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눈에는 더 낯설게 보였나보다. 지난 8월 미국 <워싱턴포스트>의 도쿄 지국장 안나 파이필드는 반기문 생가 마을을 방문한 뒤 이렇게 기사를 썼다. “맞다, 여기는 한국이다. 비록 김일성을 찬양하는 북한의 박물관과 기념관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자신이 북한에 와 있다고 여겨도 이상하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기념관을 나갈 때 ‘반기문 사무총장 명언 19가지’가 담긴 팸플릿도 얻을 수 있다. ‘금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맥이다’ ‘일등이 되어라, 2등은 패배다’ ‘지금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 등이 담겨 있다. 앞만 보고 내달렸던 시대의 경구들이다. 반 총장의 행적과 말은 성공을 향한 한국인의 욕망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였다.
지역민들의 생각은 외국 기자와 달랐다. 생가 앞에서 만난 음성군민 김수란씨는 “우상화다 뭐다 해서 관심 가지고 와봤는데, 반기문 총장이 훌륭하신 분이니 이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나 생각한다”고 했다. 손자 둘을 데려온 음성군민 장영순씨는 시설 확충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생가 시설이 단조롭다보니 이러다 (초·중·고등학교를 다닌) 충주에 ‘반기문’을 뺏기지 않을까 주변에서 다 염려한다.”
반 총장의 대선 출마에 대해서는 생가를 둘러본 김씨와 장씨 모두 언급을 꺼렸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의 생가가 조성된 것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반 총장을 둘러싼 지역과 정치권의 기대는 한껏 높아지고 있다.
친박계가 차기 대통령감으로 반 총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관측이 많은데, 지난 8월9일 열린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는 친박계 후보들이 당대표를 포함한 지도부를 사실상 싹쓸이했다. 사무총장 임기가 끝나는 연말께 반 총장이 새누리당의 대선 후보 경쟁에 뛰어들기에 우호적인 환경이 갖춰진 셈이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8월 다섯쨋주에 한 여론조사를 보면, 차기 대선 주자 지지도에서도 반기문 총장은 1위를 지키고 있다. 반기문(21.8%), 문재인(19.0%), 안철수(10.5%), 박원순(6.9%) 순서다. 이 구도가 이어진다면 반 총장은 ‘충청 대망론’을 앞세워 대선 행보를 시작하고, 자신의 성공 신화를 그려넣은 생가 마을을 대선 후보 자격으로 방문할 수도 있다.
반기문 생가 마을을 떠나 자동차로 2시간30분 거리인 경남 창녕 장마면 장가리로 들어섰다. 아까와 달리 동네가 너무 조용했다. 햇살이 환하던 충북 음성과 달리 비까지 보슬보슬 내렸다. 마을 경로당을 물어 찾아가니 할머니 네 분이 있었다.
“원순이?” 박무임(79), 윤정자(82) 할머니가 기억을 더듬었다. “원순이(는) 어렸을 적에도 (친구들이) 다들 춤추고 놀 때도 (혼자서) 책만 보고 다녔다. 공부밖에 몰랐다.” 장가리에서 태어나 박원순 서울시장이 5~6살 때까지 지켜봤고, 늘그막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지낸다는 두 할머니는 스스럼없이 ‘원순이’라고 불렀다.
“어머니가 진짜 양반이었다. 홀할아버지를 오래 잘 모신 것으로 소문이 났다. 항시 너울치마에 버선을 신고, 원순이가 그렇게 잘된 거는 엄마가 (절)반 역할을 한 거야.” 윤 할머니가 말하자 박 할머니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다 점잖은 분이었다. 여기서 농사지었는데 몬(못)살지 않았다. 큰돈도 없고 그랬지만 몬살지 않았어.”
박원순 서울시장은 경남 창녕에서 1955년 2남5녀 가운데 여섯째로 태어났다. 부모가 마흔이 넘어 본 아들이었다. 빈농은 아니었던 것 같다. 중학교 학적부를 보면 박 시장의 집은 ‘논 4500평, 밭 1000평, 임야 1000평 생활정도 중’으로 기재돼 있다고 한다. 박 시장은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고향을 떠났다. 경로당에는 서울시장이 되어 ‘금의환향’해 주민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원순이 집? 빈집 된 지 꽤 됐지. 경로당 앞에 있는 저 집이야. 올해 봄 어머니 기일 때도 내려왔다 카더라. 집에는 안 오고 산소만 왔다 갔지.”
윤 할머니가 가리킨 집은 대문이 열린 ‘폐가’였다. 박 시장의 생가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1996년 이래 돌보지 않은 집이라고 했다. 문으로 들어가보니 안채와 사랑채, 마당이 있었다. 안채 방에는 수북이 쌓인 책과 문서들이 보였다. 한쪽에는 먼지가 쌓인 식기들이 남아 있었다. 박 시장의 생가는 마을의 밑자락, 논 옆에 붙은 집이었다. 주민들의 표현을 빌리면, “큰돈은 없고 그랬지만” 농사지어 아들을 서울로 보낸 흔적이었다. 딸들은 가정 형편상 학교에 가는 대신 시집을 가거나 농사일을 도왔다고 한다.
고등교육을 받은 박 시장은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을 것이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깡촌’에서 자라 사법고시에 붙은 ‘흙수저의 입지전적’ 주인공은 가장의 굴레를 쓰는 게 보통이다. 집안의 희생을 돈 많이 버는 성공으로 보답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그러나 박 시장은 사법고시에 붙어 검사가 된 뒤 1년 만에 때려치웠다. 인권변호사로 변신하고 시민단체 활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가정경제를 꾸리는 것은 아내의 몫이 됐다. 버려진 생가는 ‘피붙이’를 벗어난 박 시장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박 시장은 2017년 대통령선거 출마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은 상태다. 서울시장 공식 임기는 아직 2년이 남아 있다. 지난 8월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기자들이 집요하게 대선 출마 의사를 물어보는데 요리조리 잘 피해간다”고 했더니 “나도 그런 평이 나올지 모르겠어요, 기름이라고. 하하”라고 비켜갔다.
신발공장 들어선 안철수 생가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 생가(옛 부산 범천의원)
최근 대선 출마 의사를 밝힌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의 생가는 부산 범천동에 위치한 옛 범천의원 건물이다. 논과 밭이 탁 트인 박원순 서울시장의 생가와 달리 복잡한 부산 시내 도로를 타고 들어갔다. 옛 목욕탕 굴뚝과 4층짜리 건물들이 남아 있는 오래된 동네다.
안철수 전 대표의 아버지 안영모 원장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 군의관 생활을 거쳐 1963년 부산의 판자촌에서 병원을 열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환자를 무료로 진료해줬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판자촌에서 병원 문을 연 것이나, 이후에도 이 지역에서 50년 가까이 진료를 했던 것을 보면 큰돈을 벌 욕심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 전 대표는 예전 살던 집에 대해 “마당은 없고 옥상만 있던 집”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나는 새로 이사한 집 옥상에 정원을 직접 만들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꽃집에서 봉지에 꽃씨를 넣어 파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용돈을 털어 종류대로 꽃씨를 사왔다.”(안철수, <행복 바이러스 안철수>)
안 전 대표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나 박원순 서울시장처럼 농촌 출신은 아니었다. 안 전 대표는 “학비가 싼 국립대학교에 진학해 부모님께 학비 부담을 덜어드리고 싶었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가정 생활과 학비의 어려움이 반 총장이나 박 시장처럼 심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의사의 길이 아닌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연구로 인생 행로를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집을 보며 들었다.
범천의원 건물은 찾기 어려웠다. 2012년 대선 때 안 전 대표의 아버지 안영모 원장은 범천의원 문을 닫았다. 병원 문을 연 지 49년 만이었다. 기자와 풍수지리 연구자들이 찾아와 귀찮게 하는 탓에 폐업했다는 말이 많았다. 하지만 연락이 닿은 옛 병원 건물 관계자는 “원장님이 원래 80살까지 하실 거라고 했다. 81살까지 하셨는데 연세가 많아서 그만둔 거지 누가 많이 찾아와서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액자·병풍·사진 등 보관
옛 병원 건물에는 작은 신발공장이 들어섰다. 병원으로 보일 만한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단 하나, 문 옆에 ‘의학박사 안영모’라고 쓰인 한자 문패가 여전히 붙어 있었다.
2012년 이후 비어 있던 범천의원 건물을 지난해 말 인수한 전성근 폭스코리아(신발업체) 사장은 안철수 전 대표의 생가가 기억되길 원했다. 3층 사무실에서 만난 전 사장은 “1·2층은 병원이고 3·4층은 살림집이었다. 3층에 안철수씨 방이 있다. 그 방 기운이 좋은 것 같아서 친구들더러 와서 자고 가라고 한다”고 웃으며 건물을 소개했다.
전 사장은 안 원장이 이사를 가며 남긴 물건들 가운데 오래된 액자, 병풍, 사진 등 안철수 전 대표와 관련 있을 만한 물건들도 보관하고 있었다. “나중에 안철수씨가 대통령이 되면 이 집이나 물품이 값어치가 높아지지 않을까. 주변 사람들도 ‘안철수 대통령 되면 좋겠네’라며 농담하기도 한다.”
다만 전 사장은 “태생이 부산인데 광주에 가서 대선 출마를 밝히는 게 아쉽다”며 막상 대선에서 지지할지에 대해선 명확히 밝히진 않았다. 부산에서 자랐지만 이곳에서 출마한 적이 없고 오히려 호남 쪽에 지지 기반을 두고 있는 안 전 대표에 대한 부산 시민들의 시선이 대개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흙벽에서 시멘트집 된 문재인 생가
부산에서 바다를 건너면 거제도가 있다. 경상도에서 가장 큰 섬인 거제도에는 한국전쟁 당시 포로수용소가 세워졌다.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을 이용해 전쟁 중 잡힌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 10만여 명을 수용했다. 포로뿐만 아니라 당시 거제엔 북한에서 내려온 피란민들도 있었다.
9월5일 거제시 거제면 명진리에서 만난 배영철(53)씨는 영화 <국제시장>을 예로 들며 이야기했다. “<국제시장> 봤어요? 그때 피란민들이 함흥에서 철수해 일부는 부산에 내리고 일부는 장승포 쪽으로 들어와 내렸어요. 문재인씨 가족은 다른 피란민과 함께 그때 명진리로 들어왔어요.”
배씨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살았던 집이 자신의 집 옆에 붙은 1층짜리 오래된 집이라고 했다. 오래전 시멘트집으로 바뀌어 옛 집의 흔적은 구조로만 남아 있다. 그 자리에 지금은 배씨의 동생이 살고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 생가처럼 논 옆에 붙은 집이었다. “저 집에서 문재인씨가 태어났어요. 당시 집은 흙벽에 지붕만 있고 문도 없이 볏짚 가마니로 막는 수준이었는데…. 어머니(추경순·81)가 저 집에서 산파로 직접 문재인씨를 받았다고 하던데요.”
문 전 대표가 2011년 쓴 책에 등장하는 그의 가족사는 배씨가 들려준 이야기와 비슷하다. “부모님은 1950년 12월 ‘흥남 철수’ 때 고향을 떠났다. (중략) 미군이 피란민들을 데려다준 곳은, 경남 거제도에 임시로 마련된 피란민 수용소였다. 겨울인데도 고향에 비해 무척 따뜻한 남도의 날씨와 더불어 거제도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이 아무 준비 없이 내려온 피란민들을 품어줬다.”(문재인, <문재인의 운명>)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못한 피란민의 삶은 고단했다. 문 전 대표의 아버지는 포로수용소 뒷산인 계룡산을 넘어다니며 장사를 했다. 어머니는 달걀을 파는 행상을 했다. 배씨는 “문재인씨 아버지가 수단이 좋아서, 다른 피란민들은 하천변에 천막을 치고 살았는데, 문씨 가족은 그나마 우리 집에서 셋방살이를 했다고 어머니가 말했다”고 전했다.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배씨는 조금 더 들려줬다. “여기 살던 사람도 땅 가진 사람이 드물었는데, 피란민들은 더 힘들었겠지. 쌀밥 구경도 힘들고 고구마로 버티고 칡뿌리 빻아 먹었다던데.” 옆에 앉아 있던 배씨 어머니 추경순씨도 “피란민들이 욕봤지”라고 거들었다.
“문재인도 기억 못할 생가인데”
전쟁이 끝나자 대부분의 피란민들은 명진리를 떠났다. 문 전 대표 가족도 문 전 대표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직전 부산 영도로 이사를 갔다.
배씨 가족들 사이에서 문 전 대표가 화제가 된 것은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갔을 때다. 어머니 추씨가 알아봤다. 그 뒤 문 전 대표가 정치에 뛰어들면서 배씨는 동네가 시끌벅적해졌다고 했다. 풍수지리를 본다는 사람들이 찾아오고, 관광객도 오고, 보기 힘든 정치인들이 나타났다.
“여기 동네에서는 (옛 주민들이) 다 돌아가시고 문재인씨를 기억하는 사람은 내 어머니밖에 없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마구간에서 낳았다’고 유언비어를 말하는 사람도 있고, 거머리처럼 (문씨를) 따라다니며 인연 만들려는 사람도 많다. 막상 선거 결과 보면 고향이라고 해도 찍는 사람 별로 없더라.” 정치인의 생가를 두고 벌어지는 해프닝에 배씨는 혀를 찼다. “문재인씨도 기억 못할 생가인데….”
초가집이 주는 교훈이 뭘까.
대통령이 태어난 집, 이른바 ‘생가’들을 9월6일 방문했다. 경북 구미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와 경남 김해에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가다. 이 밖에 대통령의 생가는 경남 거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생가, 전남 신안군 김대중 전 대통령 생가 등이 보존돼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는 1993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구미시가 관리한다. 구미시로 들어가 ‘박정희로’를 따라가면 생가와 동상 등이 있는 기념공원이 나온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가 남아 있다. 사랑채는 옛 농가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안채는 현대화된 시멘트 건물이었다. 생가를 안내하는 관계자는 “안채는 한국전쟁 때 소실된 뒤 대통령 형님이 초가집을 지어 살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당선된 뒤 시멘트 건물로 다시 개축했다”고 설명했다.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사랑채에는 ‘박 대통령께서 공부하시던 방’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방 안쪽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쓰시던 책상, 책꽂이, 초롱불’이라는 설명과 함께 유품이 전시돼 있다. 민속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된 물품들이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돌아가 가난한 집 자제가 공부하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도 차이가 없을 듯했다. 관람객들은 방 내부엔 큰 관심 없이 밖에서 기념사진을 찍기 바빴다.
생가보다 관람객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생가 아래에 위치한 ‘민족중흥관’과 ‘보릿고개 체험장’이다. 민족중흥관은 박 전 대통령의 ‘새마을운동’과 ‘경제 근대화’ 위주로 전시물을 구성했다. 한국의 발전을 박 전 대통령의 치적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뚜렷했다. 반면 박 전 대통령의 독재를 낳은 유신헌법과 시민의 반발, 비극적 죽음 등 공과를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은 없었다. 비좁은 흙집과 민족중흥관을 함께 본다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인물이 각고의 노력 끝에 큰 인물로 성장하는 ‘우상’의 서사가 자연스레 완성된다.
이런 우상화를 구성하는 대규모 사업인 구미 박정희 생가 주변 공원화 사업에 2017년까지 시비 등 286억원이 투입된다. 박 전 대통령 동상 주변으로 새마을운동 테마공원 사업도 추진되고 있는데 여기에도 785억원을 쓴다.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가 역시 전형적인 농촌 초가집이었다. 방 안에는 책상과 붓이 놓여 있고, 오래된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이 집에서 8살 때까지 살았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이 어릴 적 살았던 집이라는 의미 외에 다른 것을 찾기 힘들다. 이 생가에 대한 설명을 보면. 생가 복원 전 이 장소는 시민들이 노 전 대통령을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던 곳이라고 한다.
어떤 인물의 현재와 미래를 만든 과거와 대화하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대통령들의 생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사람’ 외에 더 많은 정보를 주지 않는다. 이를테면 예수가 마구간에서 태어난 게 중요할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후 예수의 행적이었고, 이를 본 사람들이 예수를 따랐다는 점일 것이다. 현재의 ‘생가’는 관광지에 가까울 뿐이다.
음성·창녕·거제·부산=글·사진 이완 기자 wa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