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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내 나이를 묻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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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1-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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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교체 공세에 직면한 이회창 총재… 노·장·청 조화론 기반한 방호벽 구축

사진/ 젊음을 전진배치하라! 지난 1월17일 열린 이회창 총재의 기자회견장에 젊은 당직자들이 집중 배치됐다.(이용호 기자)
회견장은 20∼30대 청년들로 북적였다. 단상의 총재 주변 좌석은 아예 이들이 독차지했다. 30여명의 청년들은 마치 그를 호위하듯 에워싸고, 핵심 당직자들은 먼발치로 밀렸다. 1월17일 오전 9시30분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사 10층 대강당, 이회창 총재의 기자회견장은 드라마 촬영장처럼 연출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이 총재의 한 참모는 “당과 총재의 젊은 이미지를 과시하기 위해 20∼30대 실무 당직자를 집중 배치했다”고 밝혔다. 이 총재에게 ‘젊음’은 그만큼 절박한 이미지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젊은 그대 잠깨어 오라.’ 이 총재는 요즘 가수 김수철씨의 이런 유행가 가사를 되뇌고 싶을는지 모른다. 지난 97년 대선 때만 해도 그는 ‘청춘’이었다. 1935년생, 당시 나이는 62살. 49살인 이인제 국민신당 후보보다 연장자였지만, 맞수인 DJ보다는 10년이나 젊었다. 때문에 DJT연합을 “777황혼열차”라고 조롱할 수 있었다. 72살 DJ와 연합한 JP와 TJ(박태준)가 모두 70대라는 점을 빗댄 차별화 전술이었다.

60대 후반으로 최연장자 ‘반열’에


그러나 올 대선은 상황이 뒤집혔다. 이 총재는 어느덧 67살. 유력한 민주당 경쟁자인 노무현·이인제 상임고문은 모두 50대 중반이다. 더욱이 49살인 정동영 상임고문이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공식 출마하면서 ‘세대교체론’은 급속히 주목받고 있다. 올 대통령 선거전에서 핫이슈로 떠오를 조짐마저 보인다. 우려했던 상황이 현실로 닥친 것이다.

이 총재를 비롯한 한나라당 주류세력은 그동안 세대교체론을 경계대상 1호로 지목했다. 이미 지난해 8월 한나라당 기획위원회는 이 총재에게 ‘여권주자들이 가능성을 두고 집착하는 것은 세대교체론이며, 그 밖의 다른 전략론들은 수사에 불과하다’는 ‘여권의 대선논리 검토’ 보고서를 올릴 정도였다. 대비책도 꾸준히 마련했다. 세대교체론이 불거질 때마다 당 전체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대변인 논평을 쏟아내고, 대학생이나 386직장인들과 잦은 만남도 주선했다. 지난해 12월24일 당직개편 때는 30∼40대를 주요 당직에 대거 포진시켰다. 36살의 남경필 의원을 대변인, 정병국(43) 의원을 총재비서실 부실장, 심준형(42)씨를 홍보특보에 발탁하는 등 다수가 이른바 ‘젊은피’였다. 한나라당은 사이버당보 등을 통해 ‘이 총재 주변에 젊은피를 포진시켜 당의 보수적 이미지를 보완하고 젊은층에 어필하려는 대선승리의 포석’이라는 홍보했다.

하지만 최근 이 정도로는 ‘약발’이 안 먹힌다는 내부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수도권 한 소장파 의원은 “민주당은 40∼50대 대권주자들의 내부경쟁과 쇄신공세, 30∼40대 드림팀인 김민석 서울시장·김영환 경기지사 출마설 등을 흘리며 세대교체론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다”면서 “총재 뒷자리에 젊은 실무당직자 몇명 앉혀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고 비판했다. 홍준표 의원은 아예 이 문제를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난 1월3일 이 총재를 만나 “몇몇 젊은 의원을 당직에 기용하는 응급책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면서 “근본적 결단”을 요구했다. 홍 의원은 기자에게 “대선은 이 총재로 치를 수밖에 없지만 지도부가 노쇠한 현재의 당 이미지로는 정권을 탈환할 수 없다”면서 “부총재 등 핵심 지도부에 30∼40대를 중용하고, 당 민주화도 민주당보다 한발 앞서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나보다 겨우 한살 더 많은 정동영 의원이 대권주자로 뜨는 것은 어쨌든 민주당 당원들의 저력이며, 그게 바로 민주주의”라면서 “우리 당도 젊은 스타들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이 총재쪽은 이런 안팎의 공세에 상당히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다. 이 총재의 한 측근 인사는 “이 총재가 어느날 갑자기 40대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노·장·청의 요구가 혼재하는 상황에서 어느 한쪽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도 없는 처지”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묘책이 없다는 것이다. 홍준표 의원의 요구가 알려진 뒤 한나라당 중진들이 벌써 들썩이고 있다.

이 총재는 일단 세대교체 공세에 ‘정치적 시대교체론’으로 맞선다는 내부전략을 세웠다. 우리시대의 변화욕구는 나이에 따른 강압적 세대교체보다 ‘3김식 정치’를 청산하고 깨끗하고 투명한 정치를 뿌리내리는 정치적 시대교체를 통해 충족될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킨다는 게 핵심이다. 이 총재는 특히 노·장·청의 조화를 강조할 계획이다. 노·장층의 안정희구 심리에 호소하면서, 젊은층 유권자에게는 민주당 예비주자들이 ‘DJ의 아류’라는 점을 부각시키겠다는 전략이다. 한꺼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생각이다.

젊은피 수혈·정치적 시대교체론 내세워

사진/ "5살만 젊어질 수 있다면…." 지난 97년 대통령선거에서 당시 이회창 총재는 이인제 후보와 함께 젊은층에 속했다.(이용호 기자)
그러나 이런 구상이 현실화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당장 박근혜, 이부영, 김덕룡 의원 등 비주류 중진들은 오히려 이 총재를 ‘3김의 아류’로 몰아세우고 있다. 1월18일, 이들은 이 총재의 연두회견을 “3김 시대가 끝나가면서 거세게 제기되고 있는 정당민주화 요구에 대해 이 총재가 거부의 뜻을 밝힌 것이며, 당을 민주화하거나 개혁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성토했다. 이 총재가 1월17일 회견에서 자신들의 요구사항인 국민경선제, 집단지도체제, 대선후보와 총재직 분리 등을 거부한 데 따른 분노가 묻어 있다. 어쨌든 이 총재의 ‘3김 청산’ 요구가 내부에서부터 설득력을 잃은 셈이다.

이 총재와 가까운 윤여준 의원은 “세대교체가 모든 지도자를 뽑는 유일한 기준이 아닌 만큼 총재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그 파장도 달라질 것”이라고 앞날을 낙관했다. 당 안에서는 “이 총재가 97년 대선 때 DJ의 방어논리인 노·장·청 조화론을 부르짖고 있다”면서 “최악의 경우 70대의 DJ도 대통령을 했는데, 내 나이가 무슨 문제냐고 말하는 상황이 닥칠 수도 있다”고 한다.

케네디 클린턴 블레어 푸틴…

사진/ (GAMMA)
여야를 떠나 세대교체를 주창하는 정치인들은 항상 외국 사례를 들먹인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와 미국의 케네디, 클린턴 전 대통령은 단골메뉴다. 최근 푸틴 러시아 대통령까지 그 목록에 오르내린다. 모두 40대다. 그러나 단지 젊기 때문에 세대교체에 성공하고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된 것은 아니다.

94년 7월, 41살의 토니 블레어가 노동당 당수에 당선된 것은 이변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상은 나이가 아닌 깃발 때문이었다. 사회주의는 몰락했지만, 영국 노동당은 여전히 노조집행부의 강한 영향력 아래서 사회주의적 전통가치를 중시하는 노선을 고집했다. 이미 ‘자본의 승리’를 목격한 국민을 설득할 수 없었다. 블레어는 이 틈새를 노렸다. 노조집행부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당 체질을 시장경제와 개인주의에 맞춤으로써 중산층의 표를 흡수하는 이른바 ‘현대화노선’을 주창한 것이다. 블레어는 이후 국민을 향해 엄격한 규제를 동반하는 복지국가 개념과 과감한 민영화 및 규제완화라는 자유경쟁 시스템을 절충한 ‘제3의 길’을 제시했다. 결국 보수 언론도 그의 변신을 지지했다. 대처 전 총리조차 “블레어가 집권해도 위험하지 않다”고 공인했다. 그리고 97년 5월, 44살의 나이로 18년 보수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시대의 요구를 읽어내고 새로운 접근방식을 제시한 그에게 최연소 총리라는 세대교체 신화도 함께 따라붙었다.

정동영 상임고문이 표상으로 내세운 케네디 전 대통령도 비슷하다. 1961년 43살의 무명 상원의원이 대통령으로 급상승한 비밀 코드 역시 시대적 요구였다. 당시 미국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양극체제 틈바구니 속에서 새로운 역할을 요구받고 있었다. 또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빈곤이 극심해지고 흑인을 중심으로 한 인권운동이 확산됐다. 미국사회는 전쟁과 빈곤, 사회분열이라는 여러 악령 앞에서 흔들렸다. 그러나 전쟁영웅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늙었고, 그 밑에서 8년간 부통령을 지낸 공화당 닉슨 후보도 신선도가 떨어졌다. 바로 이때 43살의 케네디는 ‘뉴 프론티어’라는 새로운 정신지표를 전면에 내걸고 미국인의 애국심에 불을 질렀다. “국가가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묻지 말고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달라”, “독재와 빈곤, 질병, 그리고 전쟁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응하겠다”. 간단 명료한 이 메시지는 적중했다.클린턴은 민주당 당내 경선 때부터 각종 스캔들로 시달렸다. 그러나 92년 당시 시대상황은 그를 살려냈다. 바깥은 냉전체제가 종식되고, 안으로는 경기침체가 오래 지속됐다. 더욱이 2차대전이 끝난 46년 이후 태어나 60년의 사회적 격동을 겪고 자란 전후세대가 미국사회의 주축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당시 공화당 부시 대통령은 경제문제 해소보다 냉전시대 유물인 ‘힘의 외교’에 집착했다. 또 60년대 반전 시위 속에서 성장한 전후세대 앞에서 클린턴의 베트남전 기피 전력을 걸고넘어졌다. 그러나 46살의 클린턴은 반대로 갔다. 전후세대의 대표자를 자임하며 작은 정부와 감세정책을 전면에 내걸고 중산층의 지지를 호소했다. 또 균형예산과 복지개념의 현대화, 경제회복론을 통해 침체된 미국인에게 희망을 불어넣었다.

젊음, 그것이 국가지도자를 선택하고 세대교체를 규정짓는 핵심 코드는 아니다. 시대적 요구를 먼저 읽어내고 새로운 접근 방식으로 국민의 요구를 결집하는 능력이 뒷받침될 때 젊음이 지도자의 덕목으로 빛날 수 있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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