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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렇게 정확한 ‘데스노트’

검찰이 내린 잠정 결론의 의문점… 청와대 가이드라인을 따라가던 검찰,
조응천 전 비서관 “7인 모임, 양천 모임은 조작” 주장과도 맞닥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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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2-19 14:24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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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청와대의 뜻대로 흘러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측근으로 알려진 정윤회씨의 국정 운영 개입 의혹 사건이 터지자마자 “찌라시일 뿐”이라고 반복적으로 강조해왔다. 청와대 ‘문고리 3인방’으로 알려진 이재만 총무비서관, 정호성 1부속비서관, 안봉근 2부속비서관도 관련 내용을 강하게 부인했고, 지난 12월10일 검찰에 출석한 정윤회씨도 ‘정윤회 국정 개입 보고서’ 내용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발맞춰 이 사건을 수사하는 검찰까지도 청와대·정윤회씨와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검찰은 현재까지의 수사 과정을 통해 ‘정윤회 국정 개입 보고서’의 진위에 대해 ‘보고서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잠정 결론을 내린 상태다.

비선 실세 의혹을 받는 정윤회씨가 지난 12월11일 새벽 서울중앙지검에서 검찰 조사를 받은 뒤 건물 밖으로 나오고 있다. 그의 차량을 쫓는 취재 차량의 접근을 검찰에서 제공한 차량이 가로막는 등 새벽의 추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겨레 김봉규 기자
검찰이 서둘러 이런 결론을 내린 근거는 이렇다. 이른바 ‘십상시 모임’으로 알려진 모임이 실제 있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관련자들의 휴대전화 통화 내역 등을 조사하고 해당 음식점을 압수수색했으나 실제 모임이 있었다는 정황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또 다른 근거로는 ‘정윤회 보고서’를 작성한 박관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경정)이 ‘정보의 근원지’로 지목한 박동열 전 대전지방국세청장이 검찰 조사에서 관련 내용을 부인했다는 점이다. 박 전 청장은 지난 12월9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정씨가 가끔 청와대 사람들을 만난다’는 얘기는 박관천 경정에게 했으나 그다음 단계부터는 박 경정이 완전히 소설을 썼다”고 주장했다.

보고서 속 사람들 자리에서 물러나

그러나 검찰이 내린 잠정 결론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먼저 박 경정이 과연 보고서에 ‘소설’을 썼다고 확증할 수 있는가 하는 지점이다. ‘정윤회 보고서’ 내용을 살펴보면 정윤회씨가 ‘십상시 모임’에서 했다는 발언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이는 참석자가 발언 내용을 직접 전한 것이 아니라면 쓰기 힘든 내용이다. 또 보고서에는 정윤회씨가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에 대한 얘기뿐 아니라 김덕중 전 국세청장과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현 새누리당 의원)에 대해서도 발언한 것으로 전해진다.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보고서에는 정윤회씨가 김 전 청장에 대해 ‘김덕중 국세청장이 일을 제대로 못한다. 장악력이 부족하다’고 발언한 내용이 적혀 있다. 또 이 전 수석에 대해서는 ‘이정현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으니 비리나 문제점을 파헤쳐서 빨리 쫓아내라’고 발언했다고 돼 있다. 검찰이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보고서 내용처럼 실제 이 전 수석과 김 전 청장이 각각 6월과 8월에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점이다. 정윤회씨의 인사 개입 의혹이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정황이다.

또 다른 의문점은 보고서를 작성한 박관천 경정에게 ‘정윤회씨가 가끔 청와대 사람들을 만난다’는 정보를 준 박동열 전 청장에 대한 것이다. 검찰은 최근 박 전 청장이 이 정보를 광고업체 대표 등 복수의 인사에게 들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이 인사들은 청와대 관계자는 아니라는 것이 검찰의 설명인데, 이 설명대로라면 박 전 청장이 전한 ‘정윤회씨가 청와대 사람을 만난다’는 정보는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박 전 청장은 국세청 세원정보과장을 지내는 등 국세청 내부에서 유명한 정보통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더구나 박 전 청장은 박 경정이 ‘십상시 모임’과 관련된 최초 정보원으로 지목한 김춘식 청와대 기획비서관실 행정관과 동국대 동문으로 친분이 있고, 청와대 3인방 가운데 한 명인 안봉근 청와대 제2부속비서관과 동향(경북 경산)으로 서로 오래 알고 지냈다고 한다. 박 전 청장의 진술만 믿고 정보의 출처가 ‘근거 없다’고 속단하기 힘들다는 의미다.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도 언론 인터뷰에서 보고서의 신빙성에 대해 “6할 이상이 사실”이라고 한 점 등에 비춰봤을 때 검찰이 보고서 내용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라고 결론지은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유출한 혐의 경위, 구속영장 기각

검찰의 조사 과정에도 의문점이 있다. 일각에서는 검찰이 지난 12월10일 정윤회씨를 소환한 것이 일종의 ‘보여주기식 조사’가 아니었는가 하는 비판이 일고 있다. 정씨가 소환돼 조사를 받은 시점은 이미 검찰이 ‘십상시 모임은 없었다’는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또 검찰이 십상시 모임의 진위를 철저하게 수사하려고 했다면 정씨를 소환하기 이전에 정씨의 거처나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 등 강제 조사를 통해 물증 확보를 했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런 강제 조사도 없이 정윤회씨를 조사했다는 것은 검찰의 수사 의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더구나 검찰은 이번 수사의 중요한 축인 ‘청와대 문건 유출’과 관련해 문건을 유출한 혐의(공무상 비밀 누설 혐의)로 서울지방경찰청 정보1분실 소속 최아무개·한아무개 경위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지난 12월12일 법원으로부터 기각당했다. 법원은 기각 이유에 대해 “현재까지의 범죄 혐의 소명 정도 등에 비추어볼 때, 현 단계에서 구속 사유와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검찰 수사가 무리했다는 뜻이다. 검찰이 보고서의 진위보다는 문서 유출자 색출에 더 관심이 많은 청와대의 의도를 충실하게 쫓아가다가 벌어진 ‘패착’으로 분석할 수 있다.

이렇듯 철저한 수사보다는 청와대의 가이드라인을 따라가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한 상황에서 검찰은 최근 또 다른 ‘곤란함’에 직면했다. 청와대가 정윤회 보고서를 작성하고 유출한 배후 책임자로 조응천 전 비서관과 그의 지인들로 구성된 ‘조응천 그룹’을 지목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조응천 그룹’은 언론에 의해 ‘7인회’ ‘양천회’(조응천+박관천) 등으로 불리는데, 이 그룹에는 조 전 비서관을 비롯해 전직 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 2명, 검찰 수사관, 전직 국정원 고위 간부, 박지만 EG 회장의 측근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검찰은 단순한 ‘십상시 모임 여부’나 ‘유출자 색출’ 수사뿐 아니라 정윤회와 3인방, 그리고 박지만과 양천회라는 두 거대 권력 사이의 세력 다툼까지 수사를 확대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더구나 청와대는 양천회가 문고리 3인방을 흔들기 위한 의도로 문건을 작성하고 외부 유출까지 했다는 내용의 감찰 보고서를 검찰에 제출하는 등 또 다른 ‘수사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어 검찰의 입장은 더욱 난처해지고 있다.

“청와대 시나리오 뒷받침하려 조작”

양천회의 실체를 둘러싼 진실 공방도 더욱 거세지고 있다. 조응천 전 비서관은 지난 12월11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청와대가) 오아무개 전 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을 불러 조사하며 ‘문건 작성 및 유출 전반을 조 전 비서관이 주도했다’는 내용에 서명 날인을 하라고 강요했다. 오 전 행정관을 포함해 내 주변 사람들을 이리저리 짜맞춰 만든 이른바 ‘7인 모임’ ‘양천 모임’ 등도 청와대 시나리오를 뒷받침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작물”이라고 주장했다. 오 전 행정관도 청와대가 양천회를 정윤회 사건의 주도자로 지목하려는 것에 강하게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지난 12월12일 기자들과 만나 “현재는 (구속영장이 기각된) 경찰관들의 보고서 유출 혐의를 수사 중이다. (양천회 등) 나머지 부분은 이 수사 진행 이후 검토할 단계”라고 말했다. 검찰의 수사는 과연 어떤 결론을 맺을까.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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