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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인제의 도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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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4-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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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 이후 노리며 이념공세… 독자행보로 충청권 중심 보수입지 다지기

사진/ 이인제 고문이 이념공세의 수위를 갈수록 높이고 있다. 보수성향인 대구지역 '표심'의 향배가 주목된다.
이인제 고문이 음모론에 이어 이번엔 색깔론이라는 새로운 칼을 꺼내들었다. 색깔론은 군사독재정권과 냉전수구세력이 정적 제거를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온 것이다. ‘노무현 돌풍’의 맹렬한 기세에 몰린 이 고문의 처지가 그만큼 절박한 것일까.

이 고문은 경선포기를 고민하며 이틀 동안 자택에서 칩거하다 복귀한 지난 3월27일 이후 연일 노 고문에게 거친 이념공세를 폈다. 당의 좌경화를 저지하기 위해 나선다고 했고, ‘급진좌파’, ‘좌향좌’, ‘빨간색’ 따위의 자극적인 냉전적 용어들을 쏟아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주장이 색깔론과는 다르다고 항변했다. “요즘 내 주장을 색깔론이라고 얘기하는데, 김대중 대통령을 빨갱이라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 멀쩡한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빨갛게 칠하는 것이 색깔론이다.(노무현 고문은)유럽의 좌파도 생각 못하는 좌파생각을 지니고 있다. 흰 것을 희다 하고 빨간것을 빨갛다고 하는데 무슨 색깔론이냐(3월29일 경남 산청·합천지구당 간담회).” 노 고문이 멀쩡한 사람이 아니라 빨갛게 물든 사람이며, 따라서 빨갛다고 말했다고 그것이 곧 색깔론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역효과 나는 색깔론에 집착하는 까닭


이뿐만이 아니다. “국가보안법은 꼭 필요하다. 점진적으로 개정하면 된다. 철폐 좋아하는 사람들이 누구냐. 평양사람들이다.” 드디어 노 고문을 북한과 연결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색깔론의 약발은 먹히지 않았다. 노 고문에 대해 이념공세를 펼쳤음에도 이 고문은 경남과 전북에서 모두 노 고문에게 뒤졌다. <한겨레>의 여론조사 결과도 이 고문의 이념공세가 ‘후보검증을 위한 정책대결’이란 응답은 13.6%에 지나지 않았고, ‘구시대적 색깔논쟁’이라는 응답이 46.3%였다. 이 고문이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국민들은 색깔공세로 본다는 얘기다. 이념공세 이후 실시한 <한겨레> 여론조사에서도 노 고문은 53.8%의 지지를 얻어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30.8%)를 23%P나 앞섰다.

분단 이후 수십년간 맹위를 떨치던 색깔론은 언제부터인가 그 위력이 현저히 약화됐다. 칼날이 무뎌진 것이다. 최근에도 색깔론이 위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것은 지역감정과 결합했을 때만 그랬다. 안택수·이주영·권오을·김용갑 의원 등 영남에 지역구를 둔 한나라당 의원들이 호남의 김대중 대통령에게 끊임없이 색깔론 공세를 편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 고문에 대한 색깔공세엔 지역감정이 결합할 수가 없었다. 노 고문이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영남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고문은 이 점을 간과했다.

이 지점에서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민주당 내 경선에서 색깔공세를 펴는 것은 역효과를 낳게 마련이다. 민주당원들은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30여년의 용공시비를 지겹도록 봐왔기 때문이다. 당장 이 고문을 지지해온 동교동계 의원들도 색깔론에는 고개를 젓는다. 경남과 전북지역 경선에서도 이 고문이 색깔공세로 득을 보지 못했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그가 전북에서 3위지만 적은 표차로 나름대로 선전한 것도 색깔론이 먹혔다기보다 정동영 고문의 선전에 따른 노 고문의 표분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왜 이 고문은 당내경선에서 표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이념공세를 이어가는 것일까. “민심을 봐야 한다. 당내만 보면 안 된다.” 이 고문과 가까운 충청권의 한 의원은 그 이유를 ‘당외용’으로 설명했다. 이념공세가 경선 이후까지를 겨냥한 중장기적 포석임을 읽을 수 있다. 국민신당 시절부터 이 고문을 보좌해온 한 측근의 얘기를 들어보자. “이 고문이 이념논쟁을 제기한 것은 지방선거 이후까지도 보자는 것이다.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패할 경우 책임론이 대두하면서 판이 어떻게 짜일지 모른다. 중도개혁적인 노선을 분명히 하고 기회를 기다리다 보면 반드시 이 고문에게 때가 온다.” 노 고문에 대한 흠집내기를 통해 지방선거 이후 역동적으로 펼쳐질 정치지형 변화에 대비하자는 얘기다.

정치상황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

사진/ 전북지역 경선 직전 대회장인 익산실내체육관 입구에서 악수하는 노무현 고문과 이인제 고문.
이 고문의 또 다른 측근도 판을 길게 볼 것을 주문했다. “이념공세엔 득실이 있다. 어차피 도박일 수밖에 없다. 대선까지의 시간은 길다. 보수언론들도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정치판은 소용돌이치게 돼 있다.” 노 고문에 대한 이념공세를 통해 보수세력과 이를 지원하는 보수언론, 특히 노 고문과 적대적 관계인 조선일보의 지원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고문의 이념공세엔 개혁열망을 반영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노무현 돌풍’에 대한 냉전·보수세력의 대반격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이 고문도 측근들과의 회의에서 “대통령이 되고 안 되고는 중요하지 않다. 앞으로 정책과 비전으로 승부하겠다”고 말했다고 원유철 의원이 전했다. 김윤수 공보특보도 “경선에서의 승패는 이미 떠났다”고 말했다. 경선의 승패를 초월했고, 대통령 당선 여부도 중요하지 않다면 무엇을 도모하겠다는 것일까. “탈당은 안한다. 노무현 고문이 기존 정치판을 노선과 정책에 따라 개편하겠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끼리 가서 하면 내가 민주당을 지킬 것이다. 나는 중도개혁이고, 노 후보는 급진좌파인데 노선을 같이할 수 있겠느냐?” 경선에서 패할 경우 탈당할 것이냐는 기자들의 물음에 이 고문은 이렇게 답했다. ‘제2의 경선불복’이라는 낙인이 찍힐 수 있는 경선포기나 탈당은 피하겠지만 노 고문과 같은 길을 걷지도 않겠다는 것이다.

그가 노 고문이 후보가 됐을 경우 같은 길을 걷지도 않고, 탈당도 하지 않겠다는 얘기는 모순된다. 결국 탈당이나 경선불복의 형식은 최대한 피하려 노력하면서도 노 고문과 이념과 노선이 다르다는 명분을 내걸고 독자적인 행보에 나설 수도 있음을 시사한 대목으로 해석된다. 후보가 결정된 이후에도 이 고문이 노 고문에 대한 이념시비를 지속하면서 당내에서 ‘근거지 투쟁’을 벌일 경우 민주당은 새로운 분란에 휩싸일 가능성도 있다. 이 고문이 독자행보를 취할 경우 일단 그 기반은 충청권과 보수세력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경선불복 낙인 피하며 노무현과 '딴 길'

박병석 의원(대전 서갑)은 “충청권에선 이 고문에 대한 동정여론이 아주 높다. 이 고문이 불쌍하다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충청권뿐만이 아니라 수도권에 사는 충청도 사람들의 분위기도 비슷하다”라고 충청권 민심을 전했다. 이 고문에 대한 충청권의 이런 정서는 이 고문의 독자행보를 재촉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 경우 세력이 위축될 대로 위축된 자민련과 이 고문이 연대할 가능성을 점칠 수 있다.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이 고문의 이념공세를 거들고 나선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이 고문의 김윤수 공보특보는 이 고문과 JP가 결합하는 ‘충청권 신당’의 탄생 가능성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상황을 봐서 그럴 수도 있다. 그때 가서 봐야 한다”고 여지를 남겼다.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한 시나리오라는 얘기다.

이 고문은 일단 후반전을 남긴 국민경선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점퍼차림에 민박을 하며 ‘단기필마’로 뛰고 있는 선거운동방식에서 그의 단단한 결심이 엿보인다. 경선본부도 해체했고, 의원들 세몰이도 중단했다. 초반과 달리 빈농의 아들임을 유난히 강조하는 유세방식도 국민신당시절의 다부진 선거운동을 닮았다. 그의 한 측근은 “맨주먹으로 500만표를 일궜던 국민신당 시절로 돌아가 다시 국민을 상대로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여기엔 그럴 수밖에 없는 속사정도 있다. 노무현 돌풍으로 이 고문의 지지도가 꺾이면서 지지의원들의 이탈움직임이 가속화됐다. 자금도 달렸다. 이런 상황에선 경선본부를 계속 유지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이 고문은 경선 후반전에도 노 고문에 대한 네가티브 이념공세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다. 그는 4월1일 라디오프로그램에 출연해 “만약 좌파성향의 후보가 당내 후보가 되면 나라의 장래는 어둡게 된다. 유럽 좌파 정당도 모두 우향우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중인기 영합적인 나라를 만들면 국가가 부도나고 망한다”라고 주장하며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국민의 눈이 집중되는 국민경선을 노 고문에 대한 이념포화의 장으로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의도다. 이 고문쪽은 보수성향이 강한 대구(4월5일) 경선을 반전의 기회로 삼겠다고 벼르고 있다. 대구에서 박빙의 승부를 벌여 이어지는 인천(6일)과 경북(7일)에서도 선방한 이후 수도권에서 최종 승부를 판가름내겠다는 것이다.

이념포화에도 표심은 멀어져만 가네

사진/ 이인제 고문은 가시발길을 이념공세로 뚫을 건가. 이인제 고문이 전북지역 선거인단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고문의 갈길이 그리 평탄한 것만은 아니다. 충북(4월13일)을 제외하면 이 고문에게 특별히 우호적인 지역을 꼽기가 어렵다. 이 고문은 광주에 이어 ‘호남표심’의 또다른 잣대인 전북에서도 3위에 그쳐 더욱 어려운 처지에 몰리게 됐다. 표차는 적었다지만 어쨌든 정동영 후보에게도 밀리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물론 아직까지도 종합순위 1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2위인 노 고문과의 표차는 399표로 줄어들었다. 성적표의 내용을 뜯어보면 1위의 의미는 더욱 퇴색한다. 이 고문은 지역연고가 있는 충남과 대전에서만 1위를 차지했다. 반면 노 고문은 울산·광주·강원·경남·전북 등 8개 지역 가운데 5곳에서 1위를 함으로써 지역별로 고른 득표력을 확인시켰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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