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를 인멸해 ‘윗선’이 저지른 국가범죄를 무마하는 ‘꼬리 자르기’가 반복된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국가정보원의 정치·선거 개입을 축소·은폐했다는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던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지난해 2월6일 무죄 선고를 받은 뒤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나오고 있다. 박종식 기자
수사대 증거 삭제 뒤 김용판 ‘증거 부족’ 무죄 ‘뻔뻔한 주장’을 하급심은 외면했지만 대법원은 수긍했다. “진 과장은 김종익씨를 협박해 KB한마음 대표직을 사임하게 한 혐의로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고, 그가 삭제한 자료도 김씨의 불법 내사 자료였다. 자신이 형사처벌받게 될 것을 우려해 증거를 없앴기에 증거인멸죄로 처벌할 수 없다.” 반면 장진수 주무관은 다른 사람(진경락)의 형사사건 증거를 인멸했기에 ‘유죄’라고 했다. ‘최선의 방어책’을 찾아낸 공무원들은 이후 더 과감해졌다. 2012년 12월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는 ‘댓글 공작’이 드러나자 오피스텔에서 이틀간 나오지 않았다. 경찰과 선거관리위원회 직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이 댓글 작업 증거를 확인하겠다며 지켜섰지만 문을 걸어잠그고 버텼다. 이날 밤 김씨는 국정원 상부와 연락하면서 노트북에 든 파일, 인터넷 접속 기록 등 혐의 관련 증거 자료를 삭제했다. 그 결과 그는 형사처벌을 면했다. 되레 증거를 확보하려고 대치하던 야당 의원들이 ‘감금 혐의’로 약식 기소됐다. 2013년 5월에는 현직 경찰이 국정원 사건의 증거를 인멸하다 현장에서 덜미가 잡혔다. 검찰이 국정원 정치·선거 개입 사건 수사를 축소·은폐했다는 혐의로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를 19시간 동안 압수수색할 때다. 사이버범죄수사대의 박아무개 증거분석팀장이 관용 컴퓨터를 안티포렌식 삭제 프로그램으로 돌려버렸다. 앞서 1월에도 서울경찰청은 관련 사건의 증거분석 자료를 일괄 삭제하고 초기화했다. “국정원 여직원이 (정치 관련) 댓글을 작성한 흔적이 없다”는 중간 수사 결과(2012년 12월16일)가 어떻게 나왔는지 알 길이 없어졌다. 국정원 사건을 축소·은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증거 부족”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국가범죄를 비호하려는 공무원의 막무가내식 발뺌은 법정으로 확대됐다. 지난 4월 공판에 증인으로 나온 국정원 심리전단 안보5팀(SNS팀) 팀원 류아무개씨는 “당신의 네이버 계정이 맞느냐. 2011년 연말에 어느 부서에 있었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이메일을 잘 안 써서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소속은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고 말했다. 온라인 활동이 주 업무인 국정원 직원의 어처구니없는 모르쇠 답변이었다. 지난 3월 공판에 출석했던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 김아무개씨는 “내가 원래 기억력이 좀 떨어지는 편”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사용했던 휴대전화 번호도 모른다고 말했다. 국정원 직원이 이렇게 당당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든든한 ‘보호막’ 때문이다. 현행 국정원법과 국정원직원법 등을 보면, 범죄행위로 직원을 수사하려면 국정원장에게 ‘지체 없이’ 알려야 한다. 전·현직 직원들의 증언이나 진술을 들을 때도 보름 전에 국정원장의 사전 허가를 받도록 돼 있다. 증거를 인멸하고 서로 입을 맞출 충분한 시간을 합법적으로 확보한 셈이다. 직원 체포하자 절차 어겼다며 거센 항의 국정원은 이 보호막을 충분히 활용했다. 2013년 10월 검찰이 정치·선거 개입 트위터 글 5만여 건을 올린 혐의로 안보5팀 직원 3명을 체포했다. 국정원이 검찰에 강하게 항의했다. 사전에 법에 정해진 기관 통보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검찰 수뇌부는 국정원 직원을 석방하도록 지시했다. 결국 검찰은 조사도, 증거 확보도 실패했다. 반대로 사전 협조를 요청하면 국정원은 무시했다. 수사 초기에 불법 트위터 활동 혐의를 포착한 검찰이 국정원에 안보5팀 직원 명단과 트위터 계정 목록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국정원은 끝까지 묵묵부답이었다. 증거인멸과 잡아떼기로 일관했던 국정원 정치·선거 개입 사건의 결과가 9월1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재판장 이범균)에서 나왔다. 국정원 직원들이 대선 때 특정 후보 지지 또는 비난 글을 온라인에 게재해 사실상 선거에 영향을 미쳤지만, 그 누구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 이번에도 국가의 ‘완전범죄’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