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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돌아온 해결사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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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2-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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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정책특보로 여섯번째 부름 받아… 논란 속에 DJ 방패막이 역할 기대

사진/ 박지원(오른쪽) 정책특보와 임동원 통일특보가 이야기를 나누며 환하게 웃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1·29 개각 이틀 뒤인 31일 오전 열린 국무회의. 관례에 따라 새로 임명된 장관과 수석비서관들의 신임인사가 끝나자 갑자기 김대중 대통령이 물었다. “박지원 특보는 왜 참석 안 했나?” 잠시 국무회의장엔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 “대통령 특보는 국무회의 참석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작은 소리라 잘 들리지 않았다. 그때 첫 여성 청와대 대변인으로 임명된 박선숙 공보수석이 마이크를 잡았다. “박지원 특보는 국무회의 참석대상이 아닙니다.” 박 수석의 설명으로 국무회의장은 어색한 분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 사례는 김대중 대통령이 박지원 신임 대통령 정책특보를 어느 정도 신임하는지를 드러내는 단적인 예로 꼽힌다. 그렇지 않아도 박 특보에게 ‘실세’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판에, 그 자리에 참석한 장관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을지는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정책수석 낙마 3개월만에 화려한 복귀


박지원 특보는 당선자 시절까지 포함해 김대중 대통령에게서 6번이나 임명장을 받았다. 97년 대선 승리 직후 그는 대통령인수위 인수위원, 그리고 인수위 대변인으로 일했다. ‘국민의 정부’ 출범 뒤엔 청와대 공보수석, 문화관광부 장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그리고 이번에 대통령 정책특보라는 직책이 적힌 임명장을 받았다. 이는 아마 전무후무한 기록일 것이라는 게 정부 안팎의 얘기다.

박지원 특보는 개각 다음날인 1월30일 아침 청와대 기자실을 찾아와 이런 농담을 던졌다. “이한동 총리는 나에게 고맙다고 해야 한다.” 이번 인사가 국민들에게 신선하게 비쳐지지 않는 핵심 요인이 이한동 총리 유임인데, 자신의 복귀로 여론의 화살이 온통 자신에게 쏠리고 이 총리는 그런 대로 넘어갈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의 말대로 이번 개각이 여론의 거센 비판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총리 유임과 박 특보 복귀, 그중에서도 ‘박지원의 화려한 복귀’ 탓이 크다. 김 대통령이 이런 여론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굳이 인사쇄신 여론에 밀려 청와대를 나간 사람을 불과 두달여 만에 다시 불러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김 대통령은 왜 그렇게 박지원을 곁에 두고 싶어하는 것일까.

박 수석의 가장 큰 장점은 부지런함이다. 그는 야당 대변인 시절, 전날 밤에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매일 아침 일찍 김대중 당시 야당 총재의 집을 빠지지 않고 방문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또 복잡한 사안을 간단하게 정리해내고, 일을 추진하는 데서 좌고우면하지 않는다. 청와대의 한 수석비서관은 “복잡한 문제들에서 핵심을 뽑아내 이해하는 능력은 감탄할 만하다”고 말했다. 또 일단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하면 화끈하게 밀어붙인다. 청와대의 한 인사는 “누구도 손대기 싫어하는 일, 가령 부처간 대립이 심하거나 쉽게 결론나지 않을 사안이라도 박 수석은 피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게 군사독재 시절 의문사의 진실을 파헤치는 의문사진상규명위 활동이다. 그는 지난해 3월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으로 복귀한 직후 국정원장, 기무사령관 등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의문사진상규명위의 활동에 자료 협조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최종길 서울대 교수 사건 등의 진실이 부분적으로나마 밝혀질 수 있었던 데엔 국정원 등의 자료 협조 덕이 컸다.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실 관계자는 “박 특보 아니면 누가 국정원장이나 기무사령관에게 그런 요청을 하겠느냐”며 “박 특보가 청와대 비서실에서 나간 뒤 비서실의 긴장감이 크게 떨어지고 조직의 이완현상이 심해졌다”고 말했다.

자진 사표에 미안함… DJ 의중 파악 도통

사진/ 빅지원 없는 청와대는 외롭다? 지난 1월31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를 앞두고 김대중 대통령이 비서실장, 특보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그러나 이런 부지런함, 추진력만으로 김 대통령이 그를 다시 쓴 이유를 온전히 설명하긴 어렵다. 이에 대해 여권의 한 핵심인사는 이렇게 분석했다. “결국 각종 게이트가 지뢰처럼 터지는 지금 시점에서, 박지원이야말로 자기 몸을 던져 정권을 막아줄 유일한 사람이라고 김 대통령이 판단한 것 같다.” 이런 믿음이 계속 그를 불러들이는 핵심 이유라는 것이다. 청와대의 한 인사는 “사실 지금 여권엔 대통령이 옆에 두고 쓸 만한 사람이 거의 없다”며 “현직 의원들은 의원 배지를 떼고 청와대에 들어오길 꺼린다”고 말했다.

박 특보는 현 정권 들어 두번 낙마했다. 문화관광부 장관 시절인 2000년 하반기 한빛은행 불법대출 의혹에 휘말려 사표를 냈다. 또 지난해 11월엔 인사쇄신 여론이 거세지자 사표를 던졌다. 여권의 한 인사는 “두번 모두 뚜렷하게 박 특보의 잘못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빛은행건은 검찰 조사에서 무혐의로 처리됐고, 인사쇄신 파동 때도 구체적 비리가 드러난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 인사는 “두번 모두 대통령이 그에게 사표를 내라고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먼저 사표를 던져 국면을 전환시켰다. 김 대통령은 그런 점에 대한 인간적 미안함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려울 때, 가뜩이나 정권 말기에 권력 핵심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것은 쉽지 않다. 권력의 속성이 그렇다. 지난해 11월 그와 권노갑 고문 두 사람이 민주당 쇄신파의 타깃이었다. 그러나 박 특보는 물러났고, 권 고문은 버텼다. 박 특보는 사표를 던지기 전날 권 고문을 찾아가 ‘동반 퇴진’을 설득했지만 권 고문은 이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뒤 권 고문은 김 대통령의 눈 밖에 났다는 게 여권 핵심관계자들의 얘기다. 한 핵심인사는 “김 대통령은 더이상 권 고문에게 아무런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고 냉정하게 말했다.

이런 점이 그에 대한 김 대통령의 신뢰를 깊게 하는 부분이다. 박지원이야말로 확실하게 자신의 방패막이가 되어줄 것으로 김 대통령은 생각하는 듯하다. 또다시 김 대통령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그는 아마도 기꺼이 세 번째 사표를 던질 가능성이 크다.

국정 장악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상황에서, 김 대통령의 의중을 정확히 읽고 집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권에선 박지원을 첫손가락에 꼽는다. 김 대통령이 ‘아’ 하고 말해도 ‘어’ 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박 특보라는 것이다.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입의 혀와 같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측면이다.

그는 이것이 야당 대변인 시절, 오랫동안 김 대통령과 많은 대화를 나눈 데서 체득한 것이라고 말한다. 거의 매주 토요일마다 저녁을 같이 먹으며 얘기를 나눴는데, 어떤 때는 6시간이 넘도록 둘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적도 있다고 한다. 정치인들은 직설적인 표현을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다. 나중에 말꼬리를 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김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은유적인 얘기들 속에서 정확하게 주군의 뜻을 집어내서 행동하는데, 그런 신하를 좋아하지 않을 주군이 몇이나 될까.

권력 독점욕에 과시 경향 누가 말릴까

사진/ 박지원 특보는 현 정권에서 두 차례 낙마했다. 지난해 11월8일 인사쇄신 차원에서 사표를 내고 청와대를 떠나는 박 특보의 모습.(청와대사진기자단)
김 대통령이 그를 좋아하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그에겐 적이 많다. 박 특보처럼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이도 드물다.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 인사들까지 그를 비난한다. 그에겐 대표적으로 두 가지 부정적 평가가 있다. 하나는 ‘김 대통령에게 직언을 못하는 예스맨’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가 대통령 주변에 인의 장막을 친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은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틀린 것 같다. 그는 사석에서 “나에게 대통령과의 면담을 주선해달라고 요청한 민주당 인사들은 모두 주선해줬다”며 자신이 대통령 주변에 벽을 쌓는다는 비판에 억울하다는 뜻을 밝힌 적이 있다.

무엇보다 그가 비난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끊임없이 권력을 독점하려고 하고, 이를 은근히 과시하려는 경향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청와대의 한 인사는 “박 특보는 비서실장을 하면 잘할 사람”이라고 평했다. 모든 부문을 관장할 수 있는 비서실장이 그에게 딱 맞지, 일정한 영역을 맡는 수석비서관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그가 자꾸 자기의 업무영역을 벗어나 모든 중요한 사안에 개입하려는 경향을 지적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에게 항상 ‘권력을 쫓고 즐기는 타입’이라는 평이 따라다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박찬수 기자/ 한겨레 정치부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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