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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너 나쁜 놈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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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6-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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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이 선수치고 한나라당이 맞불 놓고… '네거티브 전략' 판치는 6·13 지방선거의 현장

사진/ 신문광고를 통한 '엎치락뒤치락'. 어디까지 자질검증이고 어디까지가 비방인지 유권자들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네거티브 전략으로 승패를 건다.”

6·13 지방선거전이 네거티브캠페인(부정적 선거운동) 일색의 ’진흙탕 싸움’으로 치닫고 있다. 유세장에선 험구가 넘쳐난다. 사실인지 흑색선전인지 식별이 어려운 미확인 소문들도 난무한다. 인신공격은 다반사다. 정책대결은 눈을 씻고 봐야 겨우 발견할 수 있을까. 비방전은 중앙당이 진두지휘하는 양상이다. 당직자들은 막말들을 속사포처럼 쏴댄다. 한나라당 이규택 총무가 민주당을 ‘미친년당’으로 비하하자, 민주당 민영삼 부대변인은 한나라당을 ‘대권병동’이라고 쏘아붙였다. 민주당은 한나라당을 ‘병역기피당’으로 몰아붙였고, 한나라당은 ‘불법선거운동 사례집’을 발표해 맞불을 놨다. 월드컵으로 온 세계의 이목이 쏠린 터다. 유권자들은 혼란스럽다. 어디까지가 자질 검증이고 어디까지가 비방인지….

사전선거운동 적발건수도 98년의 9배


네거티브 전략은 상대의 부정적인 면을 공격하는 선거운동 방식이다. 네거티브 없는 선거가 없겠지만 이번 선거는 도가 좀 심하다는 게 선관위 관계자들의 얘기다.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자마자 네거티브 선거전이 온통 판을 휘젓고 있다. 사전 선거운동 적발건수는 모두 5325건. 지난 98년 지방선거 때 적발된 622건의 9배다.

네거티브는 수도권, 그 중에서도 서울과 인천시장 선거전에서 더욱 극심한 양상이다. 민주당의 박상은 인천시장 후보는 신문광고를 통해 한나라당 안상수 후보의 병역기피 의혹과 룸살롱 경영, 파친코 투자, 경력 허위기재 의혹을 제기했다. 안 후보 쪽은 박 후보가 인천시 정무부시장 재직 당시 직무상 얻은 정보를 이용해 부동산 투기를 한 의혹이 있다고 맞불을 놨다. 서울시장 선거전에선 김민석 민주당 후보가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의료보험료 축소납부 의혹을 물고 늘어지자 이 후보 쪽에선 김 후보의 5·18술판사건으로 맞받았다.

이번에 왜 유독 네거티브 전략이 극심한 것일까. 먼저 선거가 월드컵과 겹치면서 국민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후보들이 축구공으로부터 유권자들의 눈과 귀를 돌리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나온 게 자극적인 처방전이다. “할 수 없습니다. 들리는 건 온통 월드컵 얘기뿐이고, 신문엔 후보 이름 한 자 나오지 않으니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네거티브로 나가면 언론의 관심을 끌 수 있거든요.” 한 수도권 지역 후보의 선거전략 책임자의 고백이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상황도 또 하나의 요인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이번 지방선거를 대선의 전초전으로 인식하고 사활을 걸고 매달리고 있다. 선거에서 승리하면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여세를 대선까지 몰아갈 수 있다. 반대로 지면 인책론 등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를 수밖에 없다. 짐짓 점잔만 빼고 있을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좀더 근본적인 이유는 네거티브 전략이 다른 어떤 선거운동보다 잘 먹히기 때문이다. 지난 95년 서울시장 선거 당시 박찬종 후보는 참신한 이미지로 각광받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 부산의 한 일간지에 유신을 찬양하는 기고를 한 적이 있다는 네거티브의 대상이 된 이후 1개월 사이에 지지도가 10.5% 곤두박질쳤다. 97년 대선 때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두 아들의 병역기피 의혹이 제기된 지 사흘 만에 16.9%가 빠졌다. 여론조사 전문가인 김학량씨는 “유권자는 장점보다는 약점과 험담, 비방을 잘 기억한다”며 “유권자들은 네커티브 선거운동에 대해 순간적으론 혐오하지만 계속 들으면 그것을 사실로 인정하고 비난받은 후보를 지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네거티브 메시지의 고속도로, 인터넷

사진/ 온갖 험담과 비방과 흑색선전. 이번 선거보다 더 심한 적은 없다는 게 중평이다. (이정용 기자)
인터넷의 위력은 네거티브 전략의 부가가치를 더욱 높인다. 인터넷을 이용하면 상대후보에 대한 대용량의 부정적인 메시지를 놀라운 속도로 전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아는 민주당과 한나라당 모두 인터넷을 활용한 공격과 방어에 공을 들이고 있다. 일부 후보의 선거대책본부에선 언론사 게시판 등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 상대방을 공격하는 내용의 글을 올리는 인력을 따로 편성해 운용하고 있다. 인터넷 홍보반이다. 이들은 상대방 사이트의 토론방에 침투해 일방적으로 험구를 늘어놓기도 한다. 인터넷이 네거티브 메시지를 퍼나르는 고속도로 구실을 하는 셈이다.

네거티브 선거운동이라고 해서 무조건 배척만 할 것은 아니다. “네거티브 전략도 정상적인 선거운동의 한 방식이다. 후보들 사이의 차별성을 드러내서 유권자의 선택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단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문제는 근거가 없는 중상모략이나 사실을 날조한 비방·흑색선전·침소봉대 등이다. 이런 것이 아니고 정당한 비판과 사실에 근거한 공격이라면 국민의 알권리 충족을 위한 후보검증 차원에서 인정할 수 있다.” 선거캠페인을 전공한 김창남 교수(경희대 언론정보대학원)의 얘기다. 선거에서 병역문제나 납세문제 등 공적인 영역의 문제를 사실에 근거해 지적하는 것까지 나무랄 수 없다는 것이다. 선관위에서 전과경력 등을 공개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미국에서는 네거티브가 선거의 승패를 좌우하기도 한다.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텔레비전 토론회와 신문광고 등을 통한 네거티브 전략에 사활을 건다. 현대의 선거전이 미디어에 의존하는 이미지전 양상을 띠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 미국 공화당 경선 당시 부시 후보는 여론조사를 가장한 전화부대를 통해 경쟁자 존 매케인 후보에게 무차별적인 네거티브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매케인은 “지상에서 가장 높은 품격을 지닌 사무실(백악관)에 들어가기 위해, 가장 저급한 길로 들어가진 않을 것”이라고 네거티브 캠페인을 하지 않는다고 공언했다. 그러한 그도 견딜 수 없었는지 나중엔 부시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KKK’와 연결짓는 네거티브 캠페인에 주력했다. 지난 8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마이클 듀카키스는 공화당 부시 후보진영의 네거티브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무너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투표율 저조 부추길 수도

선관위는 네거티브 선거전략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안상수 한나라당 후보의 병역기피 의혹을 제기한 박상은 후보의 신문광고에 대해 선관위는 인증서를 교부해 승인해줬다. 한나라당 쪽은 선관위에 섭섭함을 표시했다. 선관위 쪽의 해명은 이렇다. “선관위는 5차례로 제한된 신문광고의 횟수와 형태 등을 통제할 뿐이지 내용까지 문제삼지는 못한다. 국민의 알권리 충족을 위해 법이 최소한으로 보장한 신문광고의 내용에 대해선 선관위가 어떤 제재도 가할 수가 없다. 광고내용이 사실적시에 의한 비방이나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에 해당되는지는 오로지 사법적 판단의 대상일 뿐이다.” 선거법(제250조, 251조)상 광고내용이 비방과 명예훼손으로 판정받으면 당선되더라도 당선이 취소되는 중형을 받을 수 있다. 한나라당 유성근 전 의원이 최근 의원직을 상실한 것도 이 조항 때문이다. 신문광고의 내용에 대해 선관위가 검열하지 않는 대신 비방이나 명예훼손이라는 법적 판단이 내려지면 엄격한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사실에 근거한 비방도 원칙적으론 처벌 대상이다. 하지만 예외가 있다. 사실에 근거한 비방이 공공 이익에 관한 때는 처벌하지 않도록 단서조항을 둔 것이다. 민주당 박상은 인천시장 후보의 신문광고를 둘러싼 논란도 결국 그 내용이 사실인지, 사실이더라도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인지에 대한 법원의 판단에 달린 셈이다.

네거티브 선거전은 민주당이 선수를 치고 한나라당이 맞불을 놓는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다. 민주당은 대통령 아들들의 부패사건 이후 수도권의 상황이 녹록하지 않게 전개되자 네거티브 전략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네거티브 선거전략이 지나치면 투표율이 낮아지는 경향이 있다. 유권자들이 정치에 염증을 느끼면서 이쪽도 저쪽도 다 싫으니 투표를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우호세력이지만 투표율이 낮은 20대와 30대의 투표 참여를 높이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네거티브 선거전략을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투표율을 높여야 하는 상황. 민주당이 처한 딜레마다. 열쇠는 민주당이 제기한 일련의 의혹에 대해 유권자들이 사실에 근거한 후보검증 차원의 문제제기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근거 없는 흑색선전으로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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