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옷이나 갈아입으시라
중동 붐
등록 : 2016-05-09 15:31 수정 :
4·13 국회의원선거(총선) 결과가 이렇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청와대는 분명 확고한 계획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단 말들을 강력하게 ‘단속’하며, 정말 별다른 걸 해낸 게 없는 이 정부의 초라함을 적절히 ‘메이크업’하며, 국정 기조의 큰 개조나 전환 없이 하던 대로 ‘쿨’하게 임기를 마무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22 대 123’의 여소야대 정국에선 그게 안 된다. 통째로 틀어졌다. 사소한 갈등조차 모두 레임덕(권력 누수 현상)의 징후로 읽힐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의 카리스마는 ‘선거의 여왕’이란 업적을 바탕으로 유지되던 것이었다. 유승민 의원을 내쫓은 청와대의 결기는 친박 유기준 의원의 원내대표 출마 문제를 정리하지 못할 정도로 쪼그라들었다. 친박 핵심 실세가 야심차게 ‘양적완화’ 카드를 꺼내들었는데, 그게 뭐든 쌍수 들어 환영해야 마땅할 보수언론들은 ‘한국은행이 재경부 남대문 출장소냐’고 바른말을 한다. 하던 대로 해선 되지도 않고 뭘 할 수도 없는 지경이다.
‘제2의 중동 붐’은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서 ‘쿨하지 못해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진 청와대가 부랴부랴 꺼내든 다급수다. 검찰이 ‘캐비닛’을 열어 5년 만에 ‘옥시 사태’를 점화하며 선거 이후 정국 전환을 시도해봤지만,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과 가래로 막아야 하는 것은 다르(다고 권력은 생각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루사리’(이슬람권 여성이 쓰는 전통 두건) 한번 썼을 뿐인데 ‘인프라·에너지 재건 등 30개 프로젝트에서 양해각서(MOU) 및 가계약 체결’이 되고, ‘371억달러를 수주하고 최대 수주액은 456억달러(약 52조원)’(안종범 경제수석)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일 좀 하는 티가 나지 않겠는가.
이 발표가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 자원외교 보고 놀란 가슴 MOU 보고 또 쓸어내리는 심정이 무엇인지는 길게 말하지 않겠다. 다만, 어떻게든 기량을 발휘해 권력 누수 방지에 최선을 다해보려는 분들께 한 사내의 이름을 기억해두라 권하고 싶다.
그는 한때 ‘왕차관’이라고 불렸다. 의전의 위계가 철통 같은 관료사회에서 고작 차관 주제에 툭하면 기업 총수 수십 명과 함께 전용기를 타고 오대양 육대주를 누볐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다이아몬드가 한국 경제를 바꾸네, 에너지 강국으로 본격 입국하네 하는 주옥같은 소리들이 쉴 새 없이 활자화됐다.
그 사내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그 정부에서 호가호위하던 이들 중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처절하게 감옥살이를 했다. 만기 출소를 하루 앞두고 또 구속영장이 발부될 정도였다. 박근혜 정부 초기 최약체이던 야당이 이른바 ‘사자방(4대강, 자원외교, 방산비리) 국정조사’를 외칠 수 있었던 까닭 중엔 희화화된 그 사내의 처지도 있었다.
그 사내의 이름은 박영준이다. 지식경제부 차관 시절, ‘상왕’으로 불리던 이명박 대통령의 형 이상득 전 의원과 함께 자원외교를 총괄했다. MB는 정국이 수세에 몰릴 때마다 자원외교 카드를 빼들었다. 박근혜 정부 역시 큰 틀에서 보자면 내치의 문제가 닥칠 때마다 외유를 떠나는 방식을 취해왔다. 하지만 이번처럼 노골적이지 않았다. 차라리 쿨하게 옷이나 갈아입는 둔갑술이 낫다. 그건 하루이틀 공론장의 주목을 갈취하는 행위다. 하지만 이런 사기술은 되든 안 되든 훨씬 지능적으로 공론을 ‘폐허’로 만든다.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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