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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한표에 꺾인 거야의 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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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2-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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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잇단 독주로 역풍 휩싸여… ‘한-자 공조’ 파기로 정국주도권에 제동

사진/ "이때까지도 잘 나갔는데…." 지난 11월29일 국회 법사위에서 한나라당 의원과 김학원 자민련 의원이 기립 표결하고 있다.(한겨레 이종근 기자)
“거대야당의 한계는 딱 1표다.” 거칠 것 없을 것 같던 한나라당의 발걸음이 주춤거리고 있다.

지난 11월 ‘잘못된 개혁정책을 되돌려놓겠다”며 야심차게 추진한 교육공무원법 개정안을 철회한 데 이어 12월8일 신승남 검찰총장 탄핵소추안에서 또 쓴잔을 마셨다. 교원정년을 63살로 1살 늘리는 내용을 포함한 교육공무원법 개정안의 경우 “개혁정책 뒤집기”, “다수의 횡포”라는 비난여론에 밀렸다. 신 총장 탄핵소추안의 경우는 본회의 표결을 강행했다가 민주당이 “개표과정 감표에 참여하지 않겠다”며 본회의장을 퇴장하자 결국 투표함 개함을 포기했다. 탄핵소추안이 본회의에 보고된 이후 24~72시간 이내에 처리해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자동폐기된 것이다.

탄핵소추안 투표함을 열지 못한 까닭


이재오 한나라당 총무는 본회의 뒤 “민주당과 자민련이 감표요원을 참여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개표를 못하게 막았다. 이런 반의회적 폭거에 대해 국민에게 심판을 물을 것”이라며 탄핵안 자동폐기의 책임을 민주당과 자민련의 술수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이번 검찰총장 탄핵안 처리과정은 국회 과반수인 137석에서 1석 모자라는 136석의 거대야당의 한계를 보여준 사례라는 게 정치권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한나라당은 애초 신 총장 탄핵소추를 추진할 때만 해도 자신만만했다. 10·25 재·보선 승리의 자신감에 자민련과의 ‘한-자 공조’체제가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처음 신 총장에 대한 공세를 예고한 것은 11월16일. 김기배 총장은 당3역회의에서 “진승현 게이트 등 각종 비리사건에 국정원 고위간부들이 개입하고 검찰이 축소수사를 하고 있다”며 신승남 총장과 신건 국정원장의 사퇴를 주장한 것이다. 한나라당은 이후 자민련과 공조해 신 총장 탄핵소추안을 처리할 방침을 세운 뒤 명분을 쌓아갔다.

11월28일 신 총장에 대한 법사위의 출석요구안 의결은 첫 수순. 한나라당은 신 총장이 “수사중인 사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출석을 거부하자 12월5일 본회의에 신 총장 탄핵소추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순탄하기만 했던 탄핵안은 공조를 유지해왔던 자민련이 6일 탄핵반대로 돌아서면서 제동이 걸렸다.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6일 “검찰총장이 책임지고 사퇴해야 한다고는 했지만 탄핵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밝힌 것이다.

10·25 재·보선 뒤 한나라당은 거야의 위력을 등에 업고 수권정당으로서의 위상을 분명히 자리매김하겠다는 전략이었다. 당 내분과 DJ의 총재직 사퇴 등으로 갈짓자 걸음을 걷고 있는 민주당과 차별화를 시도하며 국가지도자 이회창 총재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한때 대여공세를 자제하고 유연한 태도를 보였던 것은 이런 포석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유화국면은 오래 가지 못했다. 거야의 자신감이 탄력을 받으면서 이번 기회에 DJ의 대선 중립을 분명하게 보장받자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한나라당의 대여공세도 다시 강경으로 돌아서게 됐다. 이런 강경 목소리는 정계개편설이 끊이지 않는 등 불안정한 정치현실과 함께 과연 DJ가 민주당 총재직을 내놓았다고 중립을 지키겠느냐 하는 의구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 탄핵소추안은 이런 맥락에서 추진된 전략의 일환. 신 총장의 탄핵소추안에는 “누구든 대선정국에서 함부로 움직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 메시지가 포함돼 있다.

그러나 결과는 신통치 못했다. 자민련의 반대로 탄핵안은 무산됐다. 더욱이 무리한 교원정년 연장 추진 등으로 ‘오만한 야당’이라는 비판에 직면했고 국민여론도 나빠졌다. 실제 한국방송이 5일부터 이틀간 전국 성인남녀 12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기관인 ‘TN스프레스’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오차범위 ±2.8%)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 민주당의 다른 대선주자들의 격차가 오차범위 안까지 좁혀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인제 상임고문과의 가상대결에서는 37.6% 대 36.9%로 0.7%포인트 차였으며, 노무현 상임고문과의 가상대결에서도 37.8% 대 32.2%로 4.6%포인트 차이였다. 불과 한달 전 10% 이상 앞서며 격차를 벌리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의 결과다.

독주 비판여론 거세… 이회창 지지율 추락

사진/ 한나라당의 정국주도권이 흔들리고 있다. 최근 이회창 총재의 지지율이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한겨레 이종근 기자)
한나라당은 이런 역풍에 대해 당황하는 모습이다. 이 총재의 한 측근은 “우리 내부조사 결과와는 다르다. 이회창 후보의 독주체제에 아직 변함이 없다”고 여론조사의 신뢰성에 의문을 보내면서도 최근 급변하는 여론의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한나라당으로서 다행스러운 것은 이번 신 총장 탄핵안 추진과정에서 나름대로 명분을 얻었다는 점. 한나라당 관계자는 “이번 탄핵소추안은 교원정년 연장과는 다르다. 탄핵소추안을 성사시키지 못했지만 국민을 상대로 명분을 얻었다. 우리는 검찰에 대한 국민들의 뿌리깊은 불신을 등에 업고 이 일을 추진했기 때문에 잃을 게 별로 없다”고 말했다.

속사정은 그렇지만 않다. 탄핵안 처리과정에서 자민련과의 공조가 깨져 앞으로 정국주도권 행사를 자신할 수 없게 됐다. 한나라당은 그동안 민주당과 다른 정체성으로 분명한 대정부 견제에 나설 계획이었다. 이른바 ‘잘못된 개혁 바로잡기’였다. 이런 명분으로 이번 정기국회에서 자민련과 공조해 몇 가지 법안들을 함께 추진할 계획이었다. 교원정년 연장을 내용으로 하는 교육공무원법과 방송위원회 구성방식 변경을 포함한 방송법, 남북교류추진협의회 위원 일부를 정당추천으로 하자는 남북교류협력법, 일정금액 이상의 기금사업은 국회동의를 받도록 하는 남북협력기금법, 검찰총장·국가정보원장·경찰청장·국세청장·금융감독원장 등 권력기관장을 인사청문회 대상으로 포함하는 인사청문회법 등이다. 자민련과의 공조가 없다면 통과를 장담할 수 없다.

이 때문에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최근 자민련을 섭섭하게 한 데 대한 전략적 실책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12월6일 의원총회에서도 안상수 의원이 “우리가 자민련에 대해 지나치게 공격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자민련과 충분히 공조한다고 해놓고 이번에 너무 서두른 것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실제 자민련은 한나라당이 함께 추진하던 교육공무원법 개정안을 아무 상의없이 철회한 점, 또 최근 이회창 총재가 11월19일 김용환·강창희 의원의 영입 이후 충청권 행보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등 자신들의 텃밭을 뒤흔든 점 등에 대해 크게 못마땅해했다.

한나라당 주류는 자민련을 안고 가기 위해 몸을 굽힐 뜻은 없다는 쪽이다. 이회창 총재도 6일 탄핵안 처리를 앞두고 “자민련을 쫓아다니면서 설득해야겠지만 도망다니는 사람을 언제까지 쫓겠느냐. 설득하다 안 돼도 우리는 정도를 간다”고 말했다. 이 총재의 한 측근는 “어차피 자민련과는 충청권에서 격돌할 처지다. 자민련을 안고 가느냐와 충청권 행보를 계속하느냐 가운데 우선순위는 지지기반을 넓히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자민련은 여전히 한나라당과 사안에 따라 공조를 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김학원 총무는 8일 탄핵안 처리 뒤 “한나라당과의 관계가 불편해졌지만 협력할 것은 협력할 수 있다. 우리는 정체성을 살리되 국가·국민을 위해 합당한 주장을 하면 (어느 당과도) 사안별로 선택 공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탄핵안 처리과정은 자민련이 언제든지 한나라당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자민련 관계자는 “우리의 살길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달았다. 그냥 따라가면 아무도 신경 안 쓴다. 그러나 캐스팅보트를 행사하면 비록 15석의 미니정당이지만 실체를 인정해준다. 우리가 갈 길은 명백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자민련 뾰족수 없어 공조 재개할 수도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생존책이 마련된 것은 아니라는 데 자민련의 고민이 있다. 이런 외줄타기는 ‘자민련=술수, 몽니’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 절대적 지지기반이었던 충청권이 잠식당하는 것은 자민련의 정치적 전망에 대한 지역민들의 실망이라는 측면이 크다. 그럼에도 자민련이 비전 제시는 소홀히 한 채 원내 전략 차원에서만 살길을 모색하는 한 대선정국의 소용돌이에 함몰할 가능성이 많다. 자민련의 핵심 당직자는 “자민련이 내년 지방선거 이전에 뭔가 보여주지 못한다면 대선국면에서 대선주자들의 세불리기에 희생돼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실정에서는 뾰족수가 없다는 게 고민”이라고 말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탄핵안 처리 과정은 거야인 한나라당이 존재의미를 찾으려는 기회주의적 캐스터인 자민련에 딴지가 걸린 것이다. 민주당은 종속변수였다. 하지만 기세등등하던 한나라당이 한풀 꺾인만큼 민주당은 몸을 빠른 속도로 추스릴 여지가 생겼다.

박병수 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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