길 바라거나, ‘체제 교체’를 대북정책의 기조로 삼아야 한다는 소수 강경파의 주장이 꽤 먹혀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SYGMA)
미국 워싱턴에서 북한 체제 회의론이 급부상하고 있다.

지난 1995년부터 1999년까지 북한이 최악의 식량난에 시달리면서 ‘고난의 행군’을 벌이던 시기에 워싱턴 정가에 나돈 이른바 북한 붕괴론의 후속편이다. 북한과는 아무리 협상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목소리다. 김정일 체제가 버티고 있는 한 미국이 겨냥하는 대량살상무기 제거 목표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회의적인 시각이 부시 공화당의 외교안보팀을 지배하고 있다는 얘기다. 워싱턴 소식통들은 최근 북한의 열악한 식량 사정이 다시 알려지고, 탈북 현상이 속출하면서 그대로 놔누면 얼마 못 가 북한 체제가 스스로 붕괴할 것이라는 극단적인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고 전한다. 백악관이 북한이 대화재개 의사를 통보한 뒤 사흘 만인 4월30일 성명을 통해 “(특사 방북) 시기와 기타 구체적인 사항을 며칠 안에 결정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발표하고도 한달이 넘도록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는 것도 이런 내부시각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힘 얻는 ‘대화무용론’


부시 정부 내에서는 북한 체제가 스스로 무너지길 바라거나, 아니면 ‘체제 교체’를 대북정책의 기조로 삼아야 한다는 소수 강경파의 주장이 꽤 먹혀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사실 이런 기류는 새로운 게 아니다. 부시 행정부 취임 초기부터 꾸준히 이어져온 흐름이다. 부시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나는 북한의 지도자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는가 하면, 올 초에는 아예 대놓고 “(북한) 체제 변화가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도 “북한은 독재정권이고, 이미 파산당했다”고 잘라 말해 북한의 강한 반발을 산 적이 있다. 초기의 이런 걸러지지 않은 발언들이 북-미 대화에 제동을 걸었고 지금도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부시 대통령이나 파월 장관의 발언이 인신공격 성격이 짙을 뿐 아니라 북한을 설득하는 데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안팎의 비판을 받아들여 부시 행정부의 고위층들은 마지못해 더 이상의 거친 표현을 자제해왔다. 이런 와중에 다시 잭 프리처드 대북교섭담당 대사의 방북 여부를 둘러싸고 북한 체제 회의론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하고 있다.

<워싱턴타임스>는 5월24일치에서 부시 행정부 고위관계자의 말을 빌려 “미 국무부 대부분과 국가안보회의(NSC) 일부 관계자가 북-미 대화 재개를 위한 특사 파견을 지지하는 반면, 이를 북한에 대한 ‘양보’로 보는 국방부와 일부 국무부 및 NSC 관계자의 반대는 의외로 완강하다”고 보도한 바 있다. 미 국무부가 겉으로는 대북정책에 관한 한 내부 이견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으나, 북한 현 체제와의 ‘대화무용론’도 만만치 않게 힘을 얻고 있다는 주장이다.

최근 세미나 참석차 서울에 온 웬디 셔먼 전 대북정책 조정관, 로버트 갈루치 대북 핵협상 전담대사 등 클린턴 정부 시절 대북정책를 총괄했던 핵심 관계자들도 한국 정부의 고위 관계자나 정치인들을 따로 만나 부시 행정부 내 똬리를 틀고 있는 북한 체제 회의론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전한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웬디 셔먼은 5월 말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설립 30돌을 기념하는 세미나에서 “북한의 현 체제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사용하려는 열망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체제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면서 “아무도 북한 체제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변화는 하룻밤 사이에 일어날 수는 없고, 또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또 “북한 체제에 변화가 일어난다면 이는 한국 정부와 그 주변지역 국가에 엄청난 부담을 지울 수 있다”며 “변화가 다른 억압적인 체제로 교체되지 않고 평화롭게 이뤄진다 해도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고 덧붙였다.

“북한도 공격의 빌미 주지 말아야”

사진/ 클린턴 행정부의 고위 관료들이 북한 체제 붕괴론이나 회의론이 갖는 무모함이나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협상과 포용정책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이정용 기자)
로버트 갈루치도 “워싱턴에서는 북한 등 불량국가와는 협상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고조되고 있으며, 부시 행정부는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를 준수하는 것과는 다른 좀더 신중한 정책을 추구하기로 결정했다”면서 “더 이상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지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부시 행정부 내에서도 견해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해 북한 체제에 대한 회의론이 상당히 깊어가고 있음을 강하게 내비쳤다. 그는 또 “부시 행정부가 94년 핵 위기 때처럼 ‘협상’을 선택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면서 “불량국가와는 협상하지 않으려는 부시 행정부의 이데올로기가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미국 내 대표적인 대북협상 전문가인 전직 미 국무부 고위관료들의 잇단 우려 발언은 부시 공화당 정권뿐만 아니라 북한 지도부 모두에 대한 은근한 충고로 비쳤다. 부시 행정부를 향해서는 북한 체제를 강제로 무너뜨리거나, 스스로 없어질 것이라고 결코 바라서는 안 되며, 북한 지도부에 대해서는 대량살상무기 보유가 갖는 위험성을 경고한 셈이다.

부시 정부 내부의 회의적인 분위기 탓으로 곧 평양길에 오를 것으로 예상되는 잭 프리처드 대북협상 대사의 방북 성과에 큰 기대를 거는 이들은 거의 없다. 프리처드의 방북이 성사될 경우 이는 임동원 특사의 최대 방북성과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온 북-미간 공식대화의 복원을 뜻한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미국이나 북한 어느 쪽이든 기존 입장에서 한 발짝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돌파구를 찾기란 쉽지 않다는 전망들이다. 더구나 부시 정부는 실질적인 진전이 없는 대화를 위한 대화는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힌 터여서 프리처드 대사가 평양에서 북한의 강경 입장을 재확인할 경우 북-미 관계는 이전보다 더 악화될 수 있다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지난 5월 중순 남북관계 재도약의 디딤돌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남북경협추진위원회가 북한의 일방적인 불참선언으로 무산되면서 부시 정부 내 강경파의 입김이 다시 세지고 있는 듯하다”면서 “걱정되는 것은 프리처드의 방북 성과가 미미할 경우 북-미나 남북관계 복원이 더 멀어질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인도-파키스탄 분쟁, 중동사태 등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는 부시 행정부가 상대적으로 덜 급한 과제인 북-미나 남북관계를 배려해 북한 문제에 적극 개입하려고 하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북한은 지금이라도 미국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남북관계를 어느 수준까지 끌어올려 북한 체제에 대한 공격의 빌미를 미국에 줘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클린턴 행정부 관료들 강경책 비난

안팎에서 부시 행정부 일부 인사들의 대북 강경시각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특히 민주당계 의원들이나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 등 클린턴 행정부의 고위 관료들이 북한 체제 붕괴론이나 회의론이 갖는 무모함이나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들도 처음에는 지금의 부시 공화당 정부처럼 북한 체제에 대한 삐딱한 시각을 갖게 됐으나 8년 동안 북한 체제를 줄곧 지켜보고 이런저런 협상을 벌여본 결과, 협상과 포용정책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주장한다. 북한이 곧 붕괴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순전히 서구적인 가치관의 잣대로 본 편견일 뿐이며, 북한 체제의 독특한 생존력은 이미 지난 몇년간의 경험으로 입증된 바 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이 국제사회와 적극적인 교류·협력을 시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 나라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분적이나마 문호를 개방하는 등 적극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점도 높게 평가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목소리다.

더구나 북한 체제가 스스로 무너지거나, 아니면 강제로 무너뜨리는 정책이 한반도뿐 아니라 동북아시아 전체의 안정을 흔들어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는 데 이의를 다는 이는 거의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지금 부시 행정부가 안에서라도 북한 체제 붕괴론이니 회의론 따위를 논의하면서 시간을 허비할 것이 아니라, 인내심을 갖고 북한 체제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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