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언씨가 숨어 있던 별장과 주검이 발견된 순천시 서면 학구리 위치도. 한겨레21 이완 기자
풀밭은 햇볕이 잘 드는 곳이었다. 주검이 발견된 풀밭에서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주검이 발견된 곳의 풀섶은 잘라냈다고 경찰은 말했다. 이곳에서 유씨가 저체온증으로 숨지는 게 가능했을까.
일단 날씨를 확인해보자. 기상청 자료를 보면, 유씨가 5월25일 순천 학구리 송치재휴게소 부근 별장에서 사라진 뒤 6월12일 주검으로 발견되기까지 순천에는 5차례 비가 내렸다. 6월3일에는 44mm의 많은 비가 내렸다. 산속에 있었다면 흠뻑 젖을 만한 날씨다. 경찰은 5월25일 이후 유씨가 숨을 만한, 이른바 구원파 소유 부동산 등을 수색했다고 했다. 유씨는 숲 속 외엔 비를 피할 곳이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순천 지역의 기온은 5월29일 최고 32.8℃까지 올랐다가, 6월3일엔 최고 18.5℃에 그치는 등 기온차도 컸다.
주검 주위에서 발견된 물품을 보면 유씨가 체온을 유지할 영양 상태도 좋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주변에서 발견된 것은 소주 빈병 2개, 막걸리 빈병 1개, 스쿠알렌 약병, 치킨 머스터드 통, 육포 등이었다. 끼니를 먹은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가 도피할 당시 경찰뿐만 아니라 유씨에게 걸린 5억원의 현상금을 노린 사람들도 자주 학구리를 찾았으므로, 유씨가 조력자 없이 이들을 피해 식사를 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신씨, 한 달 뒤 실토 “은신처에 있었다”
유씨가 살해돼 옮겨졌을 가능성은 없을까. 주검이 발견된 곳은 최초 신고자인 박씨 집뿐만 아니라 다른 민가에서도 멀지 않다. 자동차로 옮길 경우 국도에서 주검이 발견된 풀밭으로 향하는 길엔 민가가 많고 공장도 있어 눈에 띄기 쉽다. 박씨는 “산에서 (주검이 발견된) 풀밭으로 내려오는 길은 없다”고 했다.
표창원 범죄과학수사연구소장은 “국과수가 정밀감식을 통해서 뼈의 상태랄지, 독극물의 잔여를 확인해주거나 아니면 타살 가능성을 배제하고 자연사 가능성을 높여주는 등의 (사인을 밝혀낼 거라는) 희망이 있었는데 (그게) 무너졌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② 검찰·경찰은 왜 유씨를 잡지 못했나
그럼 유씨는 어떻게 경찰의 수색을 피해 이곳까지 왔을까. 그 실마리를 찾기 위해 검찰이 유씨의 위치를 마지막으로 포착했던 순천 송치재휴게소 주변 별장(숲속의 추억)을 찾아나섰다. 별장은 학구리에서 북쪽으로 17번 국도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송치재휴게소를 지나 300m쯤 가다 사잇길로 빠지면 별장이 나온다. 나무가 울창해 위치를 아는 사람이 아니면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7월23일 오후 별장을 방문할 당시 폴리스라인이 쳐져 있었지만, 낯선 이의 접근을 거부하는 것처럼 별장 문 앞에 칼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5월25일 별장에 유씨가 숨어 있다는 단서를 잡은 검찰 수사팀은 그날 오후 별장을 급습했지만 유씨를 찾지 못한다. 왜 놓쳤는지 검찰 발표를 따라가보자.
수사팀은 5월24일 자정께 유 전 회장의 측근들을 체포한다. 이어 5월25일 오후 별장을 찾지만 문이 닫혀 있었다. 수사팀은 밤 9시30분께 압수수색영장을 가지고 문을 따고 들어갔지만, 유 전 회장의 비서인 신아무개씨만 발견한다. 신씨는 옷을 벗은 상태로 미국 국적자임을 주장하며 한국어를 못하는 척 영어로 답해 수사관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수사팀은 밤 11시20분까지 집 안을 수색하지만 유씨를 찾는 데 실패한다. 수사팀은 신씨만 체포해간다. 다음날 오후 전남지방경찰청도 별장을 정밀감식했으나 유씨의 행방을 찾지 못한다. 그 뒤 검찰과 경찰은 유씨의 종적을 어디서도 확인하지 못한다.
그런데 신씨는 체포되고 한 달 뒤인 6월26일 검찰에 실토한다. 검찰 수사팀이 들이닥쳤을 때 유씨가 별장 안 은신처에 있었다는 것이다. 놀란 검찰은 다음날인 6월27일 별장을 다시 수색해 나무로 가려놓은 2층 은신처에서 현금 8억여원과 16만달러가 든 돈가방만 찾아낸다.
여기까지의 검찰 설명만 놓고 보면 유씨는 5월25일 밤 검찰 수사팀이 철수하고 다음날 오후 경찰 감식팀이 오기 전에 별장을 빠져나갔을 가능성이 크다. 유씨가 도주했을 만한 길을 찾기 위해 별장 주변을 둘러봤다. 일단 유씨가 국도로 나가는 것은 도박에 가깝다. 경찰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고, 17번 국도는 교통량이 많아 지나가는 차에 노출되기 쉽다. 또 왕복 4차선 도로에 중앙분리대가 있어 도로를 넘기가 쉽지 않다.
택할 수밖에 없었던 학구리 쪽 방향
국도 쪽을 포기하고 별장 뒤 오솔길을 택하기도 어렵다. 오솔길은 계곡을 만나 금방 끊어진다. 계곡 반대편은 비탈이 심해 73살의 유씨가 오르기 힘든 지형이다. 더구나 비탈엔 뱀을 잡는 망까지 쳐져 있었다. 계곡 아래쪽 방향이 주검이 발견된 학구리 쪽이다. 유씨는 길이 없는 계곡이나 17번 국도 주변을 통해 산 밑으로 향했을 가능성이 크다. 순천경찰서 관계자는 “유씨가 산만 타고 (주검이 있는 곳으로) 왔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학구리 지역은 논이 별로 없고 작은 산이 많아 경찰의 눈을 피하기에 적절한 곳이다. 유씨는 이미 송치재휴게소 주변에서 은신할 만한 주택을 사려고 했었다.
③ 유씨는 신도들의 도움을 받지 못했나
그의 죽음에 담긴 또 하나의 의문은 유씨가 금수원(기독교복음침례회 안성교회) 신도들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유씨 곁을 지키던 운전기사 양아무개씨는 5월25일 새벽 3시께 승용차를 타고 움직이는 모습이 송치재 부근 황변IC 폐회로텔레비전(CCTV)에 포착됐다. 전날 밤 양씨 외의 다른 측근들은 검찰 수사팀에 체포됐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양씨는 도주하면서 유씨와 함께 움직이지 않았다. 양씨는 송치재휴게소 식당에 있던 유씨 측근이 체포되면 그 주변에 있는 별장이 바로 노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양씨는 전북 전주에서 승용차를 버리고 처제 등을 만났다. 검찰은 이후 양씨 처제 등을 조사한 결과 양씨가 ‘검찰이 들이닥쳐 유 회장을 순천 숲 속에 놔두고 왔다. 유 회장을 구하러 가자’고 이들에게 말했다고 밝혔다. 양씨 처제 등은 이를 거부하고 양씨를 금수원에 데려다줬다고 했다.
다른 조력자가 한 일 밝혀야 실마리 풀려
그러면 양씨와 신도들이 모인 금수원에서는 유씨가 순천 숲 속에 남겨졌다는 걸 모두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김회종 전 인천지검 2차장은 7월23일 브리핑에서 “구원파 움직임을 보면 상당수가 가서 뭔가 도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게 없었다. 수색을 하거나 찾거나 하는 단서가 나와야 하는데 없었다. 그랬으면 우리한테 포착될 가능성이 높지만 그런 게 없었다”고 말했다. 그동안 유씨를 검찰에 절대 넘겨줄 수 없다는 금수원 쪽의 엄포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 포착된 셈이다.
유씨가 수사팀을 피해 금수원 쪽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하더라도, 유씨가 6월12일 주검으로 발견된 전후에도 금수원 쪽의 움직임은 없었다. 유씨의 이후 행적은 순천 송치재 부근에 묻혔다. 그가 사용했을 안경과 휴대전화도 경찰은 찾지 못했다.
종적을 감췄던 유씨의 아들 유대균씨도 7월25일 경찰에 붙잡힌 뒤 “가족들과 연락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유대균씨 역시 아버지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거나 아버지의 행적을 쫓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유씨의 죽음과 관련된 열쇠는 금수원에 있다. 검찰은 양씨 또는 금수원의 다른 조력자가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조사해야 유씨가 어떻게 숨졌는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순천=이완 기자 wa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