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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통일방안은 확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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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5-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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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규 전 통일부 장관에게 들어보는 남북 현안…“탈북자 문제 조용히 처리해야”

사진/ (김종수 기자)
“남도 북도 남북공동선언 제2항을 아전인수격으로 그릇되게 해석하고 있다. 이는 상호 불신감을 더욱 부추기고 남북관계 발전을 더욱 지연시킬 뿐이다.”

남북정상회담 당시 추진위원장을 맡은 박재규 전 통일부 장관은 6·15 남북공동선언 제2항과 관련해 논란을 빚는 가운데, 남북한 양쪽 모두에 자제를 촉구했다. 그는 지난 남북정상회담에서 통일방안과 관련해 남북한 각자가 주장하듯 연방제나 연합제 어느 한쪽으로 합의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지금도 북한은 물론 주변 네 나라의 전·현직 고위관료와 학자 등 전문가들과 꾸준히 관계를 다지면서 한반도 문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그를 5월23일 만나 최근 현안들에 대한 견해를 들어보았다.

워싱턴은 막말 하지 말라


6·15 남북공동선언문에서 “남북한이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쪽의 연합제안과 북쪽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고 합의한 대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통일 이전 단계에서 남북한 교류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결코 통일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가 아니며, 남북한이 분단현실을 인정하고 점진적인 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교류협력을 통한 평화공존이 중요하다는 것에 인식을 함께한 것이다. 이 문제는 남이나 북이나 모두 내부적으로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아마도 각자가 자기 편에 유리하도록 해석하는 것 같다. 통일방안은 앞으로도 남북한이 서로 믿음을 쌓으면서 지속적으로 함께 연구할 과제이지, 결코 확정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남북관계의 교착상태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데 언제쯤 풀릴 것으로 보나. 전문가들은 잭 프리처드 대북협상 특사의 방북이 이뤄지고 난 뒤에나 남북회담이 재개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정체상태가 오래 갈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의 남북관계는 과거와 질적으로 다르다. 북한이 최성홍 외교부 장관 발언이나 금강산댐과 관련해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북쪽도 갈길이 바쁘기 때문에 대책없이 교착상태를 오래 끌지는 않을 것이다. 얼마 전 평양을 다녀온 박근혜 의원 등을 통해 금강산댐 공동조사 뜻을 밝힌 것도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 잭 프리처드 방북 이후 남북대화가 다시 재개될 것으로 본다. 그의 방북 자체가 실현되면 북한이 품고 있는 여러 오해들이 풀리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부시 미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향해 ‘버릇없는 아이’니 하면서 험담을 늘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테러 지원국가 리스트에 올려놓았다. 북-미 관계도 매우 불투명해보인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 지도자나 체제를 자극하는 험담을 해서는 안 된다. 부시가 실제로 이런 자극적인 언사를 썼는지는 확인해봐겠지만, 사실이라면 이는 결코 북-미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북한은 식량난이나 에너지난 및 탈북자 문제와 관련된 비판에는 크게 흥분하지 않는다. 하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 개인이나 체제를 겨냥해 도전적 발언을 하는 것은 단순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북한은 이를 ‘인민들의 적’으로 여긴다. 다시는 워싱턴에서 이런 험담이 흘러나와서는 안 된다. 일부 미국 인사들은 사석에서 흘러나온 소리 갖고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떠느냐고 하는데, 북한 지도부에게는 심각한 문제다. 입장을 바꿔 북한에서 부시를 향해 비슷한 험담을 던져 국내외 언론에 대문짝만하게 난다면 기분이 좋겠느냐. 이런 상태에서 마주 앉아 진솔하게 대화할 마음이 생기겠는가.

북한의 약속은 언제가는 지켜질 것

북한은 당국간 대화 테이블에는 안 나오면서도 남쪽의 영향력 있는 정치인 박근혜 의원을 비롯해 250여명에 이르는 제주도민을 순수관광 목적으로 초청하는 등 민간교류에는 힘을 쏟고 있는 것 같다. 북한의 이런 태도를 어떻게 봐야 하나.

일부에서는 북한의 이런 처신을 두고 ‘고도의 정치적 술수’라느니, 남한 사회를 이간시키려는 ‘통일전술전략의 일환’ 따위로 해석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너무 색안경을 끼고 봐서는 안 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그의 딸 박근혜 의원에 대해 정상회담 때부터 공개적으로 관심을 표명했다. 한국방송에서 다룬 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도 직접 구해봤다고 밝힐 정도로 새마을운동식 경제개발전략에 대해 관심이 깊다. 그래서 새마을운동 관련자료들도 보내준 적이 있다. 박 전 대통령이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으니 그의 딸이라도 만나 얘기를 듣고 싶다는 게 그의 희망사항이었다. 그는 평소 자신이 관심을 보인 사람은 꼭 만나보고 싶어하고 평양으로 초청하고자 한다. 그리고 꼭 다시 부른다. 가수 김연자가 평양에서 두 차례나 공연을 한 것도 이런 그의 스타일에서 비롯한 것이다. 따라서 과거 냉전 때처럼 당국간 대화의 장에는 나오지 않고 남한의 반체제나 친북성향의 인사들만 불러모으는 이중적인 태도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북한은 약속은 해놓고도 이행하지 않는 것들이 많아, 남북간의 불신감이 더욱 깊어지는 것 같다.

북쪽 관계자들은 “이행하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다. 늦더라도 약속은 지키겠다. 특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질 것”이라는 말들을 한다. 북한이 한 약속들은 언젠가는 지켜지리라 본다. 사안이 다른 것보다 덜 중요하다고 비칠 수도 있으나, 감귤을 보내준 제주도민 250여명을 한꺼번에 초청한 것도 약속은 지킨다는 북한 당국의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최근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설이 다시 불거지는데, 시기가 문제이지 그는 꼭 서울 땅을 밟으리라 생각한다. 북한이 약속을 지키는 데는 적절한 주변환경 조성도 필요하다. 우리 욕심만큼 북한이 빨리 약속들을 이행하기 어렵다. 북쪽도 내부 사정이 있다. 조바심을 내지 말고 기다려줘야 한다. 그 과정에서 하나하나 설득하면서 약속사항을 이행해나갈 필요가 있다.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이 잇따라 외국공관에 뛰어들어 한국행을 호소하고, 또 실제로 성공률이 높아지면서 가장 시도해볼 만한 탈출구로 인식되고 있다. 중국을 떠도는 수만명의 탈북자들이 비슷한 시도를 할 가능성도 높아졌으며, 국제사회의 관심 역시 크게 높아졌다. 이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하나.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이 해소되지 않는 한 탈북자 문제는 계속 뜨거운 감자로 남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문제는 조용하게 해결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탈북자들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나, 당장의 땜질식 처방보다는 궁극적으로 탈북자들의 수를 줄이고 더 많은 탈북자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기 위해서 북한의 경제난 해소 등 중·장기 대책에 힘을 쏟아야 한다. 북한이 획기적인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탈북자들이 국내 정착을 잘 할 수 있도록 조처해야 한다.

포용정책은 다음 정권에도 유지돼야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탈북자 문제와 더불어 식량난 이슈도 급부상하였다. 유엔이나 세계식량계획(WFP) 관계자들의 잇단 식량배급 경고도 나오고 있다. 일본은 행불자 처리와 식량지원을 연계시키고 있고, 미국도 인권문제와 연계시키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어 더욱 우려를 낳는다.

국제기구의 식량난 경고는 좀 부풀려진 것 같다. 먹는 문제가 여전히 어렵기는 하나 최악의 상황으로까지 가진 않을 것이다. 중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물론 한국도 이런 상황까지 가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장기적 투자라는 측면에서 생각해야 한다. 미국과 일본도 인도적인 식량지원을 인권상황과 연계시키는 무리수를 두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북한의 상응하는 조처가 식량난 해소의 지름길일 것이다. 이는 얼핏 보면 어려워보이지만 만성적인 식량난에서 벗어나는 가장 쉬운 길이다.

대통령 후보 사이에 현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을 둘러싼 평가가 극단으로 갈리고 있다.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든 대북포용정책의 기조는 유지되어야 한다. 다른 대안이 없다. 부분적인 보완과 수정은 불가피할 것이다. 특히 남쪽 사회 내부의 이념적 균열과 극복방안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가을쯤에 광범위한 전문가들의 견해를 수렴해 차기정권에 보탬이 될 대북정책 검토 종합보고서를 낼 생각이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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