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짓을 다 해도 (서울로 넘어오는) 남태령 고개를 넘지 못합디다.”
과거 경기도지사 출신 한 정치인은 이렇게 자조했다. 서울특별시에 버금가는 예산(2017년 기준 서울 29조8천억원, 경기도 19조6700억원)과 두 배가량의 행정 면적을 지니고 있음에도 ‘지방 도백’이라 중앙정치 무대의 주목도가 떨어지는 현실에 아쉬움을 표한 것이다. 서울시장과 달리 경기도지사는 대선 주자들의 무덤이었다.
바른정당 남경필 경기도지사도 힘겹게 남태령(서울 관악구와 경기도 과천시를 잇는 고개)을 오르고 있다. 사교육 전면 금지, 모병제 도입, 수도 이전 등 잇따라 파격적인 공약과 정책을 던졌지만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외려 그의 공약들은 ‘포퓰리즘’이란 비판에 직면했다. 남 지사의 공약을 두고 <한겨레21>이 접촉한 전문가들은 “공약은 기발한 아이디어나 슬로건이 아니다. 사회적 합의와 세밀한 계획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그의 지지율은 1%대를 넘지 못하고 있다. ‘지지율 미달’ 탓에 한국갤럽 여론조사 대상에서 빠지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남 지사가 내건 공약을 점검했다. 특히 누리집과 각종 기자회견, 토론회, 저서에서 밝힌 공약 가운데 논란이 된 것을 살폈다. _편집자
모병제 공약에 가려졌지만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내세운 공약 가운데는 ‘핵무장 준비’가 있다. 이는 적잖은 우려를 낳는다. 그는 2월19일 ‘신부국강병론-한국형 자주국방으로 대한민국을 지키겠다’는 제목의 대한민국 리빌딩 공약에서 핵무장 준비를 최우선 순위에 뒀다. 그는 “평화적 핵주권 행사 차원에서 대응적·자위적 핵무장 가능성을 검토하겠다. 핵무장 준비를 공론화함으로써 안보에 대한 분명한 주인의식을 갖도록 하겠다”고 했다.
이어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따른 3단계 대응 전략으로 미군의 항공모함과 핵잠수함, 폭격기 한반도 상시 순환 배치 또는 주기적 전개→유사시 사용 가능한 한반도 인근 전술핵 배치→전술핵의 한반도 배치 및 자체 핵무장 준비를 제시했다.
준비되지 않은 ‘핵무장 준비’ 공약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논쟁적인 공약과 정책을 잇따라 던지지만 지지율은 좀체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3월20일 서울 여의도 KBS 본관에서 열린 바른정당 대선 후보 경선 토론에서 발언하는 남 지사의 모습. 국회사진기자단
전문가들은 군사적 실효성 차원에서도 한반도 전술핵 배치가 이득이 없다고 지적한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미군은 B-2, B-52, B-1B 등 괌 앤더슨 기지에서 출격해 한반도에 도달하는 시간이 2시간 안팎에 불과한 전략 폭격기가 있다. 태평양의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도 평양까지 30분이면 족히 이를 정도로 대북 핵 억지력은 이미 충분하다. 전술핵을 장착한 미군 전투기가 이륙하면 북한은 이를 핵공격 신호로 간주해 선제공격에 나설 수 있어 핵전쟁으로 비화할 위험성만 키울 뿐이다”라며 “전술핵 배치는 백해무익해 미국 정부도 한국에 전술핵을 배치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모병제 공약도 계층 불평등 논란 국제 상황을 고려하면 한국 자체 전술핵 배치는 더욱 요원하다. 남 지사는 정책 에세이집 <가시덤불에서도 꽃은 핀다>에서 “우방국들의 핵무장에 반대해왔던 미국이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지금 우리가 핵무장을 한다고 해도 유엔 안보리에서 북한만큼 큰 제제를 가할지는 알수 없다”고 다소 빈약한 근거를 제시했다. 한국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했다. 자체 핵무장을 하려면 NPT에서 탈퇴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단도 추방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이미지 추락과 국제사회의 제재가 불가피하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회부를 비롯해 우라늄 수입 금지로 인한 원자력발전 중단, 경제제재 등 뒷감당은 걷잡을 수 없다. 동북아 군비 경쟁에도 한국이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당장 일본이 자체 핵무장을 들고나올 수 있고, 중국 역시 일본의 움직임에 따라 군사적 대응 수위를 높일 가능성이 높다. 한반도 주변이 핵무장 소용돌이에 휩싸일 수 있는 셈이다. 최근 한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배치로 인한 중국의 거센 반발은 핵무장 파장을 가늠하는 본보기다. 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은 “남 지사가 주장하는 핵무장 준비는 한국의 자주국방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핵·미사일 개발로 극단적인 벼랑 끝 전술을 쓰는 북한에 같은 논리로 대응하자는 것은 안일한 방책일 수 있다”며 “더구나 남 지사는 연정을 내세우는데 이 공약은 야당에서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남 지사가 자주국방 정책의 하나로 내세운 모병제 공약은 예산 문제와 함께 사회적 형평성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남 지사는 “인구절벽 상황에서 병력 유지를 위해 2023년부터 직업군인 5만 명을 모병하겠다. 이후 점진적으로 징병제를 모병제로 전환하겠다”고 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9급 공무원 수준인 200만원가량의 월급을 지급하면 3조~4조원이 추가로 든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이일우 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은 “가장 큰 문제는 예산이다. 군은 계급별 호봉제인데 (남 지사의 공약은) 이를 고려하지 않았다. 현재 약 20만 명인 군 간부의 인건비 총액은 연간 8조~9조원이고, 병사 43만 명의 인건비는 8천억원이다. 이 구조를 모병제에 적용하면 연간 최소 10조원가량의 막대한 예산이 더 든다”고 지적했다. 같은 당 유승민 의원은 “모병제는 상위 계층의 합법적 병역 회피의 길을 열어주고 하위 계층만 입대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정의롭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지난해 9월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는 현행 징병제 찬성 의견이 48%로 모병제 찬성 의견(35%)보다 높았다. 남 지사의 다른 공약들과 마찬가지로 관심과 논쟁은 불러일으켰지만 사회적 합의에 이르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 “전두환처럼 욕먹어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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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필 지사는 박근혜 게이트가 불거진 뒤 “생명이 다한 새누리당을 역사의 뒷자락으로 밀어내고자 한다”며 가장 먼저 새누리당을 탈당했다. 남 지사가 지난해 11월22일 탈당 선언을 한 뒤 김용태 의원(왼쪽)과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의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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