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우종 기자
“여의도 당사에서 단배식(신년행사)을 마치고 (서울) 동작구에 있는 현충원으로 이동하려고 했다. 현충원 참배에 이어 (경남 김해) 봉하마을로 가야 하는 일정이 빠듯했다. 한 당직자가 현충원 일정부터는 힘들지 않겠느냐는 뜻을 전했다. 일종의 배려인 셈이었다. 그때 한 다선 의원이 나서서 그렇게 하지 말자, 힘들어도 같이 가자고 했다. 장애인들은 어떤 상황을 원할까?” 정치에서 일정과 동선은 메시지다. 이날 최 교수는 현충원 참배에 이어 봉하마을 방문까지 모든 일정을 함께 소화했다. 최 교수는 “민주당 사람들이 현충원 계단을 걸어 오르는 대신 나와 함께 경사로로 이동하는 순간 ‘아, 내가 선택을 잘했다’는 생각에 뭉클했다”고 했다. 장애 차별은 변한 게 없는 것처럼 들린다. 10년 전 휠체어를 탈 때 불편한 몸으로 왜 나왔느냐는 말을 직접 듣기도 했다. 요즘은 그 정도로 노골적인 시선은 없다. 조금씩 나아지는 것은 맞다. 단체활동으로 그런 변화한 성과를 얻은 경험도 있을 법한데. 우리 센터는 인식개선 교육을 하는 곳이다. 갈 길이 멀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깨보려고 거리로 나서고 고용노동부·보건복지부 등 정부 부처를 돌고 돌았지만, 거기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차별을 시정하고 제도로 보완하는 것은 결국 국회가 입법으로 마무리해야 했다. 국회에서. 시행착오 없이 사회에 복귀하도록 최 교수는 “2018년부터 시행된 직장 내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에 들어간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 의무조항이 (단체활동으로 이뤄낸) 지난 10년의 성과라면 성과”라고 했다. 이 법에 따르면 1년에 한 번씩 의무적으로 직장에선 장애인 근로자 채용이 확대되도록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을 해야 한다. 이어 최 교수는 “법이 통과되는 것을 보면서 ‘아, 이래서 정치를 하는구나, 당사자들이 먼저 나서야 하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국회에 들어가면 이제 장애 인식 교육이 필요 없을 만큼 인식의 전환을 가지고 올 법과 제도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똑 부러지게 본인이 하고 싶은 정치를 얘기하지만 원래 자기 삶에서 정치를 하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15년 전 교통사고로 척수장애를 얻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때는 사회에 복귀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 금방일 줄 알았다. 그런데 5년이 흘렀다. “북유럽처럼 장애인과 관련된 복지체계가 잘된 곳은 복귀까지 보통 반년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보다 열 배 걸린 셈”이라며 “다른 사람들은 앞으로 나와 같은 시행착오 없이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했다. 본인의 삶과 정치가 맞닿아 있는 느낌이다. 민주당에서 정치를 해보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마침 엄마가 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되려고 결심한 순간부터 병원에 가서 검진받는 장면 하나하나까지 모두 절망의 연속이었다. ‘부모가 모두 장애가 있는데 왜 굳이 아이까지 (낳으려 하냐)’라는 시선을 받으며 병원 문을 들어섰지만, 현실에서는 진료받으려고 해도 올라가기 불가능한 산부인과 진료대, 휠체어가 들어가기도 버거운 초음파 검사실, 휠체어에 맞게 높낮이가 조절되지 않아 몇 사람이 도와줘야 겨우 찍을 수 있는 엑스레이가 놓여 있다. 사소해 보이는 이런 장벽 하나가 일반의 시각에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겠지만 우리는 그 벽이 너무 높고 단단하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으로 많은 이가 포기한다. 나처럼 장애를 가진 여성도 엄마로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만드는 게 시작이었으면 좋겠다. 알려진 대로 그는 무용수였다. 기억나는 순간을 물었다. “나는 주연은 아니었다”고 했다. <백조의 호수>에서 백조 여러 마리의 군무가 펼쳐질 때 그 무리의 리더를 맡았다. 창작발레 <콩쥐팥쥐>에서도 콩쥐·팥쥐가 아니라 콩쥐가 난관을 헤치도록 돕는 조력자였다. 발레단에서 동료· 후배를 돕고 가르치고, 그러다가 스물다섯 살 때 교통사고가 났다. 5년 만에 사회에 복귀했을 때 토슈즈를 신는 대신 휠체어에 앉았다. 팔을 움직이는 것조차 버겁다. 그런 그가 사회복지학을 전공해 박사 학위를 따고 교수가 됐다. “걷는 것 말고는 다 잘할 자신이 있다” 지난 연말 패스트트랙(신속 처리 안건) 국면에서 여야가 충돌했다. 현실정치로 들어가면 만만치 않을 텐데. 지인이 건넨 걱정 중에 정치판은 험하다,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있다. 그런 걱정도 편견이다. 그런 말 자체가 정치 참여를 어렵게 한다.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감성팔이’ 아니냐는 말도 들었다. 누군가가 굳이 그런 말을 전달하면서 오히려 그걸 공론화하고 깎아내리려 했다. 그래서 말했다. 감성팔이라도 괜찮다, 일할 수 있다면, 그래서 결과를 손에 쥘 수 있다면. 최 교수는 요즘 “국민이 허락해주신다면” 휠체어를 탄 채 가뿐하게 아이를 안고 국회의사당에 들어서는 자기 모습을 상상한다. “걷는 것 말고는 다 잘할 자신이 있다”면서 웃는다. “나를 보면서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사람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밤 10시가 다 돼 최 교수로부터 문자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 “예민한 내용이 있을까 걱정된다”고 했다. 영입된 인물들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관련해 구설에 오른 것이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럽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여의도 정치의 문법을 배워가고 있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