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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원조보수 납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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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4-1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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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렬 의원 출마로 한나라당 경선 들썩… 대안론이 이회창 대세론 허물 것인가

사진/ 한나라당 보수파 좌장으로 경선에 뛰어든 최병렬 의원이 4월5일 출마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경남 출신 한나라당 한 핵심 당직자는 지난 2000년 한가위 때 고향을 방문했다가 화들짝 놀랐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 역술인들이 흘린 얘기가 널리 떠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2년 대선 때는 지리산 정기를 받은 수도권 의원이 당선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이 이야기는 여의도 정가에 급속히 퍼져갔다. 단연 지리산 정기를 타고난 주인공이 누군지가 최대 관심사였다. 그러나 곧 의견이 모아졌다. 모두 ‘최틀러’(최병렬 의원의 별명)를 지목했다. 최병렬 의원의 고향은 지리산 인근인 경남 산청이다. 서울에서만 4선을 지냈다. 15대 대선 때는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지만 직접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 뛰어든 이력도 있다.

그러나 ‘지리산 정기설’이 떠돌 당시 최 의원은 이미 이회창 총재의 우산 아래서 수석부총재로 선출된 상태였다. 그는 ‘이회창 유일 대안론’을 앞서서 설파했다. 모두들 그가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뛰어들었다고 공인했다. 누구도 그에게서 반역의 조짐을 감지하지 못했다. 이 전 총재의 측근들도 단지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불과하다고 웃어넘겼다.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 선봉장


그로부터 2년, 이제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 전 총재의 최측근으로 꼽히던 최 의원이 지난 4월3일 자신이 직접 대선후보 경선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최 의원의 결정은 기습적이었다. 더욱이 그는 ‘이회창 필패론’을 직접 거론하며 자신이 대안이라고 외쳤다. ‘이회창 유일 대안론’이 ‘이회창 필패론’으로 돌변한 것이다.

최 의원의 경선출마는 당내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 총재는 물론 당직자들 모두가 잔뜩 긴장하고 있다. 물론 경선에는 이부영·이상희 의원도 뛰어들었다. 이들도 한결같이 “이회창으로는 안 된다”고 외친다. 그러나 최 의원의 비중과 파괴력은 이들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게 당 안팎의 일반적인 평가다.

이상희 의원은 단기필마다. 애초 부산시장 출마를 저울질하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대선후보 경선으로 방향을 틀었다. 당 안팎에서는 이 의원이 대선후보를 노렸다기보다는 자신의 명예회복을 위한 선전장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당내 개혁성향 의원의 좌장을 자임해온 이부영 의원은 경선 내내 이 총재가 시대적 요구인 변화와 개혁을 거부하고 있다고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 온건 개혁성향 유권자를 흡수하려는 이 총재의 전략에 상당한 흠집을 낼 수 있는 존재다. 그러나 이 총재 쪽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눈치다. 그동안 이 의원에 대해 나름의 대비를 해왔고, 보수성향이 강한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경선 과정에서 그를 선택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병렬 의원은 전혀 다르다. 그는 당 안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보수파의 좌장이다. 그동안 당내 쟁쟁한 보수파 의원들이 결집한 각종 모임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왔다. 그가 적극 참여해온 ‘통일과 안보를 생각하는 의원들의 모임’에는 무려 52명의 보수파 의원들이 소속돼 있다. 이 모임은 정형근·김만제·김용갑 의원 등 내로라 하는 보수통들을 망라하고 있다. 공직자 출신 의원모임인 ‘바른의원모임’에는 30여명의 현역 의원이 가담해 있다. 부산고 출신 현역의원 모임인 ‘청조회’는 사실상 최 의원을 후원하기 위한 사조직에 가깝다는 게 당 안팎의 분석이다. 최 의원은 출발선에서부터 외형상 이 전 총재에 버금가는 ‘심정적인 우군’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들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느냐 여부다. 이들의 행보에 따라 ‘최병렬 돌풍’이 몰려올 수도 있고, 미풍조차 불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단 심상찮은 조짐이 일고 있다. 이 모임 출신인 김만제 의원이 선대위원장에, 최병국 의원이 본부장을 맡고 나선 것이다. 김 의원은 특히 당내 TK(대구경북)의 대표자로 손꼽힌다. 올 초부터 이 총재를 상대로 TK 출신에게 차차기를 보장해달라고 요구했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최근 ‘반이회창’의 기치를 높이 올렸다.

‘대선 필패론’ 업고 보수대연합 구상

사진/ 동지에서 경쟁자로, 최병렬의원은 이회창 전 총재의 최측근으로 4년여 동안 활동했다. (이용호 기자)
최 의원은 당내 대선경선에서 ‘진검승부’를 피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지난 4년여 동안 가까이서 지켜본 이 전 총재의 면모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만큼, 그동안 이 총재가 보여준 어정쩡한 정치적 행보를 모두 짚고 넘어가겠다고 벼르고 있다. 최 의원은 일단 ‘원조보수’ 논쟁을 통해 이 전 총재를 직접 압박하고 나섰다. 노무현 민주당 고문과의 지지율 격차에 대해서도 “자기 관리가 소홀하고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결과”고 직격탄을 날렸다. 지지율 하락의 책임이 이 전 총재 본인에게 있다는 주장이다. 97년 대선 때 아들 병역문제로 다 된 밥을 망쳐놓고도 주변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이 총재에게 국가를 맡길 수 없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 그는 지금대로 간다면 올 12월 대선은 필패라고 공공연히 외친다.

그는 벌써부터 민주당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노무현 후보를 겨냥했다. “지난 30여년 동안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훈련된 진보세력은 이제 여당의 특정후보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나라와 국민을 지키는 유일한 길은 한나라당이 중심이 되는 보수대연합밖에 없다.” 산산이 흩어져 있는 보수세력들이 결집해야만 노무현을 중심으로 뭉치고 있는 진보세력을 꺾고, 필패의 형국을 돌파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만이 보수대연합을 이끌 적임자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의 도전에 이회창 전 총재 쪽은 다급한 기색이 역력하다. 박근혜 의원의 탈당으로 이미 ‘대세론’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 전 총재는 2번에 걸친 대국민 기자회견을 통해 내키지 않던 집단지도체제를 받아들였다. 끝까지 고집했던 총재직도 이미 내던진 터였다. 그런데 이제 믿었던 최 의원이 등을 돌렸다. 그야말로 ‘최병렬, 너마저도!’의 형국이다. 비주류만 달래면 본선까지는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새로운 강자가 출현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이 총재 쪽도 최 의원에게 직접 비판의 칼끝을 겨누고 나섰다. 그의 약진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태도다. 이 총재 쪽 인사들은 “최 의원이 대표최고위원이 될 가능성이 없어지자 교묘히 대선후보 경선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비판했다. 창의 대항마로 자기 존재를 각인시키며 지방선거 뒤 ‘후보 교체론’이 돌출될 때 기회를 엿보자는 비열한 처사라는 것이다. 한나라당 주류 일각에서는 창 대세론을 주창하던 이회창 신봉자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그렇게 안면몰수할 수 있느냐며 그의 도덕성까지 들먹였다. 한 당직자는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어찌 됐든 이 총재는 간단찮은 복병을 만났다. 당장 텔레비전 토론회나 합동 정견발표회를 두고도 최 의원 쪽과 부딛치고 있다. 최 의원이 주장한 ‘원조 보수론’을 놓고도 치열한 연고권 다툼이 일 것으로 보인다. 이 총재는 그동안 보수성향 유권자의 지지표를 독식하고 온건한 개혁성향 유권자를 덧붙이는 양날개 전술, 이른바 ‘개혁적 보수’를 기치로 내세웠다. 그러나 최 의원 출마로 보수표 독식 전략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당장 TK 맹주를 자처하며 정통보수 깃발을 치켜든 김만제 의원이 최 의원 캠프에 가담한 이후 대구·경북도 술렁이고 있다. 이 전 총재는 대안 없는 영남, 그 가운데서도 대구·경북의 보수성향 유권자에게 가장 큰 기대를 걸어왔다. 민주당의 한 고위관계자도 “대안론과 대세론이 맞붙으면 대안론이 이기더라”며 “최 의원이 상당한 파괴력을 가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경선 흥행용'이란 시각도

물론 정치권 안팎에서는 최 의원의 출마를 ‘고도의 정치적 기획’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바닥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 총재의 지지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경선 흥행용으로 그를 들러리 세웠다는 것이다. 과연 최 의원은 이 전 총재와 ‘짜고 치는 경선판’을 벌이고 있을까. 최 의원은 발끈하고 있다. 발언의 진원지를 알고 있으며, 계속 이런 말이 나올 때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경고도 곁들이고 있다. 어쨌든 최 의원의 가세로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도 흥행작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 전 총재와 이부영 의원 사이에선 ‘보혁 논쟁’이, 최 의원과 이 전 총재 사이에선 ‘원조보수’ 논쟁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될 것이기 때문이다. 후발주자인 최 의원이 이 총재의 선명하지 못한 보수색채를 끝까지 물고늘어지며 보수세력의 대안으로 우뚝 설 경우 대선 판도가 또 한번 크게 요동칠 수 있다.

최익림 기자/ 한겨레 정치부 choi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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