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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6월, 다시 굶주림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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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5-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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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식량계획, 북한의 끔찍한 식량위기 경고… 한-미-일 관계 개선 적극적으로 모색

사진/ 정부가 대한 적십자사를 통해 북한에 지원하기로 한 비료 20만t을 실은 슈퍼선호가 출항하고 있다. (한겨레 윤운식 기자)
북한의 식량사정이 또다시 곤두박질하고 있다.

유엔이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이 중단 위기에 빠졌다는 경고를 연초부터 잇따라 내놓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세계식량계획(WFP)의 존 파월 아시아 지역국장은 5월2일 “올해 북한에서는 주민 640만명이 굶주릴 것으로 예상된다”며 “이들을 위해 61만t의 식량이 시급히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의 동아시아태평양 소위원회가 연 북한인권청문회에서다. 최근 13일간 북한의 6개 도시에 널려 있는 WFP의 배급시설을 둘러보고 온 그는 “WFP는 미국과 한국, 핀란드 등의 지원으로 현재 목표량의 절반도 확보하지 못했다”면서 끔찍한 식량위기 가능성을 경고했다.

9·11 테러 이후 국제사회 외면


사진/ 존 파월 세계식량계획 아시아 지역국장은 기자회견에서 올해 북한 주민 640만명이 굶주릴 것이라고 말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오시마 겐조 유엔 인도문제 담당 사무차장도 “미국·일본 등의 원조 부족으로 앞으로 수주 안에 100만명이 넘는 북한 어린이와 노인들에 대한 식량배급을 중단해야 할 처지”라고 심각한 우려를 표시했다. 몇주 안에 67만5천명의 중등학교 저학년 학생들과 노인 35만명에게 식량배급이 중단되고, 임신부와 젖먹이를 둔 어머니, 초등학교 어린이와 취학 전 아이들 등 기아에 직면한 아이들에게만 간신히 식량을 지원할 수 있다는 얘기다. WFP에 따르면 식량원조를 받는 북한 주민 640만명 가운데 90%는 임산부 등 여성과 어린이며, 특히 어린이와 유아들은 심각한 영양실조에 걸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 주민들은 어른의 경우 300g의 식량배급으로 버텨왔으나, 이번달부터는 50g이 줄어든 250g으로 배급량이 떨어질 것으로 WFP는 예상하고 있다. 미국 국가정보위원회(NIC)도 비슷한 예측을 내놓고 있다. 이 위원회는 미국 행정부 전문가들의 견해를 토대로 작성한 보고서 ‘2001∼2002 전 세계 인도주의 구호:경향과 예측’에서 “전 세계의 대규모 원조로 북한 주민들의 영양상태가 나아지기는 했으나 2001년 6월부터 2002년 말까지는 북한 인구의 3분의 1가량인 870만명이 넘게 식량난을 겪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들 빠르면 6월부터 북한에 심각한 식량난 위기가 들이닥칠 것이라는 예보다.

WFP는 대북지원을 위해 올 한해 61만1천t(약 2억1500만달러)의 식량원조가 필요하다고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WFP는 북한의 지난해 곡물생산량은 354만t이고, 올해 총수요량이 501만t이기 때문에 147만t이 모자랄 것으로 보고 있다. 목표량 67만t을 다 채워도 80만t이 부족한 셈이다. 북한은 나머지를 해외에서 수입을 하거나, WFP를 통하지 않고 한국이나 중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올해를 간신히 버텨나가야 할 상황이다.

그간 한풀 꺾인 것처럼 보였던 북한의 식량사정이 다시 이처럼 나빠진 까닭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국제사회의 관심이 시들해진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결정타를 날린 것은 9·11 테러였다. 유엔 관계자들은 특히 대부분의 식량기부국들이 테러와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아프가니스탄을 돕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 북한에 불리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부시 행정부가 집요하게 북한의 대량파괴무기 보유 위험성을 부각시킨 것도 국제사회가 상대적으로 북한 식량난에 관심을 덜 쏟게 만든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9·11 테러 이후 북한의 외환사정이 급격히 나빠져 식량수입 능력을 떨어뜨린 것도 눈에 띈다. 정보기관 소식통들은 테러사건 이후 주요 외화수입 창구였던 중동지역 등으로의 무기류 판매수입, 일본 조총련이 보내는 송금, 금강산관광 수입 모두가 줄어들면서 북한이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라는 분석들을 내놓고 있다. 식량을 정치적 협상 도구로 사용하려는 움직임이 드러난 점도 주목할 만하다. 고이즈미 정부는 일본인 행방불명자 문제 해결과 인도적 차원의 대북 식량원조를 연계하는 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장 지글러 유엔인권위원회의 식량권 담당 특별보좌관은 지난 4월4일 서울에 와서 “북한 주민들이 매우 끔찍한 식량난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 지난해 대북 식량원조의 최대 공여국이었던 일본이 식량지원을 중단했다는 사실은 극적인 일”이라면서 우려를 표시한 적이 있다. 그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 차원에서 ‘굶지 않을 권리’를 뜻하는 식량권 보호문제를 국제무역규범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유엔인권위원회에 제출한 당사자다. 일본뿐 아니라 미국의 보수층에서도 북한 식량원조와 인권상황 개선을 연계해야 한다는 주장이 심심치 않게 흘러나와 이 문제는 지원식량의 군사전용 방지, 분배 투명성 보장 요구와 더불어 새로운 걸림돌로 작용할 전망이다.

최대 공여국인 일본과 대화 나서

사진/ 급식소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북한 초등학생들. 몇주 안에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에게 식량배급이 중단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AFP)
여기서 흥미롭게 지켜볼 대목은 먹는 문제와 관련해 북한 주민 상당수의 생사를 좌우하는 나라들은 한국을 비롯해 미국, 일본이라는 점이다. 물론 중국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하고 있으나 한-미-일 세 나라의 지원량과 견줄 정도는 아니다. 존 파월 WFP 국장은 “올해 지원량이 줄어든 데는 일본의 지원 중단과 함께 특히 주요 원조국인 한국과 미국의 지원이 감소한 데 따른 것”이라며 특히 이들 세 나라가 원조를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얼마 전까지 WFP를 통한 대북식량지원을 약속한 나라는 한국(10만t), 미국(10만5천t) 두 나라다. 최근 핀란드가 동참했으나 지원규모는 크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중국이 올해 북한과의 전략적 관계를 고려해 유·무상으로 20만t 넘게 식량을 지원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대남관계는 물론 대미·대일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오는 것도 이런 다급한 식량사정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의 잭 프리처드 미국 대북협상담당 대사의 방북수용 권고를 받아들이면서 북-미간 당국자간 대화를 포함해서 민간교류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또 그간 중단했던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와 협상도 다시 시작하며, 일본인 행방불명자 문제 등을 다루는 북-일 적십자회담도 열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한-미-일 세 나라와의 동시 관계개선을 천명한 셈이다. 북한의 이런 노림수는 적어도 당장의 식량난을 푸는 데는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한국 정부는 ‘특사 방북 공동보도문’에서 쌍방은 동포애와 인도주의, 상부상조의 원칙에서 서로 협력하기로 한 약속에 따라 5월7일부터 서울에서 진행될 2차 남북경협추진위원회에서 정부가 갖고 있는 쌀 30만t의 지원을 결정하게 된다. 정부는 지난 4월 이미 대한적십자사를 통한 요소·복합 비료 20만t 지원을 결정한 바 있다. 북한은 또 4월29일부터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북-일 적십자회담을 통해, 일본이 북한에 의해 납치됐다고 주장하는 일본인 행방불명자 조사사업에 적극 협력한다는 데 동의함으로써 고이즈미 정부의 대북 식량지원 재개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사실 일본은 지난 95년부터 국제기구와 민간단체를 통해 지금까지 쌀 등 17억달러어치를 북한에 지원해온 최대 공여국이다. 한국 정부가 지난 98년 이후 지금까지 지원한 액수가 3억4천만달러어치에 지나지 않는 점을 감안하면 북한으로서는 일본의 기여도를 무시할 수 없는 처지인 셈이다. 유엔 관계자들이 밝혔듯이 일본을 포함해 미국, 한국이 식량문제를 외면하면 북한 정권으로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북한은 싫으나 좋으나 한-미-일 세 나라와 손을 잡고 체제생존을 모색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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