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10일 전북 전주 전북대학교 연구실에서 강준만 교수가 자신이 펴낸 책 〈싸가지 없는 진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싸가지 없는 진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고 왜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가. =보수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아주 매너가 좋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정말 올곧고 이타적이면서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데 정말 싸가지가 없게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인간관계에서 누구에게 더 호감이 가고 누구의 말을 더 듣게 되고 어떤 쪽으로 더 기울게 되느냐는 거다. 진보에서는 주로 이념 노선의 가치를 얘기하지만 일반적으로 중간에 서 있는 유권자들이 보기에는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싸가지의 문제가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책의 제목이 상당히 도발적이다.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책 제목 자체가 싸가지가 없다는 지적도 있다. =맞다. 아, 괴롭다. 딜레마다. 암묵지(경험을 통해 몸으로는 알고 있지만 명문화하기 어려운 지식)라는 게 있다. 암묵지는 진보의 아젠다에서 늘 빠져있다. 싸가지라는 문제도 사석에서는 다 얘기한다. 그러나 진보진영에서는 그것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와 글로 쓰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암묵지는 수면 아래 두는 게 기본 에티켓이라고 하는 관점으로 보면 아무리 정중하게 하더라도 싸가지 문제를 거론하는 순간 욕먹게 돼 있다. 어쩔 수 없이 악역을 맡을 수밖에 없다. 많은 분들이 ‘싸가지 말하는 놈이 왜 자기 책은 싸가지가 없어’라거나 ‘싸가지 없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싸가지가 없는 건데’라고 말한다. 저도 인정을 한다.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책에서도 썼지만 용서를 빈다. 어떻게 하겠나. 나름대로 싸가지 있게 쓰려고 애썼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다. 비판은 제가 흔쾌히 수긍을 한다. 다만, 지금껏 (진보진영은) 암묵지에 속하는 것을 어떻게 문제제기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을) 안 해왔지만 저는 거기(암묵지)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진보가 싸가지 없다’는 것은 보수의 프레임이라는 지적이 있다. 책에서는 이에 대해 “진보의 진보 비판을 보수언론의 프레임에 빠졌다고 몰아붙이는 것도 문제다. … (보수 프레임을) 가려낼 수 있는 분별력만 있다면 진보가 경청해야할 것은 진보언론보다는 보수언론의 비판”이라고 썼다.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 건가. =조중동의 힘은 왜 그렇게 과대평가하면서 그들의 지능은 왜 이렇게 과소평가 하나. 보수신문에서 자기들 나름대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몰아가야겠다’는 데스크들의 생각이 있을 수 있다. 이 생각이 개별 기자에게까지 내려갈 수도 있지만 기자 개개인이 늘 모든 기사를 전략과 전술로 쓰지는 않는다. 이들이 야당에 출입하다보니 ‘어, 이건 문제가 있네’ 하면서 쓴다. 그럼 진보쪽은 보수신문에 실렸기 때문에 ‘이건 우릴 죽이려고 하는, 골탕 먹이려고 하는 거다. 이것과 반대로 가는 게 맞다’고 한다. 그동안 이것을 너무 오남용을 해왔다. 가령 박근혜 대통령의 문제를 누가 더 잘 지적하는가. 진보언론이 더 잘 지적한다. 박근혜 정부 입장에서 볼 때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냉정하게 문제의 핵심을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건 진보언론이다. 보수언론도 비판 시늉은 내지만 깊이 못 들어간다. 마찬가지로 진보쪽 내부의 문제도 진보 언론이 다루기 힘들다. 계파문제를 정말 깊이 있게 다룰 수 있나. 늘 두루뭉수리하게 그냥 민주당이 문제라고 한다. (그런 비판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민주당이 문제가 아니고 그 내부 매커니즘이 문제인데 이들에게 그 어떤 해결의 실마리도 안 던져주면서 싸잡아서 ‘너희들 반성하라’고 하면 어떻게 반성하나. 그런데 그 계파의 문제를 자신들의 프레임 안에서 봤을망정 그걸 건드려주는 건 오히려 보수언론이라는 거다. ‘보수 언론이 어떤 뜻을 가지고 몰아갔겠구나’ 하는 지점은 정치 논평하고 댓글 달고 하는 수준이면 다 이해한다. 대단한 판단력이 필요한 게 아니다. 그런데 안티-조중동을 하다 보면 조중동에서 어떤 기사를 쓰면 그것과 반대로 가는게 옳은 게 돼 버린다. 이것이 오히려 자해로 가는 게 아닌가. 싸가지 낙인은 이미 현실 -‘싸가지 낙인’이 진보에 끼칠 부작용에 대한 지적이 나온다. =임석규 <한겨레> 논설위원이 ‘선명한 낙인’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싸가지를 얼마나 심각하게 보느냐의 차이인 것 같다. ‘(진보진영의 싸가지 없음이) 아주 극단적으로 심하지는 않은데?’라고 생각한다면 그 말이 옳다. 그것을 우려하는 분들의 시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저는 이미 갈 데까지 갔다고 본다. (싸가지 낙인에 대한) 우려는 이미 현실이라는 게 제 입장이다. (싸가지에 대한 지적은) 정치권에서 상황이 안 좋을 때마다 운운하는 ‘환골탈태’를 할 수 있을 정도의 확실한 추동을 이끌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싸가지 낙인을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볼 건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이 문제는 언론의 사회고발이 갖는 딜레마와 같은 것이다. ‘사회적 증거 효과’라는 용어가 있다. 예컨대 수건을 자주 도난당하는 호텔에서 ‘수건을 가져가지 말라’는 캠페인을 벌이면 더 많이 가져간다. 괜히 엉뚱한 정보를 주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제가 문제제기한 것을 보고 ‘싸가지 문제가 그렇게 심각했어?’라고 생각하는 거다. 역효과가 있다. 제가 쓴 <서울대 나라>라는 책에서 서울대가 얼마만큼 사회의 요소요소를 장악하고 있는가에 대해 지적하고 ‘이건 안 된다. 분산시켜야 한다’고 했더니 오히려 그 책을 읽고 ‘내 자식을 꼭 서울대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분들이 있었다. ‘이렇게까지 서울대 파워가 막강한 줄 몰랐다’고 한다. 내새끼 한번 잘 키워보겠다고 재수 삼수 해서라도 서울대 보내겠다는 거다. 내뜻은 그게 아니었는데.언론도 정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정치 불신 더 키우게 되는 게 있다. 이처럼 사회 고발이 가질 수밖에 없는 원초적 역기능이 있다. 그러니까 순기능과 역기능을 비교해서 가급적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순기능을 키우는 쪽으로 가야하는 것이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이 책과 관련해 “문제는 싸가지가 아니라 컨텐츠가 없다는 것이다. 컨텐츠만 있다면 싸가지는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98% 동의한다. 맞다. 98%는 맞는데 결정적으로 2%가 중요한 것은 기회비용의 문제라는 것이다. 정당이든 인간이든 제한된 시간 안에서 열정과 노력과 돈을 쏟는다. 제로섬 아닌가. 그런데 제한된 시간 안에서 계속 응징과 심판 얘기만 하면서 에너지가 다 그쪽으로 간다. 그건 그것대로 하면서 콘텐츠 개발을 동시에 할 수 있나. 그게 안 된다. 싸가지 없음을 극복하면서 출발점을 바로 잡지 않으면 콘텐츠 개발도 어려워진다. 이택광 교수가 진 교수의 발언에 대해 콘텐츠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콘텐츠 문제에 관련해서는 진 교수 의견에 동의한다. 이 교수가 말한 것처럼 ‘콘텐츠가 없는 게 아니다’는 건 분명한데, 제가 볼 때 진보진영의 콘텐츠의 문제는 선언적인 콘텐츠만 있고 이것이 초래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한 각론이 없다는 점이다. 그걸 콘텐츠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 이건 그냥 진보의 아젠다일 뿐이다. 중간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봤을 때 진보가 앞서가는 것은 좋은데 그로 인해서 빚어질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 미시적인 각론이 없고, 문제점에 대한 해결 방안이 없다는 게 문제다. 자기 선언적인 한마디를 가지고 콘텐츠라고 할 수 있나.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최근 <한겨레>인터뷰에서 “강준만 교수의 진단은 독이 든 사과를 먹은 이에게 또 독을 먹이는 처방”이라고 했다. =이 교수의 독은 저하고 성분이 조금 다른 것 같다. 그 분 말씀은 그거 같다. 진보가 스스로 도덕성 굴레에 빠져버리면 영원히 발목 잡혀서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제가 또다시 그걸 부각시키면서 얘길 한다는 거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도덕은 진보진영에서 생각하는 도덕만을 얘기한 게 아니다. 이 교수의 독 얘기는 기존의 진보가 갖는 좁은 의미의 도덕적 정의로만 보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제가 주장하는 건 보수의 도덕도 ‘공동체 가치’ 등 자기들 나름대로의 도덕 체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해주면 도덕에 대한 문이 열릴 수 있다. 진보진영에서 애국심을 얘기하면 꼴통처럼 보인다. 국가나 공동체를 강조하면 전형적인 보수 담론으로 본다. 하지만 보수가 생각하는 나름의 그것도 도덕이다. 진보쪽하고는 다르다. 그게 유권자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그럼 ‘아, 나와 다르구나’ 생각하면 됐지, 왜 그걸 ‘틀리다’고 하나. 조금 열자는 거다. 열게 되면 네티즌들이 사이버상에서 논쟁 주고 받더라도 도덕이 넓어지니까 상대편을 존중해주면서 논쟁의 콘텐츠가 격상된다. 지금은 ‘보수’라는 용어는 진보에서 욕처럼 쓰고 있다. 보수를 진보와 다른 걸로 보는 게 아니라 ‘욕’으로 쓰는 거다. 그러니 그 판에서 뭐가 나오겠나. 독이 든 사과 얘기를 할 것이 아니라 도덕성을 더 넓게 보자는 거다. -칼럼니스트 박권일씨는 “강 교수는 시민을 정치의 주체가 아니라 정치 소비자로만 바라본다”고 비판했는데. =새누리당이 광고 전문가를 영입한 것처럼 민주당은 왜 이런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느냐는 제 지적이 그 분이 ‘정치 소비자’ 발언을 하게 된 딱 좋은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평가에 대해서는 조금 답답하다. 알린스키의 말을 빌리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있고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있다. 진보는 늘 우리가 원하는 세상 위주로 말하고 행동한다. 유권자가 정치의 주체로 우뚝 서는 건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다. 근데 지금 그게 왔나. 최악의 상황이지 않나. 그런 세상이 오지 않았더라도 계속해서 우리가 원하는 세상 위주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나. 이렇게 지적하면 어떤 분들은 꼭 엘리트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답답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하고 우리가 원하는 세상 사이의 괴리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지향하되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 발맞춰 가는 것도 필요한데 그 이야기는 안 하려고 한다. 진보적 지식인들의 담론이 그것 아닌가. 정치에 해박한 척 하지만, 정치 관련해 글을 많이 쓰는 지식인들이 그런 관점에서 좀 답답하다. -책에서 “민주당에 ‘선명야당’다운 야성을 살려 제대로 심판하라고 촉구하는 진보 지식인들은 제발 다시 생각해볼 일”이라고 썼다. 그런데 이들이 주장하는 ‘선명야당’이라는 것은 ‘싸가지 없는 야당’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싸가지는 갖추되 투쟁의지 혹은 능력을 내보여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싸가지 있으면서 투쟁적인 건 불가능한 건가. =자녀교육하고 똑같다. 자녀한테 ‘너 이거 잘못됐잖아. 그렇게 하면 안 되잖아’ 그 소리를 볼 때마다 하는 것하고, 가만히 지켜보다가 제대로 따끔하게 말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게 효과가 있나. 심판론을 자꾸 내세우면 값이 떨어진다. 물론 선의로서의 선명성은 인정해야 한다. 약한 자의 편에서 사회 정의를 위해서 애쓰라는 의미가 선명성 안에 담겨 있을 것이다. 그걸 관두라는 게 아니다. 그 동안 신뢰 자본을 획득했더라면 세월호와 관련해 어떻게 유족들에게 이런 고통을 줄 수 있었겠나. 야당이 평소에 신뢰와 실력을 쌓았다면 정말 못참겠을 때 국민이 다 함께 일어서 줘야한다. 지금의 상황에서 평소 실력이 어땠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선명야당을 말하는 것은 너무 안 맞는다는 거다. -투쟁만 계속 하면 오히려 선명성이 떨어진다는 건가. =떨어진다. 일반 유권자들을 생각해보라. 잔소리 방법이 더 좋은 건지, 정말 중요한 순간에 던지는 게 중요한지. (투쟁이) 상시 메뉴처럼 돼 버리니까 중간파 유권자들은 질려한다. 그런데 진보언론도 마찬가지고 이들 얘기는 잘 안 듣는다. 온라인상에서도 마찬가지고 진보진영이 만나는 사람들이 다 우군들뿐 아닌가. 그러다보니 자꾸 집단사고로 간다. -김한길·안철수 대표 체제에 사람들이 실망한 것은 ‘싸가지는 갖췄지만 투쟁의지와 능력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지방선거 이후 <한겨레21> 표지 제목은 그런 의미에서 ‘젠장, 젠틀맨’으로 정해졌다. 김한길·안철수 체제가 세월호 정국을 제대로 풀지 못 하고 선거에서 패한 것에 대해 어떻게 분석하나. =6·4 지방선거 직후를 얘기하는 것 같다. <한겨레> 기사 제목이 와닿았다. ‘세월호 심판이 살린 야당’이었다. 그나마 세월호가 야당을 살렸다는데 동의했다. ‘젠장, 젠틀맨’ 시각에서 보자면, 이 제목은 ‘너희들이 좀더 투쟁을 했다면 더 많은 지지를 받았을 거다’라는 의미인가. 야당 광역단체장 후보들 가운데 제가 말씀드린 싸가지론에 가장 가까운 분, 싸가지를 지켜가면서 하려고 애쓴 분이 박원순 시장과 안희정 지사다. 뭔가 느껴지지 않나. 이들은 벌써 대권가도를 걷고 있다. (젠장, 젠틀맨 논리라면) 이들은 떨어지거나 진짜 아슬아슬하게 됐거나 해야 한다. 반대의 논리도 가능하다는 의미다. 세월호에 대해서 분노한 민심이 6·4 지방선거까지는 (정부·여당을) 응징을 해준 게 그나마 야당을 살렸다는 시각이 있을 수 있고. 또 ‘너희들이 야물딱지게 따질 거 따지고 싸우지 못해서’라고 보는 시각도 있을 거다.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반대의 시각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지난 7월16일 김한길·안철수 전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와 박영선 원내대표(왼쪽부터)가 최고위원회의를 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