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구 국방부 장관이 8월12일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해 최근 북한군의 지뢰 도발 등과 관련한 현안보고를 한 뒤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우 선임기자
지난 8월4일 비무장지대(DMZ)에서 우리 수색대원 2명이 큰 부상을 당했다. DMZ 안에 있는 ‘추진철책’의 통문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북한군이 통문 부근에 심은 목함지뢰를 밟아 당한 사고였다. DMZ에선 지뢰를 제거한 길(수색로)을 따라 수색·매복 작전을 펼친다. 우리 군은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440m를 내려와 그 길목에 지뢰를 심은 것이라고 밝혔다.
사고 당시 수색대원들의 대응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지뢰 폭발이 일어나자 작전팀장은 “적 포탄 낙하”라고 소리쳤고, 다리가 절단된 대원은 피를 쏟으며 “빨갱이”라고 격분했다고 한다. ‘북의 소행’임을 직감한 것이다. 수색중대에서 근무한 한 전직 장교는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수색로는 지뢰 위험을 제거한 길이다. 그동안 그 길을 반복적으로 걸으며 수색·매복 작전을 했는데 그 길에서 느닷없이 지뢰가 터진 것이다. 당시 수색대원들도 북의 도발 외에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8월5일 “DMZ=Dream Making Zone”?
지뢰가 터진 순간부터 북의 소행이라 느낀 수색대원들의 빠른 직관과 달리 북의 도발에 대한 정부의 사후 대응은 기민하지 못했다. 특히 북의 ‘지뢰 도발’이 청와대와 대통령에게 보고된 시점과 정부의 대처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8월12일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해 “(사고가 난) 8월4일 늦게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 가능성이 높다고 확인했고, (바로 청와대에) 보고가 됐다”고 말했다. 군의 1차 현장 조사에서 지뢰를 이용한 북의 도발이 추정됐고, 이런 내용이 청와대까지 올라갔다는 취지다.
북의 도발 ‘가능성’이 8월4일 청와대에 보고됐다면 그 시점과 내용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북이 우리 군인을 지뢰로 공격했을 가능성이 의심된 상황에서 바로 다음날인 8월5일 오전 통일부가 북한에 남북 고위급 회담을 제의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8월5일 강원도 철원에서 열린 경원선 남쪽 구간 복원 기공식에 참여해 “(남북 긴장지대인) DMZ는 ‘Dream Making Zone(꿈이 이뤄지는 지대)”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며 남북 화합을 강조했다.
이를 두고 8월12일 당시 국회 국방위에서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은 한민구 장관을 상대로 정부의 혼선을 강한 어조로 따졌다. “지뢰 사고가 터졌는데 8월5일에 대통령은 경원선 기공식에 참석하고, 이희호 여사는 평양에 가고, 통일부는 남북 고위급 회담을 제안했다. 부처 사이에 전화 한 통 안 하나. 우리 하사 2명이 (지뢰 폭발로) 중상을 입었는데, 다음날 통일부 장관이 회담을 제안하고. 정신 나간 짓 아니냐”고 질타했다. ‘한쪽(국방부)이 북에 얻어맞은 상황에서 한쪽이 바로 북에 손을 내민 것’이 적절했느냐는 지적이다.
그러자 한 장관은 “저희는 관련 사항을 보고했는데 정부 차원에선 대화와 압박을 병행한다는 정책을 갖고 있으니까 통일부에서 (8월5일에) 그런 조치를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답했다. 국방부는 지뢰를 이용한 북한의 도발 가능성(추정) 등을 청와대에 보고했으나 통일부가 8월5일 오전에 남북회담을 제안했다는 뜻으로 읽히는 답변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북한군의 지뢰 도발이 발생한 다음날인 8월5일 강원도 철원에서 열린 경원선 복원 기공식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한반도 모양의 지도 위를 걷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국방부 장관, 기억에 의존해 국회 답변?
하지만 한 장관의 국회 답변으로 정부의 안보 정책 엇박자가 부각되자 청와대는 그날 오후 기자회견을 열어 국방부 장관의 발언을 뒤집었다. 청와대는 두 비서관(국방·통일 분야)을 내세운 기자회견에서 “국방부가 4일 보고한 것은 ‘DMZ에서 미상의 폭발 사고에 의해 2명이 다쳤다’는 ‘상황보고’였고,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로 추정된다는 보고는 5일 오후에 있었다”고 정정했다. 따라서 8월5일 오전에 진행된 대통령의 경원선 기공식 참석과 통일부의 남북회담 제의는 시점상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회견 직후 국방부 대변인은 “(한 장관이) 기억에 의존해 발언하다보니 (보고 날짜에 관한 답변에서) 실수가 있었다”고 해명 자료를 냈다. 자신의 발언을 부정하는 청와대의 기자회견이 나간 뒤 부정확한 기억에 의한 실수를 고백하게 된 국방부 장관으로선 굴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한 장관의 답변이 실수였다는 해명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장관이 국회에 나올 때는 답변을 철저히 준비하게 되는데, 청와대에 보고한 시점과 같은 민감한 내용을 부정확한 기억에 의존해 답변했겠느냐는 것이다. 국회 국방위 소속의 진성준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한 장관의 발언이 청와대에 부담을 주게 되니까 청와대가 장관의 말을 뒤집어버린 것 같다”고 의심했다.
국회 국방위의 다른 관계자는 “당시 국방부 장관이 답변할 때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의 참모들이 뒤에 대거 앉아 있었다. 국방부의 청와대 보고 시점·내용과 같은 중요한 답변에 대해 장관이 실수했다면 참모들이 그 자리에서 바로 정정해줬어야 했는데 그러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한 장관의 국회 답변이 실수였다는 청와대와 국방부의 해명이 사실이라면 이를 현장에서 교정하지 않은 참모들까지 “집단적 기억상실증에 빠진 것과 같다”고 말했다.
김광진 새정치연합 의원도 “(한 장관의 국회 답변이 틀렸다는) 청와대의 말이 맞다면 장관이 국회에서 위증한 것이다. 만약 (지뢰 사고 당일에) 국방부가 (북한 도발 가능성을) 인지했는데도 (청와대의 반박 해명처럼) 8월4일에 국방부의 보고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 또한 안보 시스템이 잘못 굴러가고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치권에선 8월4일에 지뢰 폭발 사고를 보고받은 청와대 국가안보실의 기능에 의문을 품는 시각이 많다. 국가안보실이 지뢰 폭발 사고에 대한 국방부의 보고를 안일하게 판단해 국방·통일·외교 분야를 아우른 ‘컨트롤타워’(통합·조정)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북의 지뢰 도발과 관련해 국가안보실장이 주재하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사고 나흘 뒤인 8월8일에 열린 부분이다. “군의 자체 조사(8월4~5일)가 끝난 뒤, 8월6~7일 유엔사와 합동 현장 조사를 벌여 북의 지뢰 도발이 최종 확인된 이후에 NSC를 연 것”이라는 게 청와대 쪽의 설명이다.
북의 도발이 확인될 때까지 신중히 접근한 청와대의 태도가 적절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미 군의 1차 조사에서 북의 지뢰 도발이 추정된 상황이라면 NSC가 더 빨리 소집돼 국방·통일·외교 관련 부처의 소통을 조율했어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국방·안보 책임 두루 맡아온 국가안보실장
국회 국방위 소속 새정치연합 의원들은 8월13일 성명을 내어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한 폭발 사고라면 북의 소행을 의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건 당일 NSC를 즉각 소집하여 대응 방안을 논의했어야 함에도 사건 발생 후 4일이 지난 뒤에야 늑장 소집되어 도발 대응의 골든타임(중요한 시간)이 허비됐다”며 청와대의 부실한 국가 위기관리 시스템을 지적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청와대의 ‘컨트롤타워 기능 부실’이 거론될 때마다 국가안보실은 주된 비판 대상이었다. 국가안보실이 전통적 안보(국방·통일·외교) 개념에 갇혀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등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위기 상황에서 전혀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북한의 지뢰 폭발 사고와 같은 전통적 안보 상황에서조차 국가안보실이 기민하게 움직이지 못했다는 지적이 새누리당에서도 나온다.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의 사퇴론도 불거져나왔다.
국회 국방위원장인 정두언 새누리당 의원은 “(8월4일 지뢰 사고가 발생했는데도) 5일부터 통일부에서는 연일 남북 고위급 회담을 제의하고, 8일에야 NSC가 열리고 10일에 합참에서 대북 경고 성명을 냈다. 11일이 되어서야 청와대 대변인이 북한의 사죄와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다. 한마디로 국가안보와 관련한 국정 시스템의 총체적 혼선”이라고 말했다. 정 의원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책임지는 국가안보실이 무능·무책임·무원칙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국가안보실장 사퇴를 촉구한다”고 요구했다. 김관진 실장은 전·현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2010~2014년)을 지낸 뒤 지난해 6월부터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맡는 등 5년간 우리 정부의 국방·안보 책임을 맡아왔다.
정치권 일부에선 지뢰를 들고 남하한 북한군을 포착하지 못한 경계 실패에 대한 지휘 책임론도 거론되고 있다. 반면 국방부는 북한군이 지뢰를 묻은 우리 쪽 추진철책 통문 주위에 수목이 무성해 관측에 어려움이 있는 등의 제약 조건을 들며 “경계 실패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폭발 상황만 있는 영상의 허점
국회 국방위 소속의 한 의원은 “지난 6월 합참의장이 전방을 시찰하면서 ‘북한군이 기습 도발을 감행할 가능성이 높다. 짙은 녹음 등으로 적 침투 가능성이 높으니 경계 작전에 만전을 기하라’고 당부했지만 이런 일이 일어났다. 해당 부대 사단장 등 지휘관들이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말했다. 국방위의 다른 의원은 “지난해 6월 북한군이 우리 쪽의 ‘귀순 유도벨’을 누르고 귀순 안내판을 훼손해 (북으로) 돌아간 사건이 있었을 때에도 우리 군에서 무성한 수목 때문에 관측이 어렵다고 밝혔다. 이번에도 비슷하게 해명하고 있다. 추진철책 통문에 감시 장비를 설치하는 등 관측·경계 대책이 이뤄지지 않은 것과 관련해 국방부도 책임이 크다”고 말했다.
한편 북한 국방위원회는 8월14일 자신들이 목함지뢰를 매설해 도발했다는 우리 쪽 발표를 반박하며 “증명할 수 있는 동영상을 제시하라. 그것이 없다면 북 도발을 입 밖에 꺼내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방부가 최근 공개한 영상에 지뢰 폭발 순간만 있고, 정작 북한군이 지뢰를 묻는 장면이 없는 허점을 노린 것이다.
이 영상은 DMZ 안에 있는 우리 경계초소(GP)가 열상감시장비(TOD)로 찍은 것이다. 국방부는 당시 수색대원들이 폭발 상황에서도 침착히 대응했다며 군사 2급 비밀에 해당하는 이 영상을 언론에 이례적으로 공개했다. 해당 부대가 속한 군단은 이 영상을 예하 부대에 보내 장병들이 보게 한 뒤 북한군에 대응하는 결의대회를 갖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