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6월 서울 청운동 경기상고 앞에서 전교조 반대시위를 하는 보수단체 회원. 이원철 교사 제공
“1989년 안기부는 전교조 가입 교사에 대한 탈퇴 공작을 추진하고 전교조에 대한 색깔 공세와 홍보 방안 등 주요 대책을 제시하면서 조직 확대 방지, 조직 탈퇴 등을 목표로 정부 정책 실현에 앞장서왔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 국가정보원은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활동 결과를 담은 보고서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을 내어 과거 권위주의 정권 때 국정원 행태를 반성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가 나온 지 고작 2년여 만에, 이명박 정부 국정원은 전교조, 민주노총에 노골적인 와해 공작을 펼친다. 군사정권의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의 공작과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 공작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전모는 10년이 지난 2020년, <한겨레21>이 입수한 국정원의 ‘노조 와해 공작’ 국고손실 재판기록 1만여 쪽을 통해 밝혀졌다. 이 사건 1심 재판부는 피고인들에게 모두 유죄를 선고하면서 이렇게 밝혔다. “국가정보원의 행위는 종국적으로는 헌법상 보장된 민주노총과 그에 소속된 노동자들의 단결권을 침해할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개별 노조의 자주적·자율적 의사결정에 터 잡아 진행돼야 하는 제3노총의 설립 과정에 국가기관이 직접 관여한 것으로서 그 위법성이 중대하다.”이제는 ‘죽은 권력’인 이명박 정부 국정원의 해묵은 과오를 10년 뒤 기록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할지도 모른다. 그 답은 13년 전 보고서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국정원은 지난날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철저한 자기반성과 함께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해나가야 한다. 이를 통해 향후 모범적인 정보기관으로서 국민의 신뢰를 받아 국민에게 충실히 봉사할 수 있는 기틀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 약속을 국정원은 다시 깨지 않을 것인가, 정권이 바뀌어도, 시대가 달라져도.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선생님 괜찮으세요? 저 아저씨들 선생님한테 왜 그러는 거예요?”2009년 6월3일, 당시 서울 경기상업고등학교 역사교사 이원철(56)씨에게 학생들이 던진 질문이다. 그날 아침, 학생들이 하나둘 등교하던 경기상고 교문 앞에 큰 펼침막을 붙인 승합차 한 대와 팻말을 든 사람 네 명이 서 있었다. 펼침막에 적힌 구호는 이랬다. “김일성이 이뻐하는 주체사상 세뇌하는 종북집단 전교조, 북한에서 월급 받아라!” “전교조의 참교육과 계기 수업은 국민 속인 민중혁명교육이다. 당장 파기하라!” 이씨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조합원이고, 팻말을 든 이들은 ‘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 ‘교육과 학교를 위한 학부모연합’ 등 회원이었다.저 사람들은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김일성이 이뻐하는’ 문구를 보는 순간 정말 피가 거꾸로 솟더라고요. 아이들 등교하는데 그러고 있으니까 정말 참을 수 없었어요. 제가 당시 학교 홍보 업무를 맡고 있어서 애교심이 컸고, 그때는 전교조가 무상급식이나 학생인권조례처럼 학교 현장에 많은 변화를 이끌던 때였어요. 전교조 조합원이라는 자긍심도 컸죠.” 이씨는 출근길에 그들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그리고 팻말을 들고 있던 사람에게 “이것은 1인시위가 아니라 불법집회다. 아이들 등교 방해하지 말라”고 항의했다. 그들은 “네가 뭔데 그러냐”고 맞받아쳤다. 언성이 높아졌다. 이 시위대가 학교를 찾아오기 석 달여 전인 2009년 2월, 전교조는 초·중학생 진단평가가 학교와 학생을 서열화하는 일제고사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하며 반대 입장을 냈다. 이 보수단체들은 2009년 3월부터 6월까지 학생들 등교 시간에 맞춰 진단평가 반대 성명을 냈던 전교조 조합원이 속한 학교 40여 곳을 돌며 전교조 반대 시위를 벌였다. 경기상고에는 반대 성명에 참여한 교사가 없었음에도 이들은 7일간 시위를 벌였다. 실랑이를 벌인 뒤에는 이씨 사진과 ‘전교조 노동자 이○○을 즉각 파면하라’는 문구가 펼침막에 추가됐다. “시위가 길어지다보니 경기상고 동창회까지 제 편에 서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 사람들이 저와 함께 항의했던 선생님을 경찰에 고소해서 경찰서에서 조사도 받았습니다. 민사소송도 냈고요. 그럴수록 의문이 들었죠. ‘저 사람들은 도대체 왜 저러는 것일까.’”이명박 정부 때, 보수단체들은 정권과 발을 맞춰 전교조 ‘죽이기’에 앞장섰다. 전교조가 정부 정책에 반대하고 진보정당에 후원한 교사들을 검찰이 수사하면, 이에 맞춰 보수단체들은 전교조 앞과 학교 앞에서 시위했다. 이들은 전교조와 조합원 교사를 잇따라 고발하고, 보수언론에 광고를 냈다. 전교조 파괴에 나선 정권과 보수단체의 연결고리는 국가정보원이었다. 2009년 2월16일 국정원 심리전단은 주요 업무보고를 통해 “금년은 ‘좌파척결’ 국론통합 원년화”라는 목표를 잡고 “좌파 무력화 지속, 전교조 교사 압박”을 추진 계획으로 내걸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전교조와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민주노총을 ‘3대 종북좌파’라고 규정하며 그 가운데 “전교조가 가장 문제”라고도 주장했다. 그러나 국정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교조 고사 작전에 나섰는지 전모가 드러난 적은 없다.<한겨레21>은 국정원이 2017년 ‘노조 파괴 공작 의혹’에 관한 내부 감찰을 벌여 2018년 4월 검찰에 송부한 ‘수사참고자료’를 입수했다. 여기에는 박근혜 정부 시기인 2013년 교사 5만7천 명(당시 기준)이 가입한 전교조가 해직교사 6명이 가입했다는 이유로 법외노조가 된 것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는 자료가 담겼다. 전교조 법외노조화를 계획한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노조 할 권리를 ‘혐오’했던 이명박 정부 국정원이었다.국가정보원이 ‘노조파괴 공작 의혹’과 관련해 자체감찰을 벌여 2018년 4월 검찰에 송부한 ‘수사참고자료’ 첫페이지
2010년 9월14일 국정원이 청와대에 보고한 ‘전교조의 ‘조직 불법단체화’ 회피 전술 조기 무력화’ 문건 둘째 쪽.
국정원 심리전단이 2011년 7월20일 내부 보고한 ‘전교조 교사 서한발송’ 관련 문건. 보수단체가 전교조를 고소하도록 독려하고, 변호사 선임료도 지급해준 사실을 알 수 있다.

5월14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민주노총과 전교조 등이 ‘전교조 법외노조 취소’ 판결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스승의 날’을 하루 앞두고 법외노조화로 해직된 전교조 조합원에게 기자회견 참가자가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있다. 김진수 기자
전교조 행정소송과 양승태 ‘사법농단’
재판연구관 “파기 환송 전제 검토만”
“전교조 가처분 인용- 잘 노력해서 집행정지 취소토록 할 것.”(2014년 9월22일 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 업무일지)이명박 정부에서 구상한 전교조 와해 공작은 박근혜 정부에서 완성됐다. 그러나 고용노동부의 법외노조 통보 처분에 불복한 전교조가 행정소송을 제기하면서 법정 다툼으로 번졌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전교조 재판을 최대 현안인 상고법원(대법원이 맡은 사건 중 단순한 사건만 심리하는 법원)을 도입하기 위한 거래 수단으로 취급했다. 양 전 대법원장 등의 ‘사법농단’ 재판에서는 박근혜 정부에서 이어진 지속적인 전교조 와해 시도와 이를 활용하려 한 대법원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고용부를 상대로 한 전교조의 법정 싸움은 크게 △행정처분의 타당성을 가리는 본안 소송 △소송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처분 효력을 멈춰달라는 집행정지 가처분 소송으로 나뉜다. 본안 소송은 1·2심 모두 패소했지만 가처분 소송 결과는 반대였다. 2013년 11월(1차·서울행정법원)에 이어 2014년 9월(2차·서울고등법원)에도 전교조 요청을 받아들여 행정처분 효력을 정지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2차 효력 정지 결정에 청와대는 격노했던 듯하다. 정다주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이 작성한 문건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효력 집행정지 관련 검토’를 보면, “BH(청와대)는 크게 불만을 표시했다는 후문(이 들린다)”이며 “비정상의 정상화가 필요한 것으로 (청와대가) 입장을 정리”했다고 돼 있다. 그러면서 청와대가 전교조 사건을 “헌재의 통진당 위헌정당 해산 심판 사건과 함께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취급”하는 만큼 대법원이 고용부 손을 들어주면 청와대와 대법원 모두 “윈윈의 결과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수상한 정황이 발견된 건 그즈음이다. 법원행정처는 전교조의 2차 효력 정지 결정 문제점을 분석해 보고서를 썼다. 이 보고서는 청와대를 거쳤고 일부 내용은 고용부 재항고 이유서에 그대로 인용됐다. 법원행정처 보고서가 청와대→고용부를 거쳐 다시 대법원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게다가 고용부 처분의 근거가 된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제2조)을 검토한 재판연구관들이 기각(고용부 패소)으로 의견을 내자, 마치 다른 결론을 찾으려는 듯 주심 고영한 대법관의 사건 검토 지시가 거듭되기도 했다. 이 사건 검토에 참여한 재판연구관은 “대법관님 생각이 잘못됐을 가능성도 있어서 양쪽 근거를 충분히 살펴보는 게 일반적인데, (고용부가 패소하는) 파기 환송을 전제로 한 검토들만 했다”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그럼에도 양 전 대법원장을 비롯한 사법농단 재판의 ‘피고인’들은 사실관계와 법리를 따져봐도 모두 죄가 되지 않는다며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