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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색깔론 띄우는 ‘삼각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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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4-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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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와 이인제 고문·한나라당의 입맞춤… 흘리고 밀어주며 노무현 때리기 시도

사진/ 한나라당은 노무현 때리기로 이인제 고문을 지원하고 있다. 이상득 사무총장등 주요 당직자들은 연일 노고문에게 이념공세를 펼치고 있다. (이용호 기자)
<조선일보>와 이인제 고문, 그리고 한나라당. '친구'라는 영화제목이 얼핏 떠오르지만 바로 갖다붙이기는 망설여진다. 가운데에 민주당의 이 고문이 끼여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정치판의 기이한 흐름을 보면 새 해답이 나온다.

지난 3월29일 민주당 경남 사천지구당 간담회. 이인제 고문은 노무현 고문의 언론관을 문제삼았다. “정치는 운명적으로 언론에게 비판받는다. 언론의 비판이 싫으면 정치를 안하면 된다. 언론과 전쟁하겠다는 것이 얼마나 섬뜩한 생각인가. 언론을 적대시하는 것은 독재자가 아니면 공산주의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노 고문이 <조선일보>를 비판한 것을 두고 독재자와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었다. 노 고문을 비판하면서 은연중 ‘조선일보 편들기’에 나선 것이다.

같은 날 한나라당 김용학 부대변인의 논평. “대통령에 출마하겠다는 사람이 급진좌파 사상에 몰두해 페론식의 대중 영합적인 개혁을 시도하려 한다면 이는 국가와 국민을 파탄으로 몰고 갈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남경필 대변인은 하루 전날 낸 촌평에서 이인제 고문을 ‘버림받는 비련의 조연’으로 묘사하며 동정을 표시했다. 이인제 고문의 입을 빌려 연일 ‘노무현 때리기’를 시도하면서, 한편으론 위험에 빠진 ‘이인제 일병 구하기’에 나선 것이다. 언론에서도 한나라당의 이런 태도를 ‘이이제노(以李制盧 ·이인제를 이용해 노무현을 제압한다)’로 흥미롭게 표현했다.

사설과 논평으로 이인제 살리기


사진/ "김심"이 이인제 고문 쪽으로 기울었다고 보도한 <조선일보> 2001년 9월 10일치 기사.
이날 만든 3월30일치 <조선일보>의 사설을 보자. 제목이 ‘후보 검증 철저히 해야’로 돼 있지만 내용을 읽어보면 ‘노무현 검증 철저히 해야’라는 제목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이인제 고문의 주장을 그대로 옮기면서 노 고문에 대한 이념공세를 ‘후보검증’으로 포장했다.

<조선일보>가 사설을 통해 주장하고 나서면 한나라당에서 이를 논평으로 발표하는 식의 밀월성 관계는 널리 알려진 바다. 그런데 이인제 고문이 노 고문에게 색깔론과 음모론을 제기하면서 이 틀거리 속으로 편입되는 양상이 빚어지고 있다. 한나라당이 대선 패배의 최대 공적으로 꼽아온 이인제 고문을 지원하는 모양새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조선일보>는 25일치 사설(‘음모론’ 무엇이 진실인가)에서도 ‘김심개입설’에 대해 “청와대 쪽이 ‘근거 없는 말’이란 소극적 해명에서 나아가 왜 근거가 없는지를 적극적으로 밝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음모론에 대한 청와대 입증론을 폈다. 누군가가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소문을 퍼트렸는데 소문에 오른 당사자 쪽에 근거를 대라고 다그치는 꼴이다. ‘김심개입설’의 확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다름 아닌 <조선일보>와 그 신문의 편집인 김대중씨다. <조선일보>는 3월18일치 사설에서 “(이인제 대세론과 노무현 대안론이 경합하는 과정에서)이른바 ‘김심’의 향배가 끝까지 주목받을 것”이라며 느닷없이 ‘김심’을 들먹였다. 광주에서 노무현 고문의 1위를 ‘김심’과 연결지은 것이다. “그러니까 김심이 들어간 곳은 노무현이 이긴다 이겁니다. 일단 저희들이 보기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마음은 노무현에 가 있다고 보고, 왜 그것은 이회창씨를 흠집을 내거나 최소한 꺾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이거죠. 이인제 가지고는….” 김대중 편집인이 3월19일 문민정부 시절 장·차관모임인 ‘마포포럼’(이사장 박관용 한나라당 의원)에서 한 말이다. 우스운 것은 <조선일보>가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김심이 이인제 고문 쪽으로 기울었다고 보도했다는 점이다. “당내의 관심은 김대중 대통령이 이인제 최고위원을 차기 대선후보로 사실상 ‘점지’한 것은 아닌가 하는 쪽으로 모아지고 있다. ‘동교동 구파’의 뒤에는 바로 김 대통령이 있기 때문이다.” 2001년 9월10일치 기사다. 부럽다. 입맛과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대통령의 마음을 이쪽으로 붙였다가 저쪽으로 옮기게 할 수 있는 <조선일보>의 특별난 재주가. ‘이인제 후보 굳히기 시작됐나’라는 제목의 이 기사에 대해 노 고문 쪽은 당시 보도자료를 내어 “최근 <조선일보>의 ‘특정인 대세론’ 보도는 ‘특정인의 민주당 후보 만들기를 통한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 전략 음모’를 실행에 옮긴 것”이라며 “이것은 이회창의 영남 지지기반을 일거에 허물 수 있는 민주당 후보의 등장을 원천 봉쇄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격렬히 비난했다.

사진/ 노무현 고문의 광주경선 1위를 "김심"과 연결지은 <조선일보> 2002년 3월 18일치 사설.
사실 <조선일보>로선 노무현 돌풍이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처지다. 돌풍이 불기 전까지 노 고문에 대한 <조선일보>의 보도 태도는 철저한 무시작전이었다. 지난해 초엔 여론조사에서 노 고문을 아예 빼버렸고, 그 이후엔 이인제 대세론을 크게 보도했다. 제주경선 직전엔 판세를 ‘1강 2중’의 구도로 분석하며 이 고문의 우세를 기정사실로 몰아간 바 있다. 노 고문은 이런 <조선일보>에 대해 인터뷰까지 거절하면서 텔레비전 토론회 등에서 적대적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그런데 각종 여론조사에서 노 고문의 국민 지지율이 50%를 넘어서면서 고민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꿈에도 상정하기 싫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현실적 가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졌기 때문이다. 노무현 돌풍 초기에 노 고문에 대한 자극적인 보도를 삼가면서 관망세를 취한 것도 이런 당혹감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인제 고문이 색깔론과 음모론을 제기하며 노무현 고문을 걸고 넘어지자 <조선일보>도 공세적으로 태도를 돌변했다. 이 고문의 입을 빌리는 형태로 노 고문에 대한 비판성 기사를 여러 면에 걸쳐 자세하게 보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고문이 <조선일보>의 고민을 해결해준 셈이다. 이에 덩달아 한나라당도 열심히 노 고문을 공격하고 있다.

“노무현 검증 위해 전담팀 만들었다”

<조선일보>는 이인제 고문의 입을 빌려서만 노무현 고문을 검증하고 있을까. 왜 직접 검증을 위해 소매를 걷어붙이지 않는 것일까. 이건 순진한 착각이다. <조선일보>는 노 고문에 대한 공격거리를 찾기 위해 전담팀까지 구성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인제 고문의 공보특보로, <조선일보> 기자 출신인 김윤수 공보특보가 이 사실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공개적인 기자간담회 자리에서였다. “ 허허, 참. 내가 전에 (노 고문의) 전담팀장이었다. (<주간조선>이 재산문제를 보도한 데 대해 노 고문이 명예훼손으로 제소하자) <조선일보>가 전담팀을 짰고, 정치부 기자 2명이 뛰었다. 내가 그 팀장이었다. 그때 다 보도하지 않았다. 파일이 지금도 <조선일보> 자료부에 있을 것이다. 그때 노와 가까운 사람 녹취까지 했다.” 이와 관련해 노 고문 쪽은 “어떤 검증이든 문제 없다”며 해볼 테면 해보라는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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