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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날이면 날마다 오는 ‘혁신’

이미 문서화된 4개의 혁신안 갖고 있는 새정치연합…
2013년 혁신안 짠 교수 “당시 혁신 과제 지키지 않을 것 같은 느낌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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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8-12 17:19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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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2013년 1월14일 18대 대선 패배의 책임을 통감한다며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의 맨바닥에 엎드려 참회의 3배를 하고 있다. 이후 찬 바닥에서 절한 냉기가 무릎에서 사라지자, 민주당 의원들은 당 외부 인사가 제안한 당 혁신안도 제대로 실천하지 않았다. 한겨레 이정우 선임기자
반복된 선거 패배. 엇비슷한 반성. 몇 차례 재생산된 당 혁신안, 그 횟수만큼의 집단적 무시. 이 사이클을 돌고 돌아 새정치민주연합은 다시 ‘비슷한 반성’의 지점을 통과하고 있다. 새정치연합은 박영선 원내대표를 위원장으로 한 국민공감혁신위원회를 가동했다. 이제 곧 혁신안의 재생산 수순으로 넘어갈 것이다. 그간 제1야당 혁신안 마련에 참여했던 외부 인사들의 반응은 보다시피 차갑다.

혁신안이 없어서 혁신이 없겠나

“당에 혁신안은 이미 여러 개 있다. 좋은 건 다 나와 있다. 혁신안이 없어서가 아니라 혁신안을 만들고 실천하지 않는 게 문제다.”(정해구 교수)

“똑같은 일을 반복하니 사람들이 관심조차 갖지 않고 (제1야당에) ‘그런가보다’라고 여기고 있다. 그게 더 큰 문제다.”(한상진 명예 교수)

“사실 별 기대를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만든 혁신안에 답은 다 있다. 결국 암만 좋은 혁신안을 만들어도 무시되거나, 일부만 차기 새 지도부에 승계되겠지.”(최태욱 교수)

선거 패배의 책임 통감을 달리 표현할 창조적 문장력이 발현되지 않는 한 패배 직후 내놓은 ‘선거 패배의 변’이 ‘거기서 거기’인 것은 별 도리가 없다. 그래서 2005년 4·30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에 패한 뒤 “뼈를 깎는 아픔을 각오한다”고 밝혔던 열린우리당의 분골쇄신 의지는 2012년 대통령 선거 패배 뒤 출범한 문희상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의 “뼈를 깎는 혁신”을 거쳐, 2013년 4·24 재보선 패배 당시 “민주당은 분골쇄신을 다시 다짐한다”는 말 속에서 끈질기게 대물림됐다. 2006년 지방선거 완패 뒤 김근태 비대위 체제에서 “국민에게 다가가겠다”는 다짐도, 2014년 7·30 재보선 패배 이후 박영선 국민공감혁신위원장의 “국민이 없으면 당도 없다는 ‘무민무당’의 정신으로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각오로 반복해 되살아난다.


당 외부 인사들이 정작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는 건 이런 반성 표현의 재반복보다 어렵게 만든 혁신안을 당 사무실에 쌓아두고 다시 혁신안을 만들려고 나서는 무신경, 무실천성이다. 정해구 교수는 혁신하는 척하는 이런 행태를 “분식(粉飾·거짓으로 꾸밈) 혁신” “혁신 이벤트”라고 혹평했다.

새정치연합은 이미 문서화된 4개의 혁신안(2012년 대선 평가보고서 포함)을 갖고 있다. 이들 혁신안엔 계파 패권주의 청산, 계파에 휘둘리지 않는 공천 규칙의 안정적 확립, 당 조직 기반 확충, 온라인 소통 강화, 민생 속으로 들어가는 현장 중심주의 등 최근 다시 거론되는 새정치연합의 묵은 과제들의 처방전이 두루 담겨 있다.

첫 번째가 이른바 ‘천정배 개혁안’이다. 2011년 손학규 민주당 대표 시절 천정배 최고위원이 ‘수권정당을 위한 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만든 당 혁신안이다. 이 혁신안에는 2012년 총선·대선 승리와 중·장기 수권 전략을 기획하는 ‘국민승리기획단’ 설치, 지역 중심의 지역당원과 다른 별도의 정책당원제 도입을 통한 당원 확장, 당의 주요 현안을 전 당원이 참여해 결정하는 전국당원정책대회와 전당원정책투표제 실시, 국민배심원단 구성 등을 통한 국회의원 후보자 공천, SNS(온라인) 정당 추진단 구성 등의 방안이 담겨 있다. 최태욱 교수는 “지금의 새정치연합 꼴을 봤을 때 천정배 안을 실천했으면 당이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2012년 ‘내 탓이오’ 없는 집단적 무책임

한상진 교수가 위원장을 맡아 진행한 2012년 대선 평가보고서는 패배의 책임론을 적시한 내용을 두고 당내 논란이 일긴 했지만 당이 나아갈 방향을 명확히 적어놓았다는 평가도 받는다. 보고서는 계파 패권주의 청산과 통합의 리더십 필요, 생활현장으로 파고드는 민생정치 실현, 노·장·청 세대를 아우르는 정당, 비과학적 감에 의존하는 정치가 아닌 정당의 두뇌기능(정책연구원 등)을 강화하는 정당의 현대화·과학화 등을 제안했다. 특히 보고서는 설문조사를 통해 “당이 선거에서 져도 누구도 ‘내 탓이오’의 고백을 하지 않는 집단적 무책임이 퍼져 있다”는 당내 무감각 증세도 심각히 경고했다.

새정치연합의 전신인 민주당은 2013년 ‘문희상 비대위 체제’에서 다시 혁신안을 생산한다. 정치혁신위원장을 맡은 정해구 교수는 27차례의 위원회 토론을 거쳐 계파 해체 선언과 가치·노선 중심으로 의견그룹 재편, 당직과 공직 후보자(의원 등) 선출 원칙을 1년 전 확정, 당원 확충을 위한 민주서포터스 조직과 대학생지회·직장인지회 설치를 통한 젊은 층 흡수, 온라인소통본부 설치 등 당 혁신 과제를 제안했다. 또 비례대표 정수 확대 및 권역별 정당명부비례대표제 도입, 대선 결선투표제 도입을 위한 노력 등 제3정당·진보정당 활로를 위한 정치 혁신 과제까지 제시했다. 정 교수는 당시 혁신안을 발표하며 “과거에 그랬듯 이 혁신 과제가 무시되거나 방기되지 않기 바란다. 그렇게 되면 국민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민주당 스스로 저버리는 것”이라고 신신당부했다. 정 교수는 최근 <한겨레21>과의 통화에서 “당시 혁신위원장을 하면서 이 당이 아직 바닥을 찍었다는 생각이 안 들더라. 이 혁신 과제들을 지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떠올렸다.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민주당과 안철수 세력이 통합한 뒤 새정치연합은 새정치의 내용을 채우는 ‘새정치비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백승헌 변호사(위원장), 최태욱 교수 등 외부 인사 8명이 참여했다. 비전위는 3월13일부터 4월16일까지 한 달 남짓 활동해 13개 혁신·개혁안을 담은 ‘국민을 위한 새정치’ 백서를 내놓았다. 당과 외부 인사가 5 대 5로 참여하는 민생최고연석회의 설치, 계파 입김을 차단하는 공천배심원제 도입, 주민친화적 개방형 정당 지역조직 구축, 국회의원 평가제 도입, 비례대표 의석 비중 확대 등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시민회의 구성, 정책정당 강화 등을 당에 제안했다. 당시 백승헌 변호사는 “우리가 제안한 내용을 실천할 상설기구를 당에 만들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하지만 당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6월13일 다시 기자회견을 열었다. “새정치연합은 새정치 구현을 위한 건설적 논의가 있었는데도 부응하는 실천이 따르지 않고 있다.” 1년 전 정해구 교수의 혁신안이 무시된 전철을 다시 밟게 된 것이다.

‘계파 이기주의’… “자영업자 모임 같아”

제1야당은 혁신안을 부정하는 비혁신적 행태를 반복할까. 혁신안에 참여한 이들은 대체로 계파 이기주의를 주요 이유로 꼽았다. 정 교수는 “당시 문희상 비대위원장이 좋은 안을 만들면 다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 새 지도부가 들어서니 제대로 수용이 안 되더라. 당은 룰이 공정하게 만들어지고 지켜질 수 있는 장치가 마련돼야 하는데, 당권을 잡은 사람이 유리하게 룰을 다시 바꾸고, 다른 계파는 승복하지 않는 갈등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최태욱 교수도 “거대한 한 조직으로서 당이 아니라 여러 자영업자(계파)들의 모임 같다. 우리 계파가 만든 게 아니면 혁신안을 내 작품이 아닌 것으로 여기고, 승계할 의무로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했다.

어쨌든 ‘박영선 혁신위’는 외부 인사를 영입해 다시 당 혁신안을 내놓을 것이다. 다음에 어떤 새 지도부가 들어서든 계파 이익의 유불리와 상관없이 혁신안을 승계해 장시간에 걸쳐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갖지 않는다면, 새정치연합 사무실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쌓이는 혁신안은 5개로 늘어날 것이다. 그랬다간 정말 ‘혁신 이벤트’가 상습화된 당이란 오명에 갇힐 수 있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장슬기 인턴기자 kingka878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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