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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인기폭발! 경선의 만담가 이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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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4-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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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관된 주장 펼치는 모습에 격려의 박수 늘어

“너무 기다려져요. 데뷔하자마자 한국 코미디계를 평정하실 분. 계속 좋은 웃음을 기대합니다.”(이상희 팬) “사실 처음 토론회를 보면서 우스워 혼났습니다. 이유야 다 아실 테고요…. 경인방송 사회자는 아예 면박을 주더군요. 이제는 팬이 된 것 같아요. 푸근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고. 사람 냄새가 나요. 옆집 담배가게 주인같이.”(수원)

“남 헐뜯기 바쁜 다른 후보들과 달리 깨끗해 보이고 정책도 신선하시고. 과학이 살아야 나라가 부강해진다는 이 후보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힘내세요)

한강에 네명이 빠지면…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 뛰어든 이상희 후보의 홈페이지(www.rsh.or.kr)에 요즘 갑자기 격려의 글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의 성적표는 보잘 것 없다. 인천경선(4월13일)에서는 겨우 10표(0.7%)를 얻었다. 지역연고가 있는 울산경선(18일)에서 31표(4.1%)로 도약했지만, 제주경선(20일)에서 다시 18표(3.7%)로 떨어졌다. 모두 알고 있듯 꼴찌다.

그의 경선출마 자체가 뜻밖이었다. 한나라당 안에서는 “분위기만 흐리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사재를 털어 2억원의 후보등록비를 내면서까지 출마를 결행했다. 이제 과학경제 대통령이 나와야 할 때라는 이유였다.

출발부터 다른 후보들과 좀 달랐다. “색깔논쟁, 보혁논쟁, 필패론, 대안론 등 정치권의 정쟁적 대결을 지양하고 미래지향적 정책대결에 주력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오로지 과학중흥을 외치고 있다. △전자적 군복무제 도입 △과학기술을 통한 제2의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방지 △과학기술로 안방에서 행정서비스를 받는 정부개혁 △유학 않고 안방에서 세계 명문대학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교육개혁 △지하철 건설비의 10분의 1 가격에 건설 가능한 초경량 궤도열차(PRT)로 대중교통 문제 해결 등 깜찍하고 도발적인 정책도 내놓는다.

그는 또 독특한 언행으로 경선장 분위기를 확 뒤바꿨다. 4월13일 첫 경선장인 인천실내체육관. 이부영·이회창·최병렬 후보가 잇따라 등장해 서로를 향해 ‘날’을 세웠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연단에 선 이상희 후보는 서영춘 등 유명 코미디언의 만담을 보는 듯한 파격적인 유세를 선보였다. “당원동지 여러분 제가 네 후보 중에 꼴찌라는 것 다 아시죠? 그런데 과학기술 대통령이 꼴찌가 돼서 되겠습니까?” 폭소가 터졌다. 굳은 얼굴로 앉아 있던 다른 세 후보도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능청스레 자기 주장을 펼치며 사퇴할 뜻이 없다고 외친다. 과학을 통해 국가경쟁력을 높일 대통령이 필요한 21세기에 모든 후보가 정치적 공방에만 몰두한다고 비판한다. 자신이 사퇴하면 “안 그래도 갈 곳 없은 이과 출신들이 절망한다”는 좀 황당한 주장도 덧붙였다. 그는 이날 겨우 10표를 얻는 데 그쳤다.

그러나 결코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는 텔레비전 토론에서까지 파격과 동문서답, 엉뚱하고 생경한 말들을 늘어놓는 괴짜로 등장한다. 첫선을 보인 4월11일 밤 한국방송 대선후보 정책토론회. 사회자가 노풍에 대해 묻자 “네, 노무현 후보도 2번이고 저도 2번입니다. 둘 다 부산 출신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만큼 지지를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너무 태연했다. 토론자가 다른 세 후보와 대화를 집중한다 싶으면 “세 사람은 문과 출신이고, 저만 이과 출신이라서 발언 기회가 안 오네요”라고 비꼬았다. “대통령이 되면 의사, 약사, 제3자 중 누구를 보건복지부 장관에 임명할 것이냐”는 자신의 질문에 이회창 후보가 “제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말이죠?”라고 되묻자 천진하게 입을 연다. “네, 축하합니다.”

파격은 나날이 발전한다. 4월15일 SBS 후보자 토론회. 다른 후보들이 모두 그럴듯한 출마의 변을 밝혔다. 그런데 그의 입에선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여러분, 제가 퀴즈 하나 내겠습니다. 한강에 네명이 빠졌답니다. 진보, 중도, 개혁, 그리고 과학. 그런데 119가 와서 누구를 건졌는지 아십니까?” 사회자는 물론 다른 후보들도 모두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계속 내질렀다. “과학을 건졌답니다. 국가경제를 생각해서. 이제 과학을 아는 경제 대통령이 필요한 때입니다.”

4월18일 울산경선 뒤에 벌어진 문화방송 <100분 토론>에서는 “선거인단 구성을 보면 이공계는 없다”고 불공정 시비를 제기했다. “이부영 총재께서는…”이라는 질문에 이부영 후보가 “저는 총재가 아닙니다”라고 정정하자 그는 “앞으로 총재가 되시라는 얘깁니다” 하고 능청스레 되받아친다. 비아그라의 사례를 들어 과학중흥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전자적 군복무제로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어내기도 한다.

파격인 만큼 논란도 많았다. 초반 온라인상에서는 왜 출마했는지 모르겠다는 비난과 모든 문제를 과학으로 해결하려는 환원주의에 빠졌다는 비판, 차라리 코미디계에 데뷔하라는 조롱이 이어졌다. 급기야 그를 “아톰 할배”로 부르고, 과학경제 대통령론을 설파하는 그를 빗댄 ‘이상희 시리즈’라는 유머까지 유행하기에 이른다.

시리즈 한 토막.

사회자: 기호가 2번이고 부산 출신이라서 노풍을 꺾을 수 있다고 하셨는데.

이상희: 논리적으로 아무 하자 없습니다. 과학적으로도 완벽합니다.

사회자: 사이버전사론을 계속 하시려는지?

이상희: 제가 폐결핵으로 군대를 면제받아서 가슴이 약합니다. 그러니 손끝에 힘이….

온라인 팬클럽 성황

사진/ 초기에 왜 출마하냐는 비웃음을 샀던 이상희 후보가 갈수록 신선하다는 칭찬을 듣고 있다. 온라인 팬클럽까지 등장했다. (이용호 기자)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남을 의식하지 않고, 타인을 비판하지 않고, 과학을 통한 경제력 부흥이라는 화두를 물고늘어지는 그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차츰 커지고 있다.

“버릇이 되어 총재님, 총재님 하는 후보보다, 측근이냐 아니냐 하는 것보다, 같이 알고 있으면서 왜 오늘 그러느냐는 것보다, 정치냄새 없는 순박한 과학자가 더 돋보였다. 몇표 못 얻으면 어떻습니까. 귀하가 갖고 있는 과학에 대한 소신을 피력하세요”(상희사랑), “권력에 대한 욕심보다 나라의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조롱을 무릅쓰고 의로운 길을 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박경석)….

특히 엔지니어, 연구원 등 이공계 출신들의 글이 쇄도하고, 온라인상에 이상희 팬클럽(freechal.com/leessamo,cafe.daum.net/leesanghee)까지 등장했다. 요즘 그의 홈페이지에는 어떤 조롱이 있더라도 사퇴하지 말고 끝까지 과학중흥을 외쳐달라는 주문이 끊이지 않는다. 강퍅한 정치공방이 거듭되는 경선장과 황량한 언어들이 판치는 텔레비전 후보 토론회. 우스꽝스럽지만 일관된 주장을 펼치는 그의 태도에서 진지함과 신선한 감동을 느끼는 역설적 상황은 이런 정치판의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신승근 기자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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