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곱씹으며 허탈감에 빠져 있는 호남 민심… 그래도 목포인들의 애정은 질기디 질겨
5월30일 낮 12시, 광주는 어슴푸레했다. 한낮인데도 사위가 어둑하고 흐릿했다. 작은 빗방울들이 오락가락한 탓일까. 와락 큰비가 쏟아질 태세였다. 지난 5월23일 이곳에서 첫 ‘안티 민주당’ 시위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솔직히 ‘그래도 광주가 민주당을 버릴 수 있겠어’ 하고 생각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 혼신을 쏟았고, 불평·불만을 터뜨리면서도 선거 때면 어김없이 민주당에 몰표를 던지던 곳 아닌가.
“완전히 양치기 소년이랑께”
광주에서 들은 첫마디는 이런 예측이 빗나갔음을 입증했다. “민주당이라면 솔직히 이제 콧방귀 뀌지라. 완전히 양치기 소년이랑께. 민주당이 아무리 늑대가 나온다고 외쳐도 우리는 이제 그런 거 안 믿지라.” 상무지구에 산다는 40대 중반의 택시기사 김귀현씨. 그는 6·13 지방선거에서 누가 당선될 것 같냐는 질문에 대뜸 이렇게 대꾸했다. 공항에서 시내 중심가로 들어오는 30여분 동안 그는 거침없이 민주당을 비판했다. “광주 어디 가서 들어봐도 대답은 다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자신했다. 광주가 정말 변하고 있는 것일까.
광주시 서구 내방동, 50대 후반의 작명가 김응태씨는 “옛날엔 민주당이면 작대기를 꽂아놔도 당선됐는디, 이제 상황 판단이 완전히 틀려져 부렀어. 선거로 심판할 것이네. 어떻든 민주당은 안 찍는당께”라고 말했다. 그는 “요즘 광주 사람들은 당이 아니라 사람 봐서 찍자고 난리”라고 달라진 민심을 전했다. 그토록 열렬했던 지지자들이 무엇 때문에 민주당에 등을 돌리는 것일까. 5월31일 오전 11시, 광주시 남구 사구동. ‘여론 전파사’인 택시기사들과 노인들이 모여들어 자연스레 시국토론이 벌어진다는 광주공원을 찾았다. 공원 한편에 앉아 얘기꽃을 피우는 노인들 틈에 끼어들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라, 세상에 이럴 수가 있냐 말이여. 위로는 대통령 아들이 해처먹고, 아래에선 광주시장 나오겄다는 놈들끼리 돈 받아 처먹고….” 광산구 송정리에서 왔다는 손아무개(65)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60대 초반의 박아무개씨가 맞장구쳤다. “아, 우리는 여적까정 한나라당이 없는 살림하는 민주당을 괴롭혀서 그런 줄만 알았제. 그런데 이제 본께 민주당이 아래위서 다 해처먹었더란 말여. 여그는 하루 한끼 사랑의 점심 안 주면 죽을 노인들 수태여.”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것이 옳소.” “거, 어떤 양반인디 그리 옳은 소리만 허요.” 그들의 결론은 “국회의원, 시장, 기자까지 높은 의자에 앉은 사람은 다 도적놈들”이라는 것이었다. 광주에 머문 2박3일 동안 곳곳에서 민주당과 김대중 대통령을 향한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막말들도 튀어나왔다. 광주 고속버스터미널 앞에서 만난 40대 공무원 조아무개씨는 “김대중씨가 한달에 가족회의 한번씩만 했어도 아들놈들이 그 모양 될 수 있었겄소. 안 그라요” 하고 되물었다. 광산구 월곡동에서 거주하는 운수업자 장아무개(53)씨는 “우리 손이 부끄러워서 원. 내 이제 투표 안 할라요” 하고 잘라 말했다. “부정부패 없고 국민 잘살게 해달라고 김대중 찍고, 민주당 후보 무조건 밀었는디, 거 뭐 하나라도 다르게 한 게 있느냐”는 게 변심의 이유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다를 것이라는 믿음이 아들 비리로 무너진 뒤 시민들은 허탈과 분노로 공황상태에 빠졌다. 그런데 최근 이 지역 단체장 공천과정에서 금품수수 의혹이 확인되자 시민들은 민주당 쪽에 분노를 폭발시키고 있다.” 전남대 오수성 교수(심리학과)는 “그동안 몇몇 시민단체 인사들 사이에 호남에서 민주당 일당독재를 깨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며 “이제 시민들까지 민주당 거부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진단했다. 최근 광주·전남 지역 74개 시민사회단체가 ‘부패정치인 양산 민주당 규탄과 시·도민 주권회복선언 대회’를 시작으로 잇따라 안티 민주당 시위를 조직하고, 광주·전남 자치연대에서 무소속 시민후보를 대거 출마시킨 것은 이런 변화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무소속에 대한 기대와 성원
광주시민들이 분노만 곱씹으며 허탈감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곳곳에서 자성의 목소리도 들린다. 시민 스스로 변화하자는 것이다. 상당수 광주시민들은 기자의 질문에 입을 닫았다. 죄인이 무슨 할말이 있느냐는 것이다. 다만 “이제 우리도 정말 정당과 고향이 아니라 인물 보고 찍을라요” 하고 다짐했다.
약재상 등 재래시장이 밀집한 서구 양동시장에서 시민들의 마음을 가늠할 수 있었다. 시장 초입의 방앗간 주인 김아무개(54)씨는 “지방선거를 냉정히 관찰하고 있제. 녹색 옷만 입혀 내놓으면 초등학생이라도 국회의원 시켰는데, 이제는 안 그럴 것이요. 천만에 말씀이요” 하고 말했다. 40대 중반의 운수업자 백아무개씨는 스스로의 투표행태를 공산당 같았다고 설명했다. “보소, 전라남북도에서 민주당 지지율이 93%, 97%였소. 김대중 선생 대통령 만들겄다고 공산당보다 더 높은 지지율로 투표한 것 아니요. 이제와 그 양반하고 민주당 욕하먼 뭐하요. 내 얼굴에 똥칠하는 것이제.” 그는 “이제 우리가 정말 달라져야제. 어떻게 할지 한번 지켜보소”라며 입술을 깨물었다. 민주당 후보가 아닌 참신한 인물을 선택해 구겨진 광주의 자존심을 회복하겠다는 자성이자 다짐이다.
그러나 광주시민들이 정말 민주당 품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모두들 “이번에는 인물 보고 찍겠다”고 말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민주당에 대한 애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광산구 월곡동에 사는 가정주부 김미라(31)씨는 “그래도 한나라당보다 민주당 쪽 인물이 낫지 않냐”며 “투표장에서는 대부분 민주당을 찍을 것”이라 예측했다.
그러나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은 최근 광주지역에서 이는 두 가지 큰 변화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봇물을 이룬 무소속 출마와 노무현 후보에 대한 기대와 성원이다. 광주·전남 지역 단체장과 광역의원 후보 224명 중 130명이 무소속 출마자다. 무려 58%에 이른다. 광주지역에서 대안언론을 표방해온 주간 <시민의 소리> 이상걸 기획이사는 “58% 무소속 출마는 전례없던 큰 변화”라며 “민주당 아성인 광주·전남 지역 정치 지망생들이 김대중 대통령의 실패 속에서 오히려 자유를 얻었다는 징표”라고 해석했다. 시민사회단체는 무소속이 선전해 민주당의 박수부대라는 오명을 벗어던질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광주사람들에게 노무현 후보는 좀더 복잡하게 다가온다. 민주당 단체장 후보들은 노풍이 민주당에 대한 민심 이반을 막아줄 것으로 기대하며 노 후보의 지원유세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시민사회단체와 주민 여론은 거꾸로 흐른다. 광주·전남 자치연대 임병옥 사무처장은 “3월16일 광주경선은 민주당 후보 노무현이 아닌 변화와 자기반성 없는 민주당을 개혁하고 또다시 지역고립의 위기에 몰린 호남을 구해줄 상징에 대한 선택”이라며 “광주는 노 후보가 민주당 후보들 손을 들어주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광주지역 시민사회단체가 5월30일 노무현 후보 광주 방문 반대성명을 발표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노무현, 차라리 광주에 오지 말라.”
선택은 노 후보 몫이다. 그러나 광주시민들은 노 후보의 발걸음을 주시하고 있다. 조선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정현운(25)씨는 “경선 이후 노 후보의 행동을 보고 기성 정치인과 다른 게 없다는 실망감이 퍼지고 있다. 그가 광주에서 박광태씨 등 민주당 후보 손을 들어준다면 그에 대한 지역 여론도 등을 돌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광주지역 ‘노사모’를 주도해온 50대 중반 김아무개씨도 “민주당 대선후보가 같은 당 단체장 후보 손을 안 들어줄 수는 없을 테고, 차라리 광주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실망하고, 민주당의 울타리를 벗어나려는 광주는 이제 노무현 후보에게 그나마 남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광주에서 승용차로 1시간30분을 달려 도착한 목포시. 그곳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목포시민들은 아직 민주당과 김 대통령에 대한 애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목포시 유달동 목포항여객터미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여성들에게 다가갔다. 요즘 민심이 어떻냐고 운을 떼자 40대 중반의 여성이 공격적으로 되물었다. “잘못하긴 잘못했제. 근디, 그래서 뭐가 어쨌다고라.” 다른 사람들도 거들고 나섰다. “그래, 여그 김대중씨 고향 맞지라. 근디 민주당에서 뭐 해준 줄 아시요? 모다 그 월드컵한다고 난린디, 목포는 월드컵할 운동장도 없어라. 아쇼? 그란디 왜 자꾸 뭐라고 그 난리요, 난리가.” 요즘 광주시민들까지 목포 인근 무안군으로 전남도청을 이전한 것을 놓고 김 대통령 고향 편들기라고 비판해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한 터에 낯선 이방인의 질문이 반가울 리 없었다.
김 대통령 생가가 있는 하의도로 연결되는 배가 출발하는 제2여객터미널 근처에서 만난 5명의 80대 할아버지들은 한결같이 ‘김대중 죽이기 음모론’을 제기했다. “그래도 역대 대통령 중 이분보다 일 많이 헌 사람 어디 있어. 틀로 보나 인물로 보나 김대중이제. 아들문제 그런 것 모다 한나라당이 차기정권 연장 못하게 떠드는 것 아녀.” “아 누구 나가면 별게 있나. 우린 대통령과 아들이 연관 안 됐다고 봐. 자식 킨 사람들은 다 알어. 이회창씨도 돼보면 알 것이여.”
목포시민 70% “홍일 의원직 사임 반대”
목포시민들 대다수는 이런 식이었다. 서해안고속도로에서 목포로 들어서는 길목에 위치한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만난 택시기사 조아무개(42)씨는 대놓고 말했다. “김홍일씨가 의원직 관두는 것 시민들 70%가 반대하요. 목포신문에서 여론조사 혔는디, 그게 맞지라. 아들 잘못 갖고 언론들이 너무 심하게 공격하는 것이랑께.” 목포시 곳곳을 돌며 20여명의 시민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비슷했다. 단 3명만이 민주당에 직접적인 분노를 표출했다. “내 젊었을 적부터 선거판으로 눈이 틔었고, 오늘도 도의원 출마자 도우러 갔다 왔다”는 백아무개(60)씨는 “인자, 목포도 옛날 목포가 아녀”라고 말했다. 터미널 대합실에서 만난 백씨는 “대중씨가 너무 무능혔고, 민주당도 잘 보필을 못항께, 선거운동 다녀보면 무소속이 더 똑똑하다고들 말한당께”라고 민심흐름을 전했다.
바닷가 포구를 따라 건어물 가게와 생선 좌판이 늘어선 목포시 동명동 공판장. 선관위 선무차량이 “본인이 선택한 후보를 찍읍시다”라고 외치고 다니지만 사람들은 그저 무관심하다. “고기나 한 마리 팔어먹고 사는 인생이 정치 얘기하면 뭘 하것소”라는 말만 되돌아왔다. 3평 남짓한 건어물상을 운영하는 70대 할아버지가 목포의 한을 대변했다. “우린 이제 늙었어라. 옛날에야 후손들 천대 안 받고 잘살아보라고 김대중, 민주당 지지했는데…. 이제 정말 마음 떠나부렸소. 이제는 정말 투표 안 할라요. 진짜 안 해라.” 아직 김 대통령과 민주당에 대한 애정의 끝자락을 질기게 부여잡은 채, 실망스런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람들. 그들은 애써 무관심한 척 속내를 숨기고 있었다.
광주·목포=글 신승근 기자skshin@hani.co.kr
사진 이용호 기자yhlee@hani.co.kr

사진/ “선거로 심판할 것이네. 어떻든 민주당은 안 찍는당께.” 광주 광주공원(왼쪽)과 양동시장에서 많은 시민들의 입에선 민주당과 김대중 대통령을 향한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져나왔다.
광주시 서구 내방동, 50대 후반의 작명가 김응태씨는 “옛날엔 민주당이면 작대기를 꽂아놔도 당선됐는디, 이제 상황 판단이 완전히 틀려져 부렀어. 선거로 심판할 것이네. 어떻든 민주당은 안 찍는당께”라고 말했다. 그는 “요즘 광주 사람들은 당이 아니라 사람 봐서 찍자고 난리”라고 달라진 민심을 전했다. 그토록 열렬했던 지지자들이 무엇 때문에 민주당에 등을 돌리는 것일까. 5월31일 오전 11시, 광주시 남구 사구동. ‘여론 전파사’인 택시기사들과 노인들이 모여들어 자연스레 시국토론이 벌어진다는 광주공원을 찾았다. 공원 한편에 앉아 얘기꽃을 피우는 노인들 틈에 끼어들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라, 세상에 이럴 수가 있냐 말이여. 위로는 대통령 아들이 해처먹고, 아래에선 광주시장 나오겄다는 놈들끼리 돈 받아 처먹고….” 광산구 송정리에서 왔다는 손아무개(65)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60대 초반의 박아무개씨가 맞장구쳤다. “아, 우리는 여적까정 한나라당이 없는 살림하는 민주당을 괴롭혀서 그런 줄만 알았제. 그런데 이제 본께 민주당이 아래위서 다 해처먹었더란 말여. 여그는 하루 한끼 사랑의 점심 안 주면 죽을 노인들 수태여.”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것이 옳소.” “거, 어떤 양반인디 그리 옳은 소리만 허요.” 그들의 결론은 “국회의원, 시장, 기자까지 높은 의자에 앉은 사람은 다 도적놈들”이라는 것이었다. 광주에 머문 2박3일 동안 곳곳에서 민주당과 김대중 대통령을 향한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막말들도 튀어나왔다. 광주 고속버스터미널 앞에서 만난 40대 공무원 조아무개씨는 “김대중씨가 한달에 가족회의 한번씩만 했어도 아들놈들이 그 모양 될 수 있었겄소. 안 그라요” 하고 되물었다. 광산구 월곡동에서 거주하는 운수업자 장아무개(53)씨는 “우리 손이 부끄러워서 원. 내 이제 투표 안 할라요” 하고 잘라 말했다. “부정부패 없고 국민 잘살게 해달라고 김대중 찍고, 민주당 후보 무조건 밀었는디, 거 뭐 하나라도 다르게 한 게 있느냐”는 게 변심의 이유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다를 것이라는 믿음이 아들 비리로 무너진 뒤 시민들은 허탈과 분노로 공황상태에 빠졌다. 그런데 최근 이 지역 단체장 공천과정에서 금품수수 의혹이 확인되자 시민들은 민주당 쪽에 분노를 폭발시키고 있다.” 전남대 오수성 교수(심리학과)는 “그동안 몇몇 시민단체 인사들 사이에 호남에서 민주당 일당독재를 깨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며 “이제 시민들까지 민주당 거부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진단했다. 최근 광주·전남 지역 74개 시민사회단체가 ‘부패정치인 양산 민주당 규탄과 시·도민 주권회복선언 대회’를 시작으로 잇따라 안티 민주당 시위를 조직하고, 광주·전남 자치연대에서 무소속 시민후보를 대거 출마시킨 것은 이런 변화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무소속에 대한 기대와 성원

사진/ 지난 5월23일 광주YMCA 무진관에서 열린 민주당 규탄 집회. 광주·전남 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잇따라 안티 민주당 시위를 조직하고 있다.

사진/ 목포 시민들은 민주당에 대한 애정의 끝자락을 부여잡은 채, 실망스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목포 시외버스터미널 버스승차장.
사진 이용호 기자yhlee@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