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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워보이들 “나를 기억해줘”

남북관계와 신안보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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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8-31 22:30 수정 : 2015-09-01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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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갔던 남북이 무언가에 합의했다. 보수언론은 일제히 ‘원칙’으로 일관하며 북한을 압박한 우리 정부의 승리라며 이를 대서특필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나흘간 잠을 자지 못해 눈에 실핏줄이 터졌다며 짐짓 생색을 내 박수를 받았고,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나는 한때 전군을 지휘했던 사람이오!”라며 북한 쪽 대표단에 고성을 질렀다는 미담도 긍정적으로 평가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세 차례나 협상을 ‘나가리’ 내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이 극구 말린 덕에 합의에 이르게 됐다는 뒷말도 전해졌다. 이 모든 사실들은 아마 민주정부 시절에 이뤄진 합의였다면 북한의 책임 인정 여부도 불분명하고 재발 방지 약속도 없다며 ‘굴욕’이라 평가했을 보수언론들의 지면에 보도됐다.

남북이 40시간을 넘는 마라톤 협상을 벌여 합의에 이른 것은 서로의 필요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이 긴밀해지고 일본이 직접 중국과의 대화에 나서는 상황에서 한국은 자칫 잘못하면 외교적으로 소외되는 상황에 놓일 위기에 처했다. 북한 역시 3차 핵실험과 장성택 처형 등으로 중국과 멀어진데다 핵협상 타결 등으로 이란의 분위기도 묘해져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국제적 고립에 놓여졌다. 전승절이라는 국제적 이벤트를 앞둔 중국 역시 갈등이 격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미국도 이란 핵협상만 갖고도 고생하는 중에 또 다른 골칫덩이를 떠안는 것을 피해야 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했는데, 이렇게 보면 남북의 협상 타결은 모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특히 보수세력을 흥분시켰던 것은 젊은 세대들의 안보의식이 투철하다는 점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20∼30대 젊은이들은 군사적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국방부 페이스북과 같은 공간에 자신의 군복과 군화, 군번줄 등을 ‘인증’하며 언제든 전투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다고 적었다. 전역 연기를 선택한 현역병들도 있었다. 보수언론은 이를 적극적으로 보도하고 사설을 쓰며 ‘신안보세대’가 탄생했다고 오두방정을 떨었다.

페이스북에 군복을 인증하는 젊은이들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 등장하는 ‘워보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이 싸움에 나선 것은 무언가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자신의 멋진 모습을 인정받고 싶어서였지 거창한 명분이나 목표를 상정한 게 아니었다. 워보이들이 위험한 싸움을 강행할 때 “날 기억해줘!”(Witness me)라고 외치는 장면은 이런 맥락을 잘 보여준다.

우리 젊은이들이 애국심을 표출한 것 역시 이념에 물든 것이라기보다는 가치 있는 일을 해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가 반영된 걸로 풀이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의 자존감을 북돋워주기보다는 짓밟고 무시하고 있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지도 못하면서 ‘직업엔 귀천이 없다’는 둥 하며 실업의 책임을 청년들 본인에게 모두 떠넘기고 있다. 가끔 대책이랍시고 내놓는 건 저질 일자리를 늘리거나 고작 직업훈련을 시켜주겠다는 것 정도다.

군대는 젊은 남성이 공공성에 스스로를 복속시키는 최초의 경험을 선사하는 국가기관이다. 즉, ‘적’이 우리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젊은 남성이 무언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좋은 일’을 하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군’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그들의 이상적 군인상을 스스로 재창조하고 이를 전시함으로써 훼손된 자존감을 복원했다. 겉으론 이들은 국가주의나 극우주의에 경도된 것으로 비치지만, 이들을 움직이는 기저의 에너지는 오히려 사회적 공공성을 복원할 가능성 역시 가지고 있다. 그 힘을 어디로 이끌 것인지는 오로지 우리의 정치에 달린 문제다.

글·컴퓨터그래픽 김민하 <미디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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