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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남북관계 ‘흐린 뒤 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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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9-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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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악재를 딛고 열린 5차 장관급 회담의 성과, 그리고 그뒤

사진/ 이산가족 교환방문 등의 일정을 합의한 3차 장관급회담. 10월은 정상회담 이후 가장 활발한 남북한 접촉이 있을 전망이다.(사진공동취재단)
광풍이 불고 난 뒤의 햇살이라고나 할까? 이번 5차 장관급 회담은 우려할 만한 여러 악재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남북관계 개선의 불씨를 되살렸다. 8·15행사를 둘러싼 보혁 대결의 증폭, 첨예한 여야 대립, 그리고 사상 초유의 미국 테러참사가 있었다. 이런 일련의 주변 환경들은 언뜻 남북관계의 어두운 터널이 장기화될 것이라는 우려를 낳았다. 지난해 12월 4차 장관급 회담 이후 모든 당국자간 관계가 중단되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렇지만 북한은 대화 재개를 먼저 제안했고, 이번 회담에서도 나름대로 성의를 보였다.

군사 당국자 회담은 언제 열리나

교착의 시간이 길었기에 이번 회담 합의문은 모든 남북관계 현안이 망라되어 있다. 장관급 회담의 역할은 분야별 회담성과를 총괄·조정하는 데 있다. 이번 회담에서는 좀더 쉽게 합의할 수 있는 분야는 후속일정을 잡았고, 여타 조정이 필요한 부분은 여지를 남겼다. 일단 이산가족 교환방문(10월16∼18일), 금강산 육로관광을 위한 실무회담(10월4일) 태권도 시범단(10월과 11월 교환방문) 등은 일정을 합의했다. 투자보장 관련 4개 합의서의 발효도 합의했고, 11월중에 실시될 임진강 수해방지 대책마련을 위한 현지조사 역시 매우 중요한 합의사항이다. 다만 경의선 연결 공사와 개성공단 추진을 위한 후속 일정이 모호하게 처리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런 모든 문제들은 2차 경제협력 추진위원회(10월23∼26일)와 6차 장관급 회담(10월28일∼31일)에서 논의될 전망이다.


이번 합의문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두 가지다. 첫째 남북 현안 문제의 핵심 돌파구라 할 수 있는 군사당국자 회담 일정이 ‘빠른 시간 내에’식으로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다. 사실 금강산 육로관광, 경의선 연결공사, 임진강 수해방지, 해운 합의서 등 모든 현안들은 일단 군사당국자 회담을 통해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 조사를 하고, 비무장지대 안에서의 공사를 하기 위해서는 출입 절차를 비롯, 군 당국간의 협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북한 군사 당국자가 마주 앉는 자리는 바로 본격적인 현안 해결의 입구라고 볼 수 있다. 이번에 군사실무회담을 합의하지 못한 것이 북쪽 대표단의 제한된 권한 때문인지, 아니면 대남부서와 군부와의 입장차이가 여전하기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10월4일 열리는 금강산 육로관광을 위한 실무회의에서 이 문제는 좀더 분명해질 것이다. 여기서 군사당국간 회담이 합의되고 비무장지대 내 출입국문제를 비롯한 규칙들에 대한 뜻이 모아지면, 경의선 공사나 임진강 수해방지 사업에도 긍적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둘째, 북한이 그간 강하게 제기해왔던 전력 및 식량지원문제가 합의문에서 빠졌다. 북쪽이 남쪽의 사정을 감안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전력지원과 같은 민감하면서 대규모 투자를 필요로 하는 협력사업은 남북대화의 성과가 만들어내는 신뢰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남북한 당국이 분야별 회담을 통해 남북관계를 좀더 제도화하고, 협력의 성과를 확실히 보여준다면, 전력지원문제가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다. 일에는 순서가 있다. 현재의 남북관계 개선 수준에서는 전력지원문제를 거론하기가 쉽지 않다. 지금은 이러한 대규모 투자사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우선적으로 조성할 때이다. 다만 국내 쌀 공급이 남아돌아 자연스럽게 대북 쌀 지원의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은 다행이다.

10월이 기대되는 이유

사진/ 테러사건과 미국의 강경외교정책은 남북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중동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 항공모함.(GAMMA)
아마도 이번 10월은 정상회담 이후 가장 활발한 남북한 접촉이 있을 전망이다. 남북관계가 좀더 제도화된 형태로 도약·발전할 수 있을지가 궁금사항이다. 그래도 뭐니뭐니해도 김정일 위원장의 연내 답방이 가능할지가 가장 큰 관심사일 것이다. 이 모든 문제가 10월의 성과에 달려 있다. 현재의 남북관계를 전망하는 핵심변수들로는 북한의 대화의지, 남한 내 대북정책의 공감대 형성, 미 테러사태 이후 북-미관계 등일 것이다. 먼저 북-미관계를 살펴보자. 미 테러사태로 북-미관계 개선 일정이 늦춰질 수 있다. 사실 북-미간 현안과 관련해 북한의 협상안은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알려진 바 있다. 미사일의 수출, 개발, 시험발사 등 모든 문제를 적정한 보상과 대체방안을 제시하면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최근 중·러와의 정상회담에서도 2003년까지의 미사일 발사유예 조치를 재확인한 바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테러문제에 대한 북한의 입장이다. 북한은 2000년 미국과 반테러 공동선언을 한 바 있고, 이번 테러사태 직후에도 신속하게 외교부 대변인 담화로 “지극히 유감스럽고”, 유엔 회원국으로 “온갖 형태의 테러와 그에 대한 어떠한 지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문제는 미국이 북-미대화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외교적 여유를 찾는 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북-미간 대화 재개의 지연이 남북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사실 남북한의 많은 문제들이 북-미대화의 진전과 연관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남북한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1991년 걸프전쟁 시기에도 남북한은 기본 합의서를 만들었다. 남북한이 접촉을 확대하고 가시적인 화해협력을 활성화할 때, 북-미간의 대화환경도 조성될 수 있다. 문제는 북한의 대화의지다. 사실 북한 지도부가 생각하는 관계개선의 수준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차이날 수는 있지만, 대화의지는 분명하다. 지난해의 남북한 정상회담과 북-미대화를 기억해보자. 올해 들어 대화교착의 변수는 부시 행정부 출범이었다. 북-미관계가 중단되면서 남북관계도 교착의 긴 잠을 잔 것이다. 지난 9개월간 북한은 무엇을 고민했는가? 아마도 1월 김정일 위원장의 상하이 방문과 7월과 8월의 러시아 방문, 그리고 9월 장쩌민 총서기의 북한 방문이 해답을 주고 있다. 북한은 부시 행정부 출범으로 대외관계 개선 일정이 차질을 빚자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정상화를 통해 남북관계와 북-미대화에 대한 대화의지를 국제적으로 재확인했다.

북한이 대화국면을 조성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부 사정 때문이다. 북한은 최근 모든 정치일정을 2002년에 추어왔다. 김정일 위원장의 60회, 김일성 주석의 90회 생일이 바로 내년이다. 아마도 북한은 1980년 6차 당대회 이후 미루어왔던 7차 당대회 개최를 고려하는 것 같다. 당대회가 열리면 엘리트의 세대교체를 비롯한 중요한 문제들이 논의될 것이다. 특히 1993년 12월 실패로 종료된 3차 7개년 계획의 후속 경제계획도 발표해야 한다. 3개년 혹은 5개년 계획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중기 경제계획을 세우기 위해서는 자본조달 계획을 확정해야 한다. 내부적 자본고갈 상황을 고려한다면, 대외관계 개선이 중요하다. 최소한 내년 상반기까지 대외관계 개선의 기본 구도가 확정되지 못하면, 중기 경제계획을 세울 수 없고, 당대회 개최도 미룰 수밖에 없다. 북한이 올해 내 한두번 정도의 장관급 회담을 통해 현안문제의 해결 가닥을 잡고, 내년 3월 정도에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한의 정쟁을 우려하며

북한의 대화의지가 확인된다면 문제는 남한이다. 사실 이제 모든 대규모 대북 투자사업은 공적인 협력사업이 되었다. 경의선 연결공사도, 개성공단도, 금강산 관광까지도 당국간 협의대상이 된 것이다. 불투명한 국제환경, 북한의 완만한 정책변화 속도, 그리고 남북한의 접촉수준으로 보아 민간차원의 대북 경협사업은 한계가 있다. 경제적 차원에서 접근하기에는 이르다는 말이다. 결국 공적 협력사업을 통해 교류협력의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급선무다.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철도와 도로, 전력 등 사회간접자본을 우선 조성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공적협력사업이 재정(남북협력기금 등)을 통해서 할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여야간 협조를 비롯한 국민적 공감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정치권이 당리당략적 발상보다 민족의 미래를 우선해야 한다. 여러 개의 선거가 있는 내년이 참으로 걱정이다. 분단 이후 아마도 가장 진지한 화해협력의 역사적 기회를 정략적 쟁투로 날려버릴 만큼 우리 민족에게 시간이 많은 것은 아니다. 5차 장관급 회담은 화해협력의 가능성이 여전히 열려 있음을 다시금 확인시켜주었다.

김연철 삼성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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