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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정동영 딜레마 “묘수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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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1-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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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후보 경선 출마여부 관련 결단 임박… 바른정치실천모임의 고민도 깊어만 간다

사진/ 정동영 의원은 대선 후보로 나설 것인가. 당내 경선을 앞두고 그에게 정치적 결단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이용호 기자)
“고민이다. 대선에 한번 본격 뛰어들어보라고 권유하는 사람도 있는데, 망설여진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지난해 11월, 민주당이 김대중 대통령의 당총재직 사퇴 이후 당지도체제 개편과 당쇄신 방안을 놓고 논란을 벌일 때였다. 정동영 민주당 의원이 정치권 쇄신을 함께 주장해온 바른정치실천모임(회장 신기남) 소속 의원 몇몇과 자리를 같이했다. 정국흐름과 당쇄신 방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던 뒤끝에 정 의원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쉽게 잘라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였다. 대부분 신중한 반응이었다. “조금 더 상황을 보며 기다려보는 게 어떻겠느냐. 지금 당쇄신이 한창 진행중인데 자칫 젯밥에만 관심있다는 소리만 들을 수 있지 않겠느냐.”

정동영 의원의 너무나도 신중한 행보

이런 충고를 받아들인 것일까. 정동영 의원의 행보는 신중하기 그지없다. 지난해 12월12일 후원회에서도 대선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당쇄신이 마무리되고 정치일정이 제시되면 가슴속에 품은 꿈과 이상을 구체적으로 다시 한번 밝히겠다”고만 했다. 정 의원이 이날 후원회를 대선 출정식으로 삼을 것으로 본 정치권의 전망과 거리가 있는 행보였다.


그렇지만 해가 바뀌며 결단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민주당은 1월7일 당무회의를 열어 4월20일 차기 당지도부와 대선후보를 결정하기로 했다. 당쇄신과 정치일정 제시라는 대선행보 공식화의 전제조건이 충족된 것이다. 정 의원도 “당 안팎의 선·후배 여러분과 충분히 상의해 이달 중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해 태도표명을 더이상 피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출마를 공식화하기에 앞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바른정치실천모임 등 그동안 당개혁을 함께 주장해온 소장파 동료의원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일이다. 정 의원의 최대 약점은 높은 대중지지도에 비해 턱없이 취약한 당내 기반. 따라서 그동안 정치적 진로를 함께 모색해온 바른정치모임 등 소장파 개혁의원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당내에서 비빌 언덕도 잃고 마는 셈이 된다. 한 재선의원은 “정 의원이 얼마 전 바른정치실천모임 등 동료의원 몇몇이 모인 자리에서 ‘당신들이 용납하고 동의하지 않는다면 대선후보 경선에 나서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 의원은 또 “그렇지만 그동안 정 의원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어려웠다. 당쇄신 논의가 주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당쇄신 문제가 매듭지어진 만큼 정 의원의 거취문제가 화두가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바른정치실천모임은 정 의원의 소중한 정치적 자산이다. 정 의원이 정치적으로 크게 주목받게 된 것은 2000년부터 민주당 소장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거세게 일어난 당정쇄신운동 때문이다. 당시 쇄신운동은 정동영, 천정배, 신기남, 정동채 등 재선의원 중심의 바른정치실천모임과 정범구, 김성호 등 초선의원 중심의 새벽21이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정 의원은 이 과정에서 2000년 12월 권노갑 전 최고위원의 퇴진 발언으로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스타덤에 올랐고, 이후 소장 개혁파의 리더격으로 인정받으며 대선주자로 발돋움할 발판을 마련했다.

바른정치실천모임은 남다른 결속력을 보여왔다. 2000년 8월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서도 이들은 정 의원 당선을 위해 자기 일처럼 뛰었다. 당내 기반이 취약한 정 의원의 당선에는 이들의 도움이 컸다. 그러나 이번 대선후보 경선에서도 이처럼 적극 나서줄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최고위원 경선에서는 7명의 선출직 최고위원 중 소장파의 목소리를 대변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대선후보의 경우 당을 대표할 단 한명을 뽑는 행사로 상황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바른정치실천모임에서 우려하는 것은 정 의원의 출마가 가뜩이나 노무현, 김근태의 독자출마로 세가 나뉘어져 있는 당내 개혁세력의 분열을 더욱 부채질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바른정치실천모임을 주도해온 의원들은 그동안 노무현, 김근태 의원 등 개혁세력의 연대에 무게를 둬왔다. 바른정치실천모임의 핵심인사인 천정배 의원은 지난해 7월26일 부산에서 “80년대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개혁세력이 총단결을 이뤄야 하고 당내 경선승리를 위해 조직적으로 협력해야 한다”며 개혁세력이 모두 참여하는 ‘민주개혁연대’를 결성할 것을 제안했다.

이런 민주개혁연대 추진이 정 의원의 출마로 물건너갈 가능성이 크다는 게 바른정치실천모임 의원들의 우려인 것이다. 한 재선의원은 “정 의원의 출마가 당내 경선에서는 이인제 의원을 도와주고 본선에서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도와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경선에서는 노무현 고문과 개혁세력의 표를 나눠가지게 돼 결과적으로 이인제 의원의 1등 당선을 도와주고, 혹시 정 의원이 민주당 후보로 선출돼 본선에 나가더라도 호남 출신이라는 약점 때문에 이회창 총재에게 패할 것이라는 풀이다.

경선 출마는 잃을 것 없는 ‘꽃놀이패’

사진/ 바른정치실천모임은 정동영 의원의 정치적 자산이다. 지난해 11월5일 민주당 바른정치모임·열린정치포럼 등 5개 모임 대표들이 당쇄신 관련 모임을 갖고 있다.(한겨레 김경호 기자)
한 초선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정동영 의원으로서는 후보 경선에서 꼭 1등을 하지 않더라도 손해볼 게 없다. 40대로 아직 젊기 때문에 2, 3위권에만 들어도 정치적 수확을 누릴 수 있다. 차기를 겨냥한 정치적 입지를 넓힐 수 있는 일종의 ‘꽃놀이패’인 셈이다. 그러나 개인의 거취를 중심으로 생각하기보다 어떻게 우리 당의 향후 진로를 제시할까, 어떻게 개혁의 주체성을 확보하고, 개혁세력이 당내 주류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전략적 고민 위에서 신중하게 자신의 위치를 자리매김했으면 좋겠다.”

문제는 바른정치모임이 정 의원의 출마를 마냥 반대만 할 수 없는 실정이라는 점. 소속 의원들이 노무현, 김근태 상임고문 등 민주개혁세력의 대표주자들과의 친소관계에서 차이가 있는데다 노무현, 김근태 고문 가운데 누구도 당내 경선승리를 보장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종 여론조사는 정 의원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연초 각종 언론기관의 여론조사에서 정 의원은 이인제, 노무현 고문에 이어 부동의 민주당 3위에 올라 있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의 가상대결에서 2위 노 고문보다 3∼7%포인트 안팎이 뒤질 뿐이다. 따라서 여론조사상으로 정 의원에게 양보를 주문할 근거가 별로 없는 것이다. 오히려 당내 만년 2위에서 정체되는 듯한 노 고문보다 아직 대선출마를 선언하지 않았으나 3위에 오른 정 의원쪽이 더 잠재적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반론을 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현재 여론조사상 민주개혁세력의 선두주자인 노무현 상임고문이 쇄신정국 고비마다 보인 행보에 대한 불신도 작용하고 있다. 노 고문은 김 대통령의 당총재직 사퇴 이후 당쇄신 방안과 정치일정 논의과정에서 바른정치실천모임이 참여하는 쇄신연대쪽과 함께 행동하지 않았다. 또 지난해 5월 당정쇄신 요구가 거세게 불 때도 노 고문은 “김 대통령의 리더십 스타일에서 비롯하는 문제는 단기간에 고쳐지지 않는다. 3김시대 이후의 과제”라며 입을 다물었다. 한 재선의원은 “당쇄신과 관련한 노 의원의 태도에 실망했다. 선거전술의 측면도 있을 테지만 당쇄신과 관련해 너무 목소리를 아낀다. 노 고문이 개혁에 대한 확신을 주지 못한다면 어떻게 노 고문을 기꺼이 지지하겠느냐. 정동영 의원의 출마를 막을 명분이 뚜렷하지 않다”고 말했다.

동지 정동영이냐, 민주세력 거중조정이냐

사진/ 정동영 의원은 경선구도에 어떤 영향을 끼칠 건가. 지난 1월7일 민주당 당무위원들이 경선 일정 등을 확정한 뒤 자리를 함께했다.(한겨레 김경호 기자)
정치권에서는 정 의원의 경선출마 선언을 시간문제라고 보고 있다. 정 의원 캠프도 출마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분위기다. 바른정치실천모임은 그동안 당내 민주화와 쇄신이라는 대의를 내세워 정치적 행동을 함께해왔다. 그러나 바른정치실천모임 소속 의원들이 정 의원에 대한 지지여부와 관련해 한목소리를 내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정 의원의 한 측근은 “초·재선 개혁그룹과의 공감대 위에서 정 의원의 출마여부가 결정되지 않겠느냐. 그렇다고 공감대가 일사분란하게 정 의원의 출마를 지지하거나 반대하겠다는 쪽으로 이뤄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명확한 의사표시 없이 출마를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모아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기대했다.

어쨌든 정 의원의 경선출마가 현실화할수록 바른정치실천모임 의원들은 더욱 선택을 강요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함께 행동하며 호흡을 맞춰온 정동영이냐, 아니면 민주개혁세력연대에 따른 노무현 김근태 정동영 사이의 거중조정이냐.

박병수 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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