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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워싱턴 한파에 남북 살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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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1-2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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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급회담 무위로 끝나 남북관계 위기로… 북한의 전향적 조처에도 미국은 무반응

사진/ 미국의 입김은 남북관계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9·11 테러 이후 경계가 크게 강화된 주한 미국대사관.(한겨레 강창광 기자)
남북관계에 다시금 혹독한 찬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 6·15 남북정상회담 뒤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11월9일부터 14일까지 금강산에서 열렸던 제6차 남북장관급회담은 서로에게 감정의 앙금만 잔뜩 남긴 채 성과없이 끝나버렸다. 이제 남북관계는 DJ 정부 아래에서는 끝난 게 아닌가 하는 섣부른 회의론까지 고개를 들고 있다.

북-미 적대관계 해소에 달렸다


남북관계의 근본적인 취약성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많은 전문가들은 여러 가지 원인 중에서 북-미 적대관계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번 남북장관급회담이 결렬된 것도 궁극적으로 북-미관계가 나아지지 않고서는 남북대화 진전이 명백한 한계가 있음을 다시금 입증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10월23일 북한 외무성이 낸 담화는 눈여겨볼 만하다. “미 행정부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구실로 남조선 주둔 미군 전력을 대폭 증강하고 있다. 부시 정부의 이러한 적대적인 대조선정책은 역사적인 북남 최고위급 상봉과 6·15 북남공동선언에 의하여 모처럼 마련되었던 북남관계의 완화분위기까지 일거에 냉각시켜버렸다.” 북한은 남쪽 대표들과 협상 테이블을 마주하고 손을 맞잡으면서도 항상 고개는 워싱턴을 향하고 있었던 셈이다.

예상대로 남북한은 이번 금강산회담에서 테러 비상경계조처에 대한 인식차를 좁히지 못했다. 미국의 입장을 더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남한 정부로서는 북한의 입맛을 맞출 수 없었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산가족 상봉 재개, 금강산관광 활성화를 위한 당국간 회담,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개최, 태권도시범단 교환 등과 관련해 가시적인 합의가 이뤄졌으나 남쪽 회담대표로 나섰던 홍순영 통일부 장관의 미숙한 협상력이 일을 그르쳤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정부 관계자들은 비록 이번 회담에서 일정한 성과가 나왔더라도 북-미관계가 제자리에 멈춰 있는 한 언제든지 역풍을 맞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북한 내부사정에 밝은 소식통들은 북한 지도부의 고민이 생각보다 깊다고 얘기한다. 최근 평양을 다녀온 한 관계자는 “북한 지도부는 애초 남북관계를 어느 정도 궤도에 올려놓으면 북-미관계도 비슷한 수준으로 따라올 것으로 판단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막상 남북정상회담을 시작으로 이산가족 상봉, 경의선철도 연결, 개성공단, 금강산 육로관광 수용 가능성 등 이전에 생각도 못했던 전향적인 조처들을 실천했거나 제안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1년이 넘도록 대미관계는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데 적지 않은 위기감을 갖고 있다는 게 이 관계자의 전언이다. 남한을 지렛대로 미국을 움직여보겠다는 구상이 큰 차질을 빚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꾸준히 남북대화를 내세워 미국을 겨냥한 화해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북한은 지난 11월7일에도 <중앙방송>을 통해 “여러 곡절에도 불구하고 남북간에 제6차 남북장관급회담이 금강산에서 열린다”면서 “조-미관계도 마찬가지”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작 미국은 북한 지도부의 속내를 잘 읽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손을 내밀지 않고 있다. 공은 북쪽에 이미 넘어갔으며 미국으로서는 답답할 게 없다는 식이다. 토머스 허바드 주한미국대사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북한과의 대화에 아무런 전제조건이 없다”고 거듭 주장하면서도 “재래식 무기 감축은 반드시 논의돼야 한다”고 밝히듯이 계속 북한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고민은 핵, 미사일 등은 어느 정도 양보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재래식 무기 감축은 사정이 다르다는 점이다. 재래식 무기 감축에 관한 한 핵심 군부세력의 입장은 확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반도에 주둔해 있는 주한미군 감축이라는 상응하는 조처가 보장되지 않는 한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것이다.

북한 압박하며 “원점에서 다시 출발”

사진/ 남북관계의 찬바람은 언제 사라질 건가. 지난 11월14일 남북장관급회담이 결렬된 뒤 홍순영 남쪽 수석대표가 김령성 단장을 뒤로 한 채 회담장을 떠나고 있다.(한겨레 강창광 기자)
또 북한은 “최소한 클린턴 행정부의 마지막 시기에 취했던 입장수준에서 (북-미대화)가 재개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북-미 사이에는 양국간의 적대관계 종식을 선언하는 북-미 공동코뮤니케가 발표됐고, 북한을 테러지원국가 리스트에서 삭제하기 위한 막바지 협상이 전개됐다. 뿐만 아니라 북한은 클린턴 대통령을 평양에 불러들여 미국이 가장 우려했던 미사일의 실험발사 및 수출 중단까지 약속할 준비가 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북쪽의 제의에 대한 미국쪽 입장은 단호하다.

북한과의 이런저런 실무협상을 도맡아했던 토머스 허바드 주한미국대사는 지난 10월23일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북한이나 한국이 분명히 이해해야 하는 것은 부시 행정부가 클린턴 행정부 때 하던 일을 그대로 연속적으로 행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것”이라면서 “부시 행정부는 나름대로 자체적인 정책을 갖고 일을 수행하고 있고 이 정책을 북한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북-미대화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부시 행정부의 기존 입장을 확인한 셈이다.

당연히 시간이 흐를수록 갑갑하게 생각하는 쪽은 북한이다. 북한은 남북정상회담 이후 많은 서방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하는 등 국제무대에 데뷔하기 위해 숨가쁘게 달려왔다. 이런 제스처는 사실 상당부분 미국을 겨냥한 것이었으나, 정작 미국은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있을 뿐 이렇다 할 정책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미국이 현재 벌이고 있는 테러전쟁과 관련해서도 북한은 애를 태우고 있다. 테러행위에 유감을 표명하고, 테러재정지원금지 국제협약, 인질반대 국제협약에 서명할 것이라고 밝히는 등 클린턴 행정부 때도 미뤘던 조처들을 취하면서 미국쪽에 나름대로 성의를 보이고 있으나 미국의 반응은 무덤덤하다. 미국은 국무부 대변인을 통해 원칙적으로 북한의 조처를 환영한다고 밝히면서도 이 정도로는 부족하니,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하라고 은근히 압력을 넣고 있다. 북쪽에서 불평의 소리가 안 튀어나올 리 없다. 북한의 <조선중앙통신> 등은 미국이 북한의 반테러 국제협약 가입결정을 환영하면서도 테러지원국 해제라는 실질적인 조처를 취하지 않고 있다고 볼멘 소리를 냈다.

북한의 미국 유인책도 무용지물

사진/ 북한은 북-미관계가 클린턴 행정부 수준에서 지속되길 바라고 있다. 지난해 10월10일 조명록 북한 국방위 제1부위원장이 백악관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AP 연합)
북한이 미국을 유인하려는 시도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북한은 최근 유엔주재 북한대사를 외교부 북미국장을 지냈던 리형철에서 박길연 외무성 부상(차관)으로 바꿨다.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채널로 주로 유엔주재 북한대사를 활용해왔다. 북한은 북-미간의 대화채널을 차관급으로 격상시킴으로써 부시 행정부의 좀더 적극적인 조처를 촉구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북한은 미국과의 물밑접촉에서 클린턴 전 행정부 때 수준의 장·차관급 고위급회담으로 돌아갈 것을 줄곧 주장해왔다. 하지만 미 행정부는 차관보다 격이 낮은 잭 프리처드 한반도평화회담 특사만으로 충분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북한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뭔가 마음먹고 대남 혹은 대미관계에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하면 꼭 엉뚱한 사건이 터져 방향을 돌려놓는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운이 따르지 않는 것이다.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빌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방문계획이 고어-부시 대선후보 사이의 플로리다 재검표 공방으로 질질 시간을 끌다가 무산되는가 하면, 남쪽에서 약속한 전력공급이 순조롭게 진행되는가 싶더니 미국이 반대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돼버리기도 했다. 올 10월에도 이산가족 교환을 비롯해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및 경의선철도 연결과 관련해 각종 당국간회담 등을 연 뒤 그 성과에 발맞춰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하려던 계획도 9·11 테러사건으로 온통 헝클어져버렸다. 남북문제는 양쪽의 의지만으로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다시 한번 곱씹게 하는 대목들이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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