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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두려움 없는 ‘대쪽 승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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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5-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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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후보 이회창-인생역정

귀족적 평판 이면의 시련과 도전들… 그의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가

사진/ 이회창 후보는 남다른 성취를 이루고 대통령에 재도전한다. 고교시절, 대학 졸업식, 판사시절 여름 야유회, 신혼시절 모습(윗줄 맨 왼족부터). 세계법조인대회 참가, 자녀들, 부모와 함께 한 모습(아랫줄 맨 왼쪽부터).
다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5년 동안의 절치부심 끝에 선출된 이회창 전 총재. 그의 삶은 올 12월 대선에서 한판 승부를 겨뤄야 할 노무현 민주당 후보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1997년 12월18일, 여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해 DJ에게 39만표 차이로 패할 때까지 그의 인생에서 큰 실패나 좌절은 없었다. 명문가에서 별 어려움 없이 성장한 귀족적 인물로 평가받아온 이 후보는 이런 평가를 아주 싫어한다. 최근 경선 과정에서도 “한때 소년가장이었고, 수돗물로 배고픔을 달래는 가난도 경험했다”고 역설했다.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경기고 1학년 때인 50년 3월 아버지가 검찰에 전격 구속됐다. 당시 소장 검사였던 아버지는 상부의 지시를 거스르며 이승만 대통령과 절친한 충북지사를 구호물자 횡령혐의로 구속했다. 검찰 간부들은 아버지가 남로당원 혐의자를 풀어줬다며 직권남용 혐의로 연행했다. 현직검사 구속 1호였다. 이어 한국전쟁이 닥쳤다.

17살에 부산으로 피난간 그는 아버지 친구의 도움으로 부산체신청 5급 공무원으로 취직해 한동안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는 “도시락을 쌀 수 없어 점심시간에는 부산역광장에 나가 차가운 물로 배를 채웠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그러나 전쟁 중 피난지에서 그런 일자리를 얻은 것 자체가 특권층임을 입증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다.


이런 시련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곧 혐의를 벗고 검사로 복직했고, 그는 평범한 학생으로 되돌아갔다. 부산으로 옮겨온 경기고에 다니며 극장에서 영화도 즐겼다. 자신이 몸담았던 경기고 변론반 대표가 서울법대 주최 웅변대회에서 입상하지 못하자 심사위원단에 항의하고, 송도 앞바다에서 마산드라이진(요즘 소주처럼 보편화된 술)을 마시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성장기

강한 성취욕에 낭만적 기질도

그는 1935년 6월2일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났다. 경성법전(서울법대 전신)을 졸업한 아버지 이홍규씨는 당시 일제검찰 서흥지청 사무직원, 어머니 김사순씨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초·중학교 때는 내성적이었다. 해방 직후 검사로 임용된 아버지의 발령지를 따라 자주 학교를 옮긴 탓에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물론 나름의 대처법도 개발했다. 광주 서석초등학교 시절에는 작문발표 시간을 활용해 자기 존재를 부각시켰다. 1947년 청주중학교에 입학한 뒤 토박이들의 텃세가 심해지자 당시 좀 생소했던 야구로 친구들을 유인하기도 한다. 중학 1학년 때 사춘기를 맞은 그는 매일 청주 무심천 제방길을 거닐며 풍경을 스케치하고 감상문들을 쓰는 등 낭만적인 구석도 있었다. 학업성취 욕구가 강했고, 특히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쓴 흔적들이 삶 곳곳에서 발견된다. 중학 1학년 2학기 말에는 수학성적을 비관해 가출도 했다. 자전적 에세이 <아름다운 원칙>(97년 4월 김영사 펴냄)에서 당시 심경을 이렇게 적고 있다. “긴장한 탓인지 대수시험에서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질렀다. 60점 만점에 20점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 내 능력으로는 부모님의 기대를 따라갈 수도 없다. 서울로 올라가 성공해서 다시 부모님을 찾아뵐 것이다.” 그러나 조치원 역에서 역무원들에게 붙들려 하룻밤도 넘기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48년 경기중학교 2학년에 편입한 뒤에도 한동안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당시 학과 평균성적은 72점, 420명 가운데 305등으로 하위권을 맴돌았다. 생활기록부 인물평가란에도 적극성, 통솔력, 취미 모두 ‘무’(無)라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435명 가운데 54등으로 성적이 뛰어올랐고, 경기고등학교 시절에는 항상 상위그룹에 속했다.

법조인생

깐깐한 판사의 화려한 날들

그는 53년 서울법대에 진학한 뒤 두각을 나타냈다. 입학과 동시에 학년별 대의원 4명을 뽑는 선거에서 1등을 했다. 그는 애초 법학보다 철학이나 인문과학에 뜻을 뒀다. 유학을 결심하고 미국 몇개 대학에 입학허가까지 받았다. 그러나 뜻을 접고 3학년 때 고시공부를 시작한다. “집에서 지원받기는 싫고 고학하기도 쉽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1년 만인 57년 1월 고등고시 사법과 8회에 합격했다.4월 법복을 벗고 변호사로 개업했지만 2년 뒤인 88년 7월 다시 대법관에 임명됐다.

법조계에 일화도 많이 남겼다. 서울지방법원 단독판사 시절 당시 한성수 서울고등법원장의 딸 한인옥씨와 결혼했다. 법조 명문가와 결혼하는 행운을 잡은 것이다. 성격은 깐깐했다. 어떤 약속이든 15분 이상 기다리지 않아 ‘15분맨’으로 불렸다. 5공 시절 대법원판사로 재직할 때는 진보적인 판결이나 소수의견도 많이 냈다. 81년 계엄법 기한연장 규정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위헌론을 제기했고, 84년 정권의 뜻과 반대로 과외금지 위반 사범에 대한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고 무죄확정 판결을 내렸다.

권력과 실리에 순응한 이력도 있다. 5·16 직후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사형판결, 5공 초기 부산 미문화원 사건 관련자 사형판결이 대표적이다. 이 후보는 “판결에 대해 책임질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고, 당시 상황에서 불가피했다”고 해명하고 있다.

그가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89년, 중앙선관위원장에 임명된 직후. 취임 때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는 격이 되더라도 법을 지키겠다”고 밝힌 그는 4월 동해시 재선거에서 홍희표 당선자 등 4당 후보 모두를 부정선거 혐의로 고발했다. 그러나 모두 선고유예 등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분노한 그는 8월 영등포을 재선거 때는 더 강경하게 대처했다. 여야 3당 후보를 모두 고발했고, 여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과 야당 총재인 3김씨에게 “선거법을 지키라”는 경고서한까지 보냈다. 그러나 부정선거 관행은 깨지지 않았다. 결국 그해 10월 “공명선거 풍토 확립이라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데 도의적 책임을 느낀다”며 선관위원장직을 내던졌다. 국민들의 찬사가 쏟아졌고, 몇몇 언론은 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93년 2월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YS는 그를 감사원장으로 발탁했다. 그는 취임식에서 “감사원장은 직무상 대통령으로부터도 독립된 지위에 있다. 현 정권의 정치적 비리도 성역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파격 선언을 했다. 그리고 청와대 비서실과 안기부 등 권력핵심부를 파헤쳤다. 율곡사업, 차세대 전투기 사업(KFP), 평화의 댐 등 전두환·노태우 정권 시절 굵직한 의혹들도 감사했고, 전직 고위관리들을 잇따라 고발했다. 인기는 더 치솟았고, 어느덧 그의 이름 앞에 서릿발, 대쪽, 원칙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93년 12월 드디어 국무총리에까지 오른다. 당시 YS는 쌀시장 개방파동으로 악화된 여론을 진정시키려고 그를 총리에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의 방탄조끼나 얼굴마담 역할을 거부했다. 오히려 법이 보장한 총리의 권한을 달라고 외치며 YS와 파워게임을 벌이는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에서 논의된 사안도 총리 승인을 받을 것을 주장하다가 임명 127일 만인 94년 4월 물러났다. YS는 훗날 회고록에서 경질이라고 밝혔으나 이 후보는 스스로 사퇴했다고 밝혔다.

정치활동

권력투쟁 거쳐 당의 중심에…

사진/ 이회창 후보가 광주 경선을 앞두고 서석초등학교를 방문해 학생들과 자리를 같이했다. (이용호 기자)
최고권력자에게 미운 털이 박힌 그는 완전히 잊혀지는 듯했다. 그러나 95년 6·27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YS는 그에게 다시 구원을 요청한다. 96년 1월 신한국당에 입당한 그는 4·11 총선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신한국당 입당은 논란을 불러왔다. YS로부터 대선후보 자리를 약속받았다는 소문과 함께 “대쪽이 갈대가 됐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는 맞받아쳤다. “대나무는 옮겨 심어도 토양이 맞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말라 죽을 뿐이지 갈대로 바뀌지는 않는다.” 그는 정치권에 안착했다. 총선에서 여당 최초의 수도권 승리라는 큰 성과를 달성했고, 전국구로 금배지도 달았다. 그리고 97년 3월13일 노동법 파동과 한보사태, 김현철씨 국정농단 사건 등 잇단 악재로 문민정권이 절명의 위기에 내몰린 상황에서 신한국당 대표위원에 임명된다.

이때부터 그는 대선을 향한 치열한 권력투쟁의 중심에 섰다. “적자론”을 내세운 민주계 의원들이 대선후보로 낙점되지 않도록 계속 견제하자, 그는 김윤환 의원 등 민정계와 손잡고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그리고 97년 7월21일 전당대회에서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됐다. 정치 입문 1년6개월 만이다. 그에게 대통령 자리는 떼어놓은 당상처럼 보였다. 그러나 두 아들 병역문제가 그를 침몰시켰다. 배신감을 느낀 국민은 등을 돌렸다. 측근 참모들은 “국민 앞에 무조건 사죄하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그는 “법이 정한 바에 따라 정당한 면제를 받았을 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조금도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외쳤다. 여론을 더 악화됐고, 당 안에서 후보교체론이 제기됐다. 결국 그해 12월 대선에서 DJ에게 패배했다.

낙선 이후 지난 5년 동안 그는 천당과 지옥을 끊임없이 오갔다. 98년 8월31일 당내경선을 통해 한나라당 총재로 복귀했지만, 판문점 총격 요청사건과 국세청을 동원한 선거자금 추징 의혹이 불거졌다. 특히 측근인 서상목 의원과 동생 회성씨가 선거자금 모금에 개입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심각한 도덕적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그는 방탄국회를 소집하고 영남으로 달려가 반DJ 정서에 직접 호소했다. 그리고 DJ정권으로부터 탄압받는 야당 지도자로 위치를 구축했다. 2000년 4월 총선에서는 제1당의 총재로 우뚝 섰고, 지난해 10·25 재·보선에서 압승을 거둔 뒤부터는 “넥스트 프레지던트”로 불렸다. 측근들도 “이회창은 YS, DJ 등 역대 어느 야당 총재보다도 막강하다”며 대선 승리를 장담했다.

그러나 힘의 집중은 그를 위기로 몰아넣는 부메랑이었다. 당내 비주류는 그가 영남의 반DJ 정서에 안주한 채 의원들을 줄세우는 ‘3김식 정치’를 답습하고 있다고 공격했다. 경쟁 상대인 민주당이 국민경선을 도입하자 당 안팎에서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빗발쳤다. 그러나 그는 변화에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결국 지난 2월 박근혜 의원 탈당, 3월 빌라 파문, 4월 ‘창심’을 들먹이는 몇몇 측근 인사들이 발호로 리더십에 다시 한번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노무현이라는 새로운 맞수가 출현했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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