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1월6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통일은 대박”이라며 “대한민국이 세계적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남북한의 대립과 전쟁 위협, 핵 위협에서 벗어나서 한반도 통일시대를 열어가야만 하고, 그것을 위한 준비에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청와대사진기자단
통일을 어떻게 하자는 것일까. 박순성 동국대 교수(북한학)는 “현 정부는 장기적 교류를 통해 점진적으로 하는 방식은 아닌 것 같다. 그런 식으로 하려면, 지난 정부(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경험해봤듯이 ‘통일’을 앞세우진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이 앞장서서 통일을 강조할수록 남한 중심의 한반도 질서 구축을 연상시키게 되고, 이로 인해 위축된 북한은 대화·교류의 장에 나오기 힘들어진다는 뜻이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남한 중심의 한반도 질서 형성을 유리하게 보지 않는 중국도, 한국이 직접 통일을 언급하면 소극적이 될 수 있다. 박근혜 정부가 말하는 통일은 추구하는 목표와 방향이 달라 보인다. 최근 정부에서 흘러나오는 언급을 보면 오히려 ‘흡수통일’에 대한 의지가 엿보인다.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은 지난해 12월21일 자신의 공관에서 열린 국정원 간부 송년회에서 “2015년에는 자유 대한민국 체제로 조국이 통일돼 있을 것”이라며 “조국을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통일시키기 위해 다 같이 죽자, 한 점도 거리낌 없이 다 같이 죽자”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남쪽 중심의 흡수통일 방안이다. 나중에 남 원장은 “북한 체제의 불확실성이 증대됐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생을 바칠 각오로 예의주시하라는 의도였지, 2015년 (북한) 붕괴를 얘기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명했지만, 일련의 흐름 속에서는 여전히 의혹을 떨치기 힘들다. 남한이 통일 앞세울수록 북한은 위축 지난 1월7일 한-미 외교장관 회담 뒤 정부의 한 고위 당국자가 기자간담회에서 “북한의 변화를 좀더 빨리 이끌어내자는 정책적 방향”을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흡수통일의 사전 단계로서 ‘급변사태’를 유도하려는 작업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당국자는 ‘외교장관 회담에서 급변사태 문제도 논의됐느냐’는 질문에 “한다, 안 한다 말하긴 어렵다”면서도 “그런 것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고까지 말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이날 존 케리 미 국무장관과 한-미 간 ‘북한 정세 평가회의’를 열기로 합의했다. 윤 장관은 이미 지난해 8월 “북한이 앞으로도 한층 변화된 모습과 자세를 보이도록 강력히 유도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박순성 교수는 “남한 정부는 북한 체제가 흔들리기를 바라고, 북한은 남한의 그런 생각을 읽고 체제를 단속하고 있다. 남과 북이 각자의 명분만 쌓아가면서, 북한은 정치·경제적으로 체제 안정을 강화하고, 남한은 한-미-일 공조, 특히 미국과의 공조를 통해 북한이 국제사회에 나오지 못하도록 하려고 한다”고 분석했다. 급변사태는 현 체제의 불안, 나아가 붕괴를 전제로 한 설명틀이다. 최근 익명의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북한 이상설’ 보도가 잦은 것은 급변사태에 대한 정부의 관심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1월8일 <연합뉴스>는 ‘북한 사정에 밝은 정부 고위 소식통’을 인용해,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의 고모인 김경희 당 비서가 심근경색에 알코올중독으로 위독한 상태라고 전했다. 지난해 12월27일 <국민일보>는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북한이 국경 경비를 최고 수준으로 강화했으며 탈북자 체포가 중국 공안과의 협조 아래 삼엄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세계일보>는 12월19일 ‘정부 소식통’을 통해 장성택 전 행정부장의 측근 등 70여 명이 숙청을 우려해 중국으로 탈출했다고 전했다. 아예 언론이 나서서 급변사태 가능성을 주요하게 다루기도 한다. <조선일보> 인터넷판은 1월9일 오후 ‘갑오년 북 김정은의 운세는? “타살되거나 객사할 것”’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머리기사로 올렸다. <자유북한방송> 제작 동영상에 나온 역술인들의 점괘를 요약한 것으로, 대부분 김정은 비서의 새해 운세와 성명 운세가 불안하다는 내용이다. 북한의 급변사태는 남쪽에 대한 도발로 이어질 거란 우려와도 일맥상통한다. 김관진 국방장관은 지난해 12월17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내년 1월 하순에서 3월 초순 사이 북한이 도발할 가능성이 크다. 북한 내부의 불안 요소와 군부의 과도한 충성 경쟁으로 인한 오판이 있을 수 있고 그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도발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장관은 다음날 국회에 나와 “장성택 처형과 관련해 앞으로 전개될 여러 가지 북한 내부 동향을 보고 있다. 북한의 동계훈련이 2월 말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대북 태세를 강조하는 측면에서 언급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남쪽도 2월 말~3월 초 키리졸브 한-미 합동군사훈련이 예정돼 있다. 급변사태 수혜자는 따로 있다 이런 인식은 “통일이 도둑처럼 한밤중에 올 수 있다”(2011년)고 했던 이명박 정부의 인식과 다르지 않다. 결과로서의 통일만 말할 뿐, 과정으로서의 통일은 없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최근 보수 진영의 통일 논의는 모두 통일에 이르는 과정은 언급하지 않고, 통일 이후 경제적 효과가 어떻고 법은 어떻게 되는지 등만 얘기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화해와 협력에 이르는 과정이다. 관계 개선과 교류·협력에 대한 진정성 있는 고민 없이, 통일이 오면 이러저러한 게 좋다고만 하면 북한의 반발을 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미 북한은 공개적으로 반발하고 있다. 북한은 1월9일 박 대통령이 언급한 설 이산가족 상봉과 관련해 정부가 제안한 실무접촉을 거부했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은 통일부에 보낸 통지문에서 “새해 벽두부터 언론들과 전문가들, 당국자들까지 나서서 무엄한 언동을 하였”다고 비판했다. 급변사태에 관련된 언급 일체를 ‘무엄하다’고 받아들인 것이다. “신년 기자회견을 통하여… 우리 내부 문제까지 왈가왈부”란 대목은, 장성택 전 부장의 처형 얘기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최근 장성택 처형 등으로 (북한이) 더욱 예측 불가능하게 됐다” “장성택 처형을 보면서 세계인들이 북한의 실상에 대해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통지문은 “종래의 대결적 자세에서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는 데 대해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결론지었다. 김정은 비서가 남북관계 개선을 언급하고, 박 대통령이 ‘그 자체는 환영한다’고 했는데도, 끝내 대화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급변사태를 기대하는 것은,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인명진 목사는 “북한이 금방 무너질 거라는 건 비현실적인 기대다. 그건 요행을 바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과연 기다리는 게 뭔지 알고서 기다리는 걸까?
박근혜 대통령이 1월6일 설 이산가족 상봉을 제안한 직후 일부가 대한적십자사 총재 명의로 북한에 실무회담을 제안하는 등 실무 준비에 들어갔지만, 사흘 뒤 북한은 “좋은 계절에 마주 앉을 수 있을 것”이라며 거절의 뜻을 밝혀왔다.한겨레 김경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