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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불복 vs 불복

김경수 경남도지사 구속 뒤 야당은 대선 불복, 여당은 재판 불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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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2-01 11:26 수정 : 2019-02-01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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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수 경남도지사가 1월30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구치소 호송버스에 오르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① “일각에서는 17대 대선 결과에 승복하지 못한 ○○ ○○ 세력이 집회를 주도한다는 분석도 나왔다. ○○ ○○ 세력이 건강을 염려하는 순수한 국민들의 뜻에 편승해 대통령과 정권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것이었다. 정치세력들이 집회에 개입한 것은 확실해 보였다.”

②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 사건을 박근혜 대통령과 연관시켜 대선을 무효화하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민주당 차원에서 ○○ ○○하는 건지 입장을 밝혀달라.”

③ (야당에서 ○○ ○○ 프레임을 걸고 있다.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번 사법적 결과에 대해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기에, 사법적 결과에 기초한 ○○ ○○ 프레임은 단연코 반대한다. 동의할 수 없다. 아울러 이번 사법부 판단을 100%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 ○○ 프레임의 명분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①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의 한 대목이다. ②는 이정현 박근혜 정부 청와대 홍보수석(현 무소속 의원)이 2013년 7월15일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과 관련한 야당 의원들의 공세에 대해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③은 김경수 경남도지사에 대한 법원의 선고 뒤 열린 더불어민주당 긴급 최고위원회 결과를 전하는 홍익표 당 수석대변인이 기자의 질문에 답한 말이다. 발언의 취지와 맥락, 경중은 각각 다르지만 ○○ ○○에 들어갈 말은 우리 정치에서 매번 반복되는 비극적 프레임인 ‘대선 불복’이다. 대선 불복 프레임은 블랙홀이다. 야당이 정권의 정당성을 겨냥하면 집권세력은 이를 “대선에 불복하는 것이냐”고 맞받아친다. 여야 지지층이 결집하면서 모든 정치·사회 현안은 이 프레임으로 빨려 들어간다.

문재인 대통령 겨누는 야당


법원이 1월31일 2017년 대선 당시 ‘드루킹’ 김동원 등과 공모해 포털 사이트의 댓글 순위를 조작한 혐의(형법상 컴퓨터등장애업무방해)로 김경수 지사에게 징역 2년을 선고(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는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 선고)하고 법정 구속하며 정치권이 대선 불복이라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갈 조짐이다. 가뜩이나 주요 현안을 둘러싸고 갈등 중이던 여야는 더욱 ‘강대강’으로 대치할 전망이다.

법원의 선고 뒤 보수 야당은 바로 청와대를 정조준했다. “대선 결과의 정당성에 대한 국민적인 의혹이 거세지고 있다. 이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입장 표명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또한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후보 당시 최측근인 김경수 경남도지사의 댓글 조작 개입을 인지하고 관여했는지 여부가 중요한 쟁점이다. 이에 대한 사법적 판단도 조속히 진행돼야 한다.”(윤영석 자유한국당 수석대변인) “‘거짓덩어리’ 김 지사는 부끄러움을 알고 사퇴하라. 이제 시작이다. 김경수의 ‘진짜 배후’를 밝혀라.”(김정화 바른미래당 대변인) 1월31일 열린 자유한국당의 긴급의원총회에선 ‘대통령 수사’까지 언급됐다.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인 여상규 의원은 “김 지사가 문재인 대통령을 위해 대선에서 댓글 조작에 관여한 것이 사실로 밝혀졌다”며 “대통령 재임 중에 소추는 못하지만 수사는 할 수 있다는 학설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자유한국당은 청와대 앞 분수대로 자리를 옮겨 의원총회를 열고 청와대를 거듭 몰아붙였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충격과 당혹감에 휩싸인 민주당은 “양승태 사법 농단 세력의 보복성 재판”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1월30일 열린 민주당 긴급 최고위원회는 박주민 최고위원이 위원장을 맡는 ‘사법 농단 세력 및 적폐청산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고 사법 농단 관여 판사들의 탄핵 등에 힘을 쏟겠다며 정면 대응을 예고했다. 박주민 위원은 “(1심 재판부인) 성창호 재판장은 양승태 비서실 판사를 했던 상당한 측근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사법 농단으로 구속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공소장에도 관여된 부분이 적시돼 있다”고 밝혔다. 성창호 부장판사는 2012년 2월부터 2년 동안 사법 농단 의혹을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1기 비서실 판사로 근무했고, 최근 검찰의 사법 농단 수사 때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야당의 공세에도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 홍영표 원내대표는 1월31일 정책조정회의에서 “합리적인 법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판결이라 생각한다”며 “양승태 적폐 사단이 벌이는 재판 농단을 빌미 삼아 정치적 이익을 도모하고, 나아가 온 국민이 촛불로 이뤄낸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부정하고, 대선 결과를 부정하는 시도에는 단호히 맞설 것이라고 경고한다”고 밝혔다.

“양승태 키즈의 보복” 반발

민주당이 집권당으로서 법원의 재판 결과를 부정하고 재판장 이력을 문제 삼는 부담을 감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경수 지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이었고, 두 차례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핵심 인사로 자리매김한 여권의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다. 대선 캠프에서 핵심 역할을 맡은 김경수 지사의 구속을 고리로 야당이 청와대를 정조준하는 상황에서 물러설 곳이 없게 된 것이다. 선고 전부터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으로 상징되는 사법 농단 수사에 대한 법원 내 반발 기류가 재판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도 여당이 ‘배수의 진’을 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드루킹의 진술이 오락가락했음에도 재판부가 이를 100% 인정했고, 1995년 컴퓨터등장애업무방해죄가 만들어진 뒤 이 죄명의 단일 혐의로 실형이 선고된 것은 김 지사가 처음이라는 사실 등은 민주당에 의혹을 확신으로 바꾸는 근거가 됐다. 민주당의 ‘재판 불복’ 프레임에는 ‘기득권 세력의 반격에 물러설 수 없다’라는 의중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 국가기관이 인터넷 여론을 조직적으로 조작하고 특정 정치인을 비방한 것과 민간인인 드루킹이 인터넷 여론을 조작하려 한 것은 분명 그 무게가 다르다. 문제는 역대 정권에서 ‘대선 불복’이 불거질 때마다 우리 사회가 반으로 갈려 심각한 갈등으로 치닫는 것이다. 역대 정권에서 여야는 대선 불복 프레임으로 지지층을 결집하기도 했다. 당장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1월30일 올라온 ‘시민의 이름으로, 이번 김경수 지사 재판에 관련된 법원 판사 전원의 사퇴를 명령합니다’라는 청원은 이틀 만에 20만 명 넘는 사람들이 동의했다. 반대로 재판부를 지지한다거나, 김경수 지사의 도지사직 사퇴를 촉구하는 청원도 속속 올라오고 있다. 선거제도 개혁, 탄력근로제 등을 논의해야 할 2월 임시국회는 여야 갈등의 늪에 빠질 것으로 보인다.

1월28~30일 전국 1505명에게 진행돼 1월31일 발표된 리얼미터 여론조사 결과(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2.5%포인트)를 보면 민주당 지지율은 한 주 전보다 0.9%포인트 하락한 37.8%로 3주째 내림세를 보였고, 자유한국당은 3주째 오름세를 보이며 28.5%로 집계됐다. 문재인 정부 출범 뒤 리얼미터 조사에서 두 당의 지지율 격차는 처음으로 한 자릿수(9.3%)로 좁혀졌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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