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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험담만 안 하면 대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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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4-1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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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평화포럼에서 공개된 북-미 대화내용… 클린턴 시절 그리워하나 재협상 의지도 있어…

“만약 승객을 가득 태운 고려민항이 주체사상탑을 들이받아 폭삭 주저앉힌다면 당신네들 심정은 어떻겠느냐?”(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 대사)

“….(침묵)”(이찬복 북한군 상장)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 중이고, 부시 대통령이 보여준 행동은 단호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그레그)

“북한군은 강하다. 미국과 싸워 죽을 각오가 돼 있다. 미국이 진정 우리와 대화를 원한다면 먼저 공손하게 나와야 한다. 지도자나 체제에 대해 험담을 계속 늘어놓는다면 미국과는 대화하지 않겠다.”(이찬복)

“….(침묵)”(그레그)


“우리는 미국과 제네바 기본합의서를 체결한 뒤 흑연감속로 작동을 멈쳤으나, 미국이 2003년까지 지어주기로 한 경수로 공사가 계속해서 지연되는 바람에 많은 전력 손실을 맛보고 있다. 우리만 손해를 보고 있는 것 아니냐.”(이찬복)

“미국 상원의원들도 똑같은 말을 하더라. 손해보는 쪽은 오히려 미국이라고….”(그레그)

“앞서도 얘기했지만 미국이 우리 지도부나 체제에 대한 험담을 하지 않는다면 조건 없이 대화에 나서겠다. 다만 보다 고위급에서 대화를 했으면 좋겠다.”(이찬복)

그레그의 설득 먹혔나

사진/ 임동원 특보는 미국 공화당 정권에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월리엄 페리 전 조정관을 설득하기 위해 유난히 공을 들였다.
그레그 전 대사는 12일 ‘2002 제주평화포럼’에 참석해 최근 평양 방문 중 북한군 판문점대표부 대표였던 이찬복 상장(우리의 중장)을 만나 나눈 얘기를 비교적 소상하게 풀어놓았다. 이 자리에서 북한 지도부는 부시 행정부에 대한 그간의 섭섭함과 분노를 그레그 전 대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하려는 듯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레그 전 대사는 “북한이 대화를 통해 미국과 관계개선을 이루려는 의도는 명백해 보였다”면서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부시 행정부가 대량살상무기를 의제로 끄집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어느 정도까지 이해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근거로 앞으로 북-미관계가 긍정적으로 흘러갈 것으로 보는 듯했다. 임동원 특보의 얘기도 비슷했다. 그는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단서를 달아 “북한이 미국의 악의 축 발언 등 험담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은 틀림없다”고 말했다. 이런 발언들을 근거로 판단해보면 미국이 북한 정권을 자극하는 경솔한 언어 구사만 자제해도 북-미대화가 어느 정도의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레그 전 대사에 따르면 북한 지도부가 클린턴 행정부 때를 상당히 그리워했으나, 부시 정권의 등장과 9·11 테러를 지켜보면서 이제 협상을 원점에서 새로 시작할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주목할 대목이다. 사실 북한은 그간 최고 지도부에 대한 험담도 참기 어려웠지만 클린턴 행정부 때 맺은 각종 외교적 합의들을 정권이 바뀌었다고 헌신짝처럼 차버린 부시 행정부의 처사에 크게 반발해왔다. 대화조차 거부한 게 단적인 보기다. 하지만 최근 임 특보와 그레그 전 대사의 북한 지도부 설득이 상당히 먹혀들어간 듯하다. 임 특보는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과거의 성과에 집착하지 말고 미국의 현 정부와 새로운 방식으로 대화해서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으면서 현안문제를 해결할 것”을 권고했다. 그레그 전 대사는 △부시 대통령은 전시 대통령이니 강경할 수밖에 없고 △92년 대선에서 아버지 부시를 이긴 클린턴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으며 △부시는 레이건을, 클린턴은 카터와 비슷해 성격차이가 크다는 점을 보기로 들어 북한 지도부에 현실을 받아들일 것을 충고했다. 그레그 전 대사는 북한 지도부가 이를 이해하는 것 같았다고 덧붙였다. 최근 북한이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이 없음에도 미국과 대화에 나서겠다고 나온 배경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레그 전 대사가 북쪽 주요 인사들과 나눈 얘기는 함께 수행한 한국계 미 국무부 직원을 통해 워싱턴에 그대로 전달됐다. 그레그 전 대사는 미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장을 비롯해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부통령으로 있을 때 국가안보보좌관을 맡을 만큼 아버지 부시와는 막역한 사이다. 아들인 현 부시 대통령에게는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의 방북 내용이 앞으로 재개될 북-미대화에 적지 않은 참고가 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페리 프로세서'의 주역들

사진/ 임동원 특보는 미국 공화당 정권에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월리엄 페리 전 조정관을 설득하기 위해 유난히 공을 들였다.
미 국방장관 출신의 월리엄 페리 전 대북정책 조정관도 “아직 승리를 선언하기에는 시기상조”라면서도 “임 특보를 비롯한 그레그 전 대사의 방북이 북-미관계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94년 핵위기와 현재의 위기 사이의 공통점은 북한의 핵무기와 확산 문제”로 진단하면서 “하지만 지금은 남북, 북-미간 대화 채널이 존재하기 때문에 94년 핵위기 때와는 사정이 다르다”고 말했다. 임동원 특보는 포럼 휴식시간마다 페리 박사와 귓속말로 긴 얘기를 나눠 눈길을 끌기도 했다. 두 사람은 98년 북한의 미사일 발사위기를 막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페리프로세스’ 작성의 주역들이다. 94년 핵 위기 때는 국방장관으로 있으면서 북한 영변 폭격을 준비했으나, 98년에는 대북정책 조정관으로 미사일 위기를 막은 페리는 이제 또다시 2003년 핵사찰 위기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다. 임 특보는 공화당 외교안보팀에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페리 전 조정관을 설득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는 모습을 보였다. 임 특보는 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을 만난 얘기를 하면서 조속한 북-미대화의 필요성을 언급했다는 후문이다.

그레그 전 대사가 특히 김정일 위원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대목도 눈길을 끌었다. 특히 그레그 전 대사는 “김 위원장 개인의 인식 변화가 굉장히 흥미롭다”면서 “그의 주된 목표는 북한을 개방하면서 정권유지를 희망하는, 즉 북한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대량살상무기는 북한 정권 유지의 안전장치나 다름없다”면서 “미국을 두려워하고 있는 북한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호신뢰 조처부터 취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미 행정부가 진정으로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문제를 풀려면 상호신뢰부터 쌓아야 한다는 충고였다. 이 발언은 부시 행정부의 강경 일변도 대북정책에 일침을 가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겨 참석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토머스 허바드 현 주한 미 대사는 북한과 대화를 통해 현안을 풀겠다고 강조하면서도 핵, 재래식 무기는 물론 인권문제까지 끄집어내 협상 테이블에 올려질 것임을 내비쳐 그레그 전 대사의 발언과 묘한 대조를 이뤘다.

9·11이 바꾼 한반도의 풍경

사진/ '2002 제주 평화포럼'은 북한과 미국 지도부의 깊은 속내를 들여볼 수 있는 드문 자리였다.
12일부터 이틀간 제주에서 열린 ‘2002 제주평화포럼’은 이처럼 북한과 미국 행정부의 깊은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는 보기 드문 자리였다. 최근 평양을 다녀온 임동원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를 비롯해, 윌리엄 페리 전 대북정책조정관, 도널드 그레그와 토머스 허바드 전·현직 주한 미 대사, 다른 서울 주재 주요국 대사들, 외신 특파원 등의 면면을 봐도 이번 행사의 비중을 충분히 짐작게 했다. 특히 이들은 9·11 테러가 미국의 대외정책을 크게 변화시켰으며, 그 변화가 한반도에도 적지 않은 파장을 몰고 왔다는 데 견해를 같이했다. “9·11 테러가 이전과는 매우 다른 풍경을 만들어냈으며, 한반도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얘기할 수 있다. 적어도 겉보기에 9·11 사건이 남북관계 정체에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어 보인다. 특히 이 사건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이슈를 더욱 부각시킨 계기가 됐다.” 데라다 데루스케 주한 일본 대사의 평가다. 당분간 북한의 대량살상무기가 한반도 평화정착의 최대 걸림돌이라는 오명을 벗어나기는 어려워 보인다.

제주=글·사진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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