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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북한, 2002년은 ‘버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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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1-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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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감으로 가득찬 신년사와는 달리 대형행사를 통해 평화의 제스처도 보여줄 것

사진/ 지난해 4월 러시아를 방문한 김정일 위원장. 남북정상회담 이후 은둔의 지도자상을 탈피했다.(AP 연합)
“제2, 제3의 고난의 행군을 한다고 해도… 우리의 의지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올 한해의 비전을 제시한 2002년 북한의 신년사에는 위기감과 긴장감이 곳곳에 배어 있다. 북한을 둘러싼 녹록지 않은 나라 안팎의 정세를 반영한 탓으로 보인다. “반테러의 명목 밑에 감행되고 있는 미제와 남조선 호전분자들의 반공화국, 반통일정책으로 말미암아 지금 조선반도에는 긴장상태가 격화되고 있다.” 이런 정세인식 때문인지 북한 당국은 신년사에서 내부결속을 부쩍 강조하고 있다.

지난해의 자신감은 접고


북한은 1월1일 <노동신문> <조선인민군> <청년전위> 등 3개 신문 공동사설을 통해 우리의 수령·사상·군대·제도 제일주의를 철저히 구현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신년사 내용을 표피적으로 해석하면 올 한해도 북한에서 큰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오히려 과거보다 더 수구적·폐쇄적인 정책으로의 회귀까지 점쳐지기도 한다. 이전 신년사에서 보이지 않았던 김일성 수령 제일주의 방침을 다시 꺼집어내 최우선 과제로 삼은 것이라든지, 주체사상·군대·제도 등을 강조한 점에서 그렇다.

사실 북한은 지난해 초에는 그 어느 때보다 의욕적인 자세를 보였다. 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이후 상당한 자신감을 회복한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은둔의 지도자상에서 탈피하여 러시아, 중국을 방문, 정상외교를 펼쳐 우호관계를 복원하는 한편 2000년 1월 이후 서방국가를 중심으로 17개 나라와 관계를 텄다. 유럽연합(EU)과는 15개 회원국 중 13개 나라와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었다. 먹고사는 문제도 90년부터 8년간 마이너스 경제성장으로 바닥을 헤매다가 최근 3년 사이에는 작은 폭의 플러스 성장을 기록했다. 곡물생산도 많이 늘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식량계획(WFO)은 2001년 북한의 곡물생산량이 이전 해보다 38% 늘어난 354만t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더구나 북한은 지난해 경제건설을 최우선 과제로 제시하면서 외화획득 및 첨단기술 도입을 통해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확대하는 등 이른바 ‘개방적 자력갱생’ 노선으로의 방향을 잡았다. 김정일 위원장 자신이 중국 경제성장의 상징도시로 불리는 상하이를 방문해 첨단기업을 둘러보았다. 400여명의 젊은 엘리트들을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로 파견해 시장경제의 원리를 익히게 했다. 북한의 이런 자신감과 의욕은 지난해 신년사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과거의 낡고 뒤떨어진 것을 대담하게 없애자.” “새 시대에 맞게 모든 문제를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높이에서 풀어나가자.” 올 신년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꼬일대로 꼬인 북-미 관계

사진/ 김일성 주석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 기념궁전을 찾은 김 위원장. 올해는 태양절이 예정돼 있다.(AFP 연합)
그렇다면 북한의 위기의식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역시 미국과의 관계에서다. 지난 10여년간 겪지 못했던 초강경 공화당 정권을 상대하면서 북한은 지금 전례없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게 북한 내부사정에 밝은 관계자들의 귀띔이다. 과거 미국 정권에서 통했던 적당한 화해제스처나 특유의 벼랑 끝 전술도 부시 정권을 움직일 수는 없다는 잠정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이제 마지막 생존카드인 핵미사일, 화생방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만 들고 있는 셈이다.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은 확고해 보인다. 이런 방침은 9·11 테러 이후 더욱 굳어졌다. 이런 맥락에서 미 국무부에서 대북정책 입안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한 인사의 언급은 주목할 만하다. “미국은 실질적 성과가 없는 ‘대화만을 위한 대화’에는 응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북-미 대화를 국제사회에 과시하거나, 미국으로부터 특별한 혜택을 얻어내기 위한 기회로 삼는다면 미국은 결코 대화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칼 포드 미 국무부 정보연구담당 차관보가 최근 워싱턴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한 얘기다. 포드의 견해에 대해 정부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평가한다. “부시 정부는 이전 정권들과 달리 북한의 양보에 대해 그 대가로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생각조차 않고 있다”며 앞으로 북-미 교착관계가 장기화될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는 이어 “부시 정권 내에는 북한 정권이 살 길은 백기를 들고 나오는 것이며, 그렇지 않고 그냥 있으면 스스로 망할 것으로 생각하는 견해가 팽배해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꼬인 북-미 관계는 북한의 대내외 정책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남북관계 경색에다가 일본과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총련) 수사와 이에 반발한 북한의 일본인 행불자 조사사업 중단, 연이어 터진 괴선박 격추사건 등으로 서로 등을 돌리고 있다. 2001년 의욕적으로 시작한 이런저런 사업들의 차질이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북한은 올 한해 남쪽 못지않게 각종 정치이벤트성 행사를 치러야 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가뜩이나 외화부족에 시달리는 북한 당국이 국제사회에 과시하기 위해 행사에 지나친 비용을 투입할 경우 간신히 회복기미에 돌아선 경제가 다시 마이너스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북한은 올해 이른바 ‘3대 명절과 아리랑 축제’를 연다. 2월16일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회갑이고, 4월15일은 김일성 주석 90회 생일인 태양절, 4월25일은 조선인민군 창건 70돌이다. 어느 행사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게다가 오는 4월29일부터 6월26일까지는 아리랑 축제를 벌인다. 북한은 연 10만명의 인원과 컴퓨터·레이저 등 최첨단 장비까지 동원해 내용·형식·규모면에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매스게임 ‘아리랑’을 공연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정치적인 색채보다는 민족정서가 가미된 전통문화 위주로 짜여질 것으로 알려진 이 행사에 대해 북한의 언론들은 ‘어서 오시라 평양으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나라 안팎에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북한은 이 생소한 대규모 매스게임을 왜 이 시점에 열려고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최근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여러 인사들의 얘기를 종합하면 신년사에 담긴 내용과 달리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개방제스처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동·서 냉전해체의 주인공인 고르바초프 옛소련 당 서기장, 일본의 전 총리 등 유명 정치인을 평양으로 초청해 국제정세 토론회를 여는가 하면,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회장 등 정보통신 분야 유명 기업인들도 불러들여 국제소프트웨어전시회도 열 계획으로 알려진다.

남쪽과의 교류는 단절되지 않는다

사진/ 능라도 경기장의 카드섹션. 올해 아리랑 축제에서는 대규모 매스게임이 펼쳐진다.(한겨레 곽윤섭 기자)
전문가들은 북한의 이런 움직임이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면서 북한 압박을 강화하고 있는 미국의 정책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통일연구원의 허문영 박사는 “지금 북한이 선택한 전략은 ‘버티기’”라면서 “북한은 3대 명절과 아리랑 축제를 통해 김정일 체제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한편, 미국에 메시지를 보내면서 반응을 떠보려고 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도 최근 “예술공연 ‘아리랑’은 조선반도를 둘러싼 국제적 환경을 감안한다면 조성된 정세에 주동적으로 대응해나가려는 조선의 정책적 방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미국과 적대관계에 있는 조선에서 아리랑 공연이 진행되면 단순한 행사의 테두리를 벗어나 국제사회를 향한 평화의 메시지로서의 의미가 부여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남북관계는 어떻게 될까. 북한은 신년사에서 6·15 남북공동선언 실천을 몇 차례 강조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북한 당국이 미국과의 긴장관계와는 상관없이 남쪽과의 교류·협력은 꾸준히 전개할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올해는 남쪽에서 대통령선거 등 복잡한 정치행사가 예정돼 있어 북한 지도부가 남한 당국과는 신중한 관계설정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특히 북한 당국은 보수주의로 무장한 부시 정권이, 좀더 다루기 쉬운 비슷한 성향의 남쪽 대통령 후보를 은밀히 밀 가능성을 가장 경계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임을출 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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