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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왜 대통령은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요

경제만 59차례 언급한 국회 시정연설… 현행 선거법 조항에 헌법 불합치 결정 뒤 정치체제 개편이
정국 주요 현안이지만 대통령이 관심 기울일 가능성은 높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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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1-03 15:34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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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유족들의 울먹임을 듣지 못했을까? 듣고도 모른 체한 걸까? 박근혜 대통령(아래 가운데)이 지난 10월29일 국회 시정연설을 마친 뒤 본청 앞에서 “진실을 밝혀달라”는 유족의 외침을 외면한 채 걸어가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청와대 입장에선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10월29일)에서 나름의 성과가 있었다고 자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연설문에 ‘경제’란 단어를 59차례나 반복 노출시키며 대통령이 가장 중시하는 국정과제를 각인시켰다. 연설 뒤엔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와 1시간 동안 만났다. 회담장의 탁자 크기가 작은 것을 본 대통령은 “테이블이 작아서 오순도순 (얘기를) 안 할 수 없네요”라는 말로 참석자들의 웃음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회동에서 두 당은 세월호 특별법과 정부조직법 등을 한데 묶어 10월31일까지 합의한다는 내용을 재확인했고, 내년 예산안을 법정 시한인 12월2일까지 처리하기로 노력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대통령이 국회와 소통했다는 그림을 보여주면서 예산안 처리를 위한 야당의 협조도 받아낸 것으로 비친 날이었다.

유족과 악수라도 해달라는 당부가 있었지만

하지만 이날 대통령의 ‘동선’과 연설 발언, 여야 지도부와의 비공개 회동에서 보인 반응 등을 넓게 펼쳐서 보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듣고 싶은 현안에는 입을 닫고, 대통령이 하고 싶은 얘기만 하고 갔다는 말이 나온다.

대통령은 “경제를 다시 세울 마지막 골든타임(황금시간)”이라면서, 국가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재정 적자를 감수해서라도 돈을 더 풀겠다고 밝혔다. 대통령은 내년 예산에 어떤 항목이 얼마나 편성됐는지를 소개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나 37분간의 연설에 2015년 주한미군으로부터 되찾기로 했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무기한 연기 결정, 보수단체의 대북 전단(삐라) 살포 문제를 포함한 대북정책, 세월호 유족들의 아픔 등 주요 현안에 대한 대통령의 설명은 쏙 빠져 있었다. 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전시작전권 환수를 늦춘 것은 군사주권을 포기한 것이란 비판이 많은데도 군통수권자의 책임 있는 설명이 없었다. 새누리당의 한 중진 의원도 “대통령이 기왕 1년에 딱 한 번 국회에서 연설하는 거라면 예산 얘기를 비롯해 전시작전권, 남북 문제, 외교안보, 세월호 (침몰) 사고와 안전 문제 등 국가 현안을 폭넓게 얘기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시정연설 당시 여당 의원들이 28번이나 박수를 쳤지만, 한마음으로 박수를 친 건 아니었던 셈이다.

특히 원내 제3정당인 진보정당을 이번 회동에서 모두 제외한 것이나, 시정연설 당일 세월호 유족에게 보인 모습은 ‘매정한 대통령’이란 인상을 강화할 위험이 있다. 유족들은 박 대통령이 국회 본청으로 들어가기 전, 시정연설이 끝나고 본청 밖으로 나올 때 “대통령님”이라고 거듭 불렀다. 라면 상자와 의자 위에 올라 “우리 아이들이 하늘에서 울고 있습니다. 진실을 밝혀주세요”라고 적힌 피켓도 들어 보였다. 대통령은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고, 유족의 목소리는 대통령 경호 인력의 장막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졌다. 박 대통령은 유족과 악수라도 해달라는 문희상 새정치연합 비상대책위원장의 당부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문 위원장의 얘기다.


“개헌과 관련해 언급이 전혀 없었다”?

“(박 대통령과의 회동에서) 어머니같이 따뜻하게 품는 대통령이 되면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오늘 (본청으로) 들어오실 때 유족들과 악수했습니까’라고 물으니 대통령이 웃고 말더라. 그래서 ‘나가실 때는 꼭 악수하십시오’라고 했는데….”

대통령의 시정연설은 향후 정국이 순탄하지 않을 징후도 남겼다. 공무원들의 퇴직연금액을 줄이는 개혁안을 두고 공무원의 반발이 심하지만 대통령이 ‘연내 처리’를 못박고 관련 법안 처리를 국회에 요구했기 때문이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10월30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공무원연금 개혁을 용기 있게 추진하겠다”고 화답했다. 하지만 새정치연합 소속인 이석현 국회부의장은 “당사자인 공무원들과의 대화를 배제한 채 국회 시한까지 (대통령이) 못박으면 여야 관계는 경색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예산안 처리도 법정 시한인 12월2일까지 순조롭게 직행할 것이라 보는 시각이 정치권에 많지 않다. 박 대통령은 복지 예산이 올해 처음 정부 예산의 30%를 넘었다고 강조하지만, 새정치연합은 “늘어난 복지 예산은 기초연금·국민연금·공무원연금 수급자의 증가에 따른 자연스러운 증가분 때문이다. 필요한 복지 예산인 경로당 냉난방비, 아동학대 방지 예산, 보육료 지원 예산은 크게 깎였거나 동결됐다”며 철저한 예산 심사를 벼르고 있다.

시정연설 당일 ‘대통령-새누리·새정치연합 지도부 회동’은 내년 정국 상황까지 미리 엿보게 하는 상황을 노출했다. 회동이 끝난 직후 양당 정책위의장 브리핑에선 “개헌과 관련해 언급이 전혀 없었다”고 밝혔지만, 새정치연합에서 “문희상 비대위원장이 긴 시간을 할애해 개헌의 필요성을 박 대통령에게 말했다”고 다시 수정하는 브리핑 정정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문 위원장이 권한이 집중된 대통령제를 손질하는 개헌을 언급하고, 박 대통령은 별 대꾸를 하지 않는 등 무심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자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개헌 언급 부분은 브리핑에서 빼자고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개헌의 ‘개’ 자도 없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이 몰리자, 새정치연합에서 “사실 개헌 얘기를 대통령에게 꺼내긴 했지만…”이라고 정정한 것이다.

개헌 논의에 상당한 브레이크 가능성

올해 말 국회가 끝난 뒤 개헌을 포함한 정치체제 개편 논의를 본격화하자는 의견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나오지만, 개헌에 부정적인 박 대통령이 해당 논의에 상당한 브레이크를 걸 수 있음을 재차 예고하는 대목이다.

특히 10월30일 헌법재판소가 국회의원 선거구의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과 가장 적은 곳의 인구 차이를 ‘3 대 1’까지 허용한 현행 선거법 조항에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내년 12월31일까지 ‘인구 편차를 2 대 1이 되도록 선거구 지도를 다시 그리라’고 제시해, 내년에는 개헌·선거구 조정 등 정치체제 개편이 정국의 주요 현안이 될 공산이 더 커졌다. 헌재의 이번 결정으로 선거구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인구(13만8984명)를 넘지 못한 지역은 다른 선거구와 통합될 수 있으며, 상한인구(27만7966명)를 넘는 선거구의 일부 동네를 떼어내 새로운 선거구가 신설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영호남 농촌지역구가 최대 4곳씩 줄고, 수도권(서울·경기·인천)에서 최대 19곳까지 지역구가 새롭게 생겨날 수도 있다. 정치권에선 농촌 의원이 감소하고 수도권 의원은 늘어나 농촌과 도시 간의 정치력 격차가 더 벌어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이 때문에 새정치연합 일각과 진보정당들은 선거구 조정을 넘어 아예 양당 중심제를 극복하기 위한 선거제도 개편 논의까지 확장하자고 제안한다. 1개 지역구에서 1등만 당선되는 소선거구제 대신 지역구의 크기를 넓혀 여러 명을 뽑는 중대선거구제, 지역구 의원을 뽑되 정당별 비례대표 의원 수가 지금보다 더 늘어날 수 있는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등이 두루 거론된다. 정치권에선 전면적인 선거제도 개편까지 손을 뻗으면 권력구조(분권형 대통령제 등) 변화에 손대는 개헌 논의의 폭발력도 커질 것이라 내다본다. 하지만 시정연설에서 ‘경제’가 언급된 59차례의 수치는 박 대통령이 개헌·선거제도 개편 등 근본적인 정치제도 개혁에 관심을 기울일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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