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악의 축’ 발언에 한국 정부 허탈…엔론 사태와 중간선거 노린 국내 정치용?
“부시가 DJ를 포기한 것 같다. 적어도 대북정책에 관한 한….”
한국 정부 외교안보팀의 한 고위관계자가 허탈해하며 털어놓은 말이다. 그는 2월20일 김대중-부시 정상회담을 누구보다도 손꼽아온 터였다. 부시의 말 한마디가 귀했기 때문이다. 남북관계가 재도약을 하느냐 마느냐가 그의 입에 달려 있다는 얘기다. 서글픈 현실이지만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의 발언 수위에 따라 한반도의 긴장지수는 널뛰기를 해왔다. 외교안보팀은 애초부터 부시에게서 많은 것을 얻어낼 요량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부시가 서울에 와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향해 ‘독재자’라느니,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는 등 북한을 다시 심하게 자극하는 발언만이라도 안 하면 이번 한-미정상회담은 성공작이라 평가할 작정이었다. 정부는 실제 다양한 외교 채널을 통해 부시 서울방문을 대비한 그의 발언 수위 조율에 나서기까지 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미 국무부 관계자들은 부시가 한국에 와서 말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분명히 약속했다”고 털어놓았다.
‘레임덕 DJ’의 뒤통수를 쳐
하지만 정부의 실낱같은 기대는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 부시는 1월29일 첫 국정연설에서 메가톤급 펀치를 한반도에 날렸다. 그는 북한이 이라크, 이란과 함께 ‘악의 한축’을 이루고 있다고 규정했다. 부시의 핵심 참모인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북한은 세계 제일의 탄도미사일 장사꾼으로 구매자의 의도가 아무리 악하더라도 어느 누구와도 거래를 트고 있다”며 “전세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을 저지하기 위해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부시의 대북시각이 누그러지기는커녕 더 날이 서 있음을 보여준다. 김대중 대통령은 1월14일 새해 기자회견에서 ‘내달 미국 부시 대통령의 방한 때 어떤 말을 나눌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 “우리는 미국이 북한과 대화하기로 결정한 이상 북한의 체면을 세워주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갖는다”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을 향해 은근히 말로만 대화한다고 떠벌리지 말고 실제로 대화를 위한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는 가시 돋친 충고를 던진 셈이다. 북한의 체면을 살려주는 방법과 관련해,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미국이 지금보다 좀더 고위급 인사를 북쪽과의 대화 상대자로 내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점과 부시가 북한의 지도자와 체제에 대해 비하발언 용어를 자제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대통령의 두 가지 바람은 부시에 의해 보기좋게 퇴짜를 맞은 셈이 됐다. 토머스 허바드 주한미대사도 1월31일 “미국적 접근과 아시아적 접근방식은 차이가 있다. 실용적이고 직설적으로 대화하는 것이 미국적 사고방식이며, 여기에 체면을 살리는 방식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정부 관계자는 “DJ가 레임덕 대통령이라고 해도 부시나 허바드의 표현은 좀 심했다”면서 “이는 DJ를 앞에 두고 뒤통수를 치는 행위와 다름없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한-미정상회담에서도 미국이 이런 기본 시각을 바꾸지 않는 한 어떤 성과를 기대하기는 무리”라고 덧붙였다. 외교 소식통들에 따르면 부시는 그간 DJ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라는 점, 그가 평생 동안 몸바쳐온 민주화 운동 전력 등을 감안해 그나마 발언 수위를 낮춰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김 대통령의 임기가 얼마 안 남은데다가, 대북정책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가 높지 않다는 점 등도 부시가 거침없이 북한 때리기에 나설 수 있는 배경이라고 소식통들은 말한다. 게다가 부시 행정부는 최근 워싱턴을 방문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강도높게 비난한 대목도 많이 참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무작정 항복하라는 메시지”
부시의 강경발언 속셈을 두고 말들이 많다. 한쪽에선 부시의 잇단 대북 경고가 대량파괴무기 위협과 관련한 ‘부시독트린’의 기본원칙을 거듭 밝힌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라크와 함께 북한을 다음 테러전의 목표물로 삼기 위한 명분 축적용 발언이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일단 부시가 테러전의 총부리를 한반도로 돌릴 가능성은 높아보이지 않는다. 이는 부시의 후속 발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부시 대통령은 2월1일 백악관에서 압둘라 요르단 국왕을 만나는 자리에서 “북한이 우리의 제안에 귀기울일 것을 분명히 희망한다”며 “그 제안은 그들이 한반도에서 평화적 의사를 명백하게 보여주기 위해 재래식 무기를 뒤로 물리고 동시에 무기를 수출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요구는 전임 클린턴 정권 때부터 보수 공화당 인사들이 즐겨 해온 주장이다. 3만7천명의 주한미군들에 가장 위협이 되고 있는 최전방 배치 북한 군인과 무기들을 후방으로 물리라는 것과 미사일 등 각종 대량살상무기와 기술을 중동국가에 더이상 팔지 말라는 경고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의 이런 선행조처가 있은 뒤) 대화에 들어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 행정부가 그간 누차 강조해온 전제조건 없는 북한과의 대화라는 주장이 말장난에 지나지 않음을 확연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미국은 협상의 기본원칙, 즉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일 경우 그 대가로 무엇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한 전문가는 이를 두고 “미국의 대북정책을 뜯어보면 북한에 대해 무작정 무릎 꿇고 항복하라는 메시지 이상이 담겨 있지 않다”고 평가한다. 미 행정부가 앞으로도 어떤 당근을 제시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미국은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데리고 오기 위한 어떤 양보안도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허바드 미 대사의 최근 발언이다. 북한이 스스로 무장해제하지 않는 한 미국의 북한 흔들기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대체 부시의 속셈은 뭘까.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 톡톡한 재미를 봤다. 그러던 중 이른바 부시 행정부의 정경유착 치부를 생생히 보여주는 ‘엔론 스캔들’이라는 복병이 출현했다. 부시를 포함한 측근들의 정치생명까지 끊어놓을 수 있는 폭발성을 지닌 사건이 터진 셈이다. 재선 대통령이 되느냐 마느냐의 분수령이 될 수 있는 11월 중간선거가 닥치면서 부시로서는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부시는 이미 자신감이 붙어 있으므로 자신에게 역대 최고의 지지율을 안겨다준 또다른 테러와의 전쟁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런 배경으로 부시의 이번 강경발언도 ‘국내 정치용’이라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부시는 이라크만 악의 축으로 지목하기에는 부담이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중동나라들과의 관계를 감안하면 북한 끼워넣기는 불가피했던 것이다. 이라크만 표적으로 삼을 경우 중동 다른 나라의 거센 반발이 불을 보듯 뻔하다. 더구나 부시 정부는 전례없는 노골적이고 일방적인 친이스라엘 정책을 펴고 있다. 갑자기 이란을 악의 축을 이루는 세 나라 속에 끼워넣은 것도 최근 발각된 팔레스타인으로 가던 무기 실은 선박의 출발지가 이란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정부 외교안보팀 관계자의 설명이다. 미국은 지금까지 이라크 못지않게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개발해온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면서 이라크 등 다른 중동나라들에 대해서는 철퇴를 가하는 불평등, 이중외교를 펼치고 있다는 비난을 사왔다. 미 행정부로서는 이라크와 동일하게 북한을 압박함으로써 중동국가들만 못살게 군다는 비난을 피하려는 속셈이라는 얘기다.
미 국내 전문가들도 비난 퍼부어
하지만 부시의 이런 노림수가 성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유럽 등 우방국뿐 아니라 미 국내 전문가들도 부시의 이런 이중적 태도에 비난을 퍼붓고 있다.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는 2월1일 에 나와 부시가 이란, 이라크, 북한을 싸잡아 취급한 것은 ‘커다란 실수’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행정부를 떠날 때 (북한의) 미사일 기술 수출 중단에 대해 검증할 수 있는 협정의 체결 가능성도 탁자 위에 남겨놓았는데 그것을 멀리 한다면 실수”라고 경고했다. 데이비드 스타인버그 조지타운대학 아시아연구소장도 부시의 발언은 “이미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북-미대화를 더 어렵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미국의 강력한 우방인 한국의 대내외 정책까지 훼손했다”며 “이들 용어는 대화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꼬집었다.
부시의 시각을 바꿔놓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한반도 문제에 대해 비교적 균형잡힌 접근을 하고 있다는 미 국무부조차 백악관 국방성 중앙정보국의 강경파에 밀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분위기 탓에 이제 막 가속도가 붙을 것 같던 남북관계도 당분간 안개 속을 헤맬 것으로 예상된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사진/ 부시의 첫 국정연설 장면. 그는 국민들의 정작 궁금해하는 '엔론 스캔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GAMMA)
하지만 정부의 실낱같은 기대는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 부시는 1월29일 첫 국정연설에서 메가톤급 펀치를 한반도에 날렸다. 그는 북한이 이라크, 이란과 함께 ‘악의 한축’을 이루고 있다고 규정했다. 부시의 핵심 참모인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북한은 세계 제일의 탄도미사일 장사꾼으로 구매자의 의도가 아무리 악하더라도 어느 누구와도 거래를 트고 있다”며 “전세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을 저지하기 위해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부시의 대북시각이 누그러지기는커녕 더 날이 서 있음을 보여준다. 김대중 대통령은 1월14일 새해 기자회견에서 ‘내달 미국 부시 대통령의 방한 때 어떤 말을 나눌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 “우리는 미국이 북한과 대화하기로 결정한 이상 북한의 체면을 세워주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갖는다”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을 향해 은근히 말로만 대화한다고 떠벌리지 말고 실제로 대화를 위한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는 가시 돋친 충고를 던진 셈이다. 북한의 체면을 살려주는 방법과 관련해,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미국이 지금보다 좀더 고위급 인사를 북쪽과의 대화 상대자로 내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점과 부시가 북한의 지도자와 체제에 대해 비하발언 용어를 자제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대통령의 두 가지 바람은 부시에 의해 보기좋게 퇴짜를 맞은 셈이 됐다. 토머스 허바드 주한미대사도 1월31일 “미국적 접근과 아시아적 접근방식은 차이가 있다. 실용적이고 직설적으로 대화하는 것이 미국적 사고방식이며, 여기에 체면을 살리는 방식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정부 관계자는 “DJ가 레임덕 대통령이라고 해도 부시나 허바드의 표현은 좀 심했다”면서 “이는 DJ를 앞에 두고 뒤통수를 치는 행위와 다름없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한-미정상회담에서도 미국이 이런 기본 시각을 바꾸지 않는 한 어떤 성과를 기대하기는 무리”라고 덧붙였다. 외교 소식통들에 따르면 부시는 그간 DJ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라는 점, 그가 평생 동안 몸바쳐온 민주화 운동 전력 등을 감안해 그나마 발언 수위를 낮춰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김 대통령의 임기가 얼마 안 남은데다가, 대북정책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가 높지 않다는 점 등도 부시가 거침없이 북한 때리기에 나설 수 있는 배경이라고 소식통들은 말한다. 게다가 부시 행정부는 최근 워싱턴을 방문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강도높게 비난한 대목도 많이 참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무작정 항복하라는 메시지”

사진/ 부시 발언으로 바짝 긴장해 있는 북한군. 과거와 달리 벼랑 긑 전술을 펼 것 같지는 않다.(한겨레 곽윤섭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