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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당당한 소신, 외로운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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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1-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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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후된 정치문화에 맞서는 김홍신 의원… 당에선 왕따당해도 밖에선 호응

사진/ 당 지도부의 눈엣가시가 될지라도…. 국회 보건복지위에서 강제로 방출당한 김홍신 의원은 정당민주화를 요구하고 있다.(이용호 기자)
지역구 민원예산을 챙기는 창구로 전락한 국회 예산결산위원회, 법인세 인하 논란을 둘러싼 여야의 힘겨루기와 파행, 법정시한을 넘긴 새해 예산안 처리…. 2001년 국회 역시 연례행사인 낯익은 풍경들로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런데 좀 낯선 풍경 하나가 돌출됐다. 김홍신 의원의 농성이 바로 그것. 크리스마스 이브인 2001년 12월24일 의원회관 302호, 김 의원 사무실에는 푸른색 담요 3장이 깔렸다. ‘국회의원의 양심과 소신을 지키기 위한 농성장’이라는 큼직한 글귀도 내걸렸다. 농성은 2002년 1월1일부터 시작될 국민건강보험 재정통합을 둘러싼 찬반논쟁에서 촉발됐다. 그러나 그 속에는 현실정치의 한계와 가능성이 고스란히 응축돼 있다.

농성장 지키는 보건복지위 최고 선량


“당 안팎에서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들은 내가 당론을 어겼다고 말한다. 나는 누구를 비판하거나 당을 궁지로 몰 생각은 없었다. 최소한 반대토론이라도 거쳐 당론을 제기했다면 이렇게까지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표결에 기권해 충돌만은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원칙마저 무시당한 현실 앞에서 양심과 소신을 꺾고 침묵할 수는 없었다.” 12월27일 초췌한 김 의원은 기자에게 이렇게 입을 열었다. 내부토론 없이 일방적 당론만 강요하는 낙후된 정치문화에 대한 저항의 몸짓이라는 설명이다.

김 의원이 최근까지 경험한 정치현실은 상식의 잣대로는 좀 이해하기 힘들다. 그는 자타가 공인한 보건복지위 최고의 선량이다. 시민단체는 지난 15대 국회 4년 동안 빠짐없이 그를 의정활동 우수의원으로 꼽았다. 그러나 2000년 4·13 총선(16대) 공천 초반 당선권 밖으로 밀렸다. 한나라당 지도부가 당론보다 소신을 앞세운 그의 충성심에 의문을 제기하며 전국구 후순위에 배치한 것이다. 모범적인 의원을 제거한다는 당 안팎의 비판여론이 겨우 그를 살렸다. 여론에 부담을 느낀 이 총재는 당선권인 전국구 16번에 재배정했다. 김 의원은 이런 위기를 겪은 뒤에도 하달식 당론을 거부하는 뚝심을 보이며 지도부를 괴롭혔다. 지난해 11월 김원웅, 서상섭, 안영근 등 같은 당 의원들과 국가보안법 폐지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총재가 “국보법 폐지는 시기상조”라고 당론을 밝혔지만 당 홍보위원장인 그는 반란을 주도했다. 지난해 2월22일 복지위 소속 한나라당 의원 모두가 주사제를 의약분업에서 제외하는 법안에 찬성했다. 김 의원만 열외였다. 그는 당론을 거부한 채 반대표를 던졌다. 당 지도부에게 그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여론지지 때문에 두고 볼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지난해 11월 중순 국민건강보험 재정분리를 당론으로 확정한 한나라당 지도부는 줄기차게 김 의원을 압박했다. “자영업자 소득파악과 보험료 부과체계가 개선되지 않은 상황에서 재정통합은 미봉책”이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재정통합을 외쳐온 김 의원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20년 논란 끝에 여야가 합의한 재정통합을 이제와 다시 뒤집는 데는 다른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내년 대선을 의식한 이회창 총재가 한국노총의 로비에 굴복했다는 당 안팎의 공공연한 비밀을 공개한 셈이다. 참다 못한 지도부는 지난해 12월24일 김 의원을 보건복지위에서 강제 방출했다. 이재오 총무는 “야당이 정책을 당론으로 정하고 소수의견 1∼2명의 반대로 통과시키지 못하는 일은 더이상 없을 것”이라며 그를 환경노동위원회에 배치했다. 대신 환노위 박혁규 의원을 보건복지위로 보임시켜 재정분리안 표결을 강행했다. “김 의원이 더이상 거부하거나 반발하는 것은 해당행위”라는 경고도 덧붙였다.

상임위에서 방출된 김 의원의 신세는 정말 처량했다. 동료 의원들이 보건복지위에서 재정분리 법안을 통과시키는 모습을 방청석 뒷자리에 앉아 힘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추수 끝난 겨울 들판에 홀로 선 허수아비 같았다. 왕따와 비방, 인신공격도 이어졌다.” 당시 심정을 이렇게 되뇌었다.

상임위 강제 방출해 인신공격까지

사진/ "양심과 소신을 위하여…" 국회 의원회관에서 농성을 벌이는 김홍신 의원.(이용호 기자)
그러나 이런 수모는 그의 소신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역설적 결과를 가져왔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이 상임위에서 장기판 말 바뀌듯 교체되는 현실에 고민하던 김 의원은 의원회관에 담요를 깔았다. “처음에는 삭발단식을 고려했다. 그런데 행동이 합리성을 잃으면 명분도 잃는다는 충고가 잇따랐다. 잔잔한 의견 개진과 합의를 이끄는 데는 농성이 최선이라고 결론냈다.” 예상대로 농성장에는 격려와 찬사가 쏟아졌다. 몇몇 가톨릭 신부들은 그와 함께 담요 위에 앉아 기도했다.

김 의원은 이런 성원을 국회 바로세우기와 정당민주화 요구로 확대재생산하는 순발력을 발휘했다. 먼저 자신이 겪은 수모를 근거로 국회법 개정의 불씨를 지폈다. 의원동의 없는 상임위 강제교체를 금지시키자는 것이다. 이부영, 김원웅, 서상섭, 조정무 의원 등 이른바 한나라당 내 ‘독립군 4인방’이 “의원의 소신을 눌러 당론을 관철하는 방식은 양심과 소신에 따라 의정활동을 해야 한다는 헌법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며 동참을 선언했다. 이어 이재정, 김성호 의원 등 민주당 개혁파가 가세했고, 12월27일 국회법개정안 제출로 열매 맺었다. 개정안은 현재 교섭단체 대표의원(원내총무)이 갖고 있는 상임위원 선임요청권은 인정하되, 해당 위원의 의사에 반해 상임위를 교체할 수 없도록 단서조항을 첨가했다.

그동안 국회 상임위 배정 논란은 직접 이해관계가 얽힌 의원들을 관련 상임위에서 배재하는 쪽에 맞춰졌다. 의원 개인의 이익과 특정집단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 입법과정을 왜곡하는 것을 막자는 취지였다. 시민단체도 여기에 초점을 맞췄다. 반면 여야 지도부가 당론 관철을 명분으로 의원들의 상임위를 교체하는 부조리는 주목받지 못했다. 공천권에 목맨 의원들이 지도부의 강요를 못마땅한 현실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법안이 처리될 경우 당 지도부의 입맛에 따라 상임위원을 교체투입해온 낡은 관행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 김 의원은 위헌소송까지 검토중이다. 국회법이 양심의 자유를 규정한 헌법정신에 위배된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소송을 제기할 경우 입법기관이 자신의 운용틀인 국회법의 정당성에 대한 판단을 사법기관에 맡기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김 의원은 이번 사태로 지옥과 천당을 오갔다. 같은 당 동료의원에게 왕따당하며 6년 동안 몸담은 보건복지위에서 방출됐다. 하지만 국민적 인기는 오히려 치솟았다. 그의 홈페이지는 동시에 600여명이 접속을 시도하는 인기 사이트가 됐다. 지방자치개혁연대 등 일부 시민단체는 김 의원을 서울시장 후보로 영입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 김 의원조차 “뜻밖”이라며 놀라고 있다.

반면 한나라당 지도부는 당황하고 있다. 당장 당 안팎의 반발에 밀려 재정분리안 본회의 처리를 내년으로 미뤘다. 성과없이 퇴각한 교원정년연장 파문 악몽이 완전히 가시기 전에 또 한 차례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이 총재의 한 측근의원은 “재정분리법은 내년 초 반드시 관철할 것”이라면서도 “김 의원 등이 완강히 버티고 있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같은 당 보건복지위 소속 심재철 의원은 김 의원의 순수성에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 “지난해 5월 김 의원이 지역가입자의 소득파악률이 저조한 상태에서 통합은 적절치 않다며 3년간 유예하는 입법안을 마련해, 다른 의원들에게 공동발의를 요청한 적이 있다”면서 “진정한 소신이 뭐냐”고 공개질의서를 낸 것이다. 김 의원이 인기에 영합해 돌출행동을 일삼고 있다는 비판이다.

김 의원은 해명은 간단했다. “재정통합 법안도 통과되지 않은 당시 상황에서 정치권 일각이 재정분리법안을 제출했다. 비슷한 법안을 충돌시켜 경합심리함으로써 분리법안을 사장시키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한번도 재정통합의 대의를 바꾼 적이 없다.” 통합법안 관철을 위한 물타기 법안이었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소신과 양심을 가둘 건가

그는 오히려 재정분리를 주장하는 한나라당 지도부와 동료 의원들에게 “현실을 제대로 말하고 토론하자”고 촉구했다. “한나라당은 자영업자 소득파악 부족을 명분으로 재정통합을 미루자고 말하지만 그 반대다. 지난 20년간 논란이 된 문제다. 이 총재도 통합을 공약했었다. 사회적 투명성은 저절로 확보되지 않는다. 일단 시행한 뒤 소득파악을 좀더 개선하는 게 최선이다. 더욱이 직장보험은 월급만으로 평가하지만, 자영업자는 소득과 재산, 자동차, 경제활동 인구 등 4가지를 종합파악해 중복과세하고 있다. 제도는 이미 갖춰졌다. 실천이 문제다.”

김 의원은 또 “소신과 양심을 인정하는 민주적 문화가 정당 운영의 최소 덕목이고, 진지한 토론없이 진정한 지도력은 있을 수 없다”며 자유투표 당론화와 보건복지위 복귀를 공식 요구했다. 그의 뚝심과 소신은 이래저래 한나라당의 골칫거리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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