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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163cm·32kg 형률씨의 외로운 싸움 그 뒤 8년

원폭 2세로 35살에 숨진 김씨의 8주기에 열린 ‘원폭피해자 지원법 제정을 위한 토론회’… 8년 허송세월, 이번엔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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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6-19 10:26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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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6일은 인류사에서 오래도록 기억될 날이다. 사상 첫 원자폭탄 ‘어린 소년’(리틀보이)이 그날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졌다. 줄잡아 42만여 명이 피폭을 당했고, 이 가운데 약 16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흘 뒤엔 나가사키에 ‘뚱보’(팻맨)가 투하됐다. 27만여 명이 피폭당했고, 약 7만4천 명이 숨졌다. 일본은 지구촌에서 유일한 피폭 국가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선천성 면역결핍증 등 각종 합병증에 시달려

피폭 국가의 국민만 피해를 입은 건 아니었다. 김기진 <부산일보> 편집국 부국장은 올 초 펴낸 <1945년 히로시마… 2013년 합천>(선인 펴냄)에서 일본 내무성 경찰국 자료를 따, 1945년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거주한 조선인이 14만5천여 명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히로시마 피폭 당시 이곡지(74)씨는 6살이었다. 피폭 1세대인 그는 한평생 악성 종양과 피부병에 시달렸다. 더 큰 문제는 자녀였다. 1970년 얻은 일란성쌍둥이 가운데 동생을 생후 1년6개월 만에 폐렴으로 잃었다.

이씨의 살아남은 아들은 2005년 5월29일 서른다섯 나이에 세상을 등진 고 김형률씨다.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을 지낸 그는 선천성 면역글로불린결핍증에 따른 각종 합병증에 허덕였다. 숨질 당시 형률씨는 163cm의 키에 몸무게는 32kg에 불과했다. 무너져가는 육신을 이끌고 그가 생의 막바지까지 애쓴 것은 ‘원자폭탄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입법’이었다.

형률씨의 8주기를 하루 앞둔 지난 5월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특별한 입법토론회가 열렸다. ‘원폭 피해자 및 자녀를 위한 특별법 추진 연대회의’가 주최한 ‘대물림되는 고통, 원폭 피해자 지원법 제정을 위한 토론회’다.

새누리당 김정록 의원(비례)은 지난해 12월7일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실태조사 및 지원을 위한 특별법안’을 발의했다. 민주당 이학영 의원(경기 군포)도 지난 2월28일 ‘원폭 피해자 및 피해자 자녀 지원을 위한 특별법안’을 발의했다. 지난 5월20일엔 새누리당 이재영 의원(비례)도 같은 이름의 법안을 제출했고, 진보정의당 김제남 의원(비례)도 비슷한 법안을 마련해 발의를 앞두고 있다. 형률씨의 외로웠던 싸움이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되는 건가?

“이념 문제 아닌 인권 문제일 뿐”


형률씨가 한국인 원폭 피해자와 그 2세들의 생존권 보장을 촉구하는 진정서를 국가인권위원회에 낸 것은 벌써 10년 전인 2003년 8월이다. 이를 근거로 인권위는 이듬해 5개월에 걸친 실태조사에 들어갔다. 국가기관이 원폭 피해자에 대한 실태조사를 벌인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인권위는 2005년 2월 “원폭 피해자 1세와 2세 모두 비피폭자에 견줘 질병 발생 위험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로부터 석 달 남짓 만에 형률씨는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해 8월 민주노동당 조승수 의원(울산 북구)의 대표발의로 원폭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 발의됐다. 하지만 법안이 해당 상임위(보건복지위원회)에 계류된 채 17대 국회의 임기가 끝났다.

2008년 11월 한나라당 조진래 의원(경남 의령·함안·합천) 등 103명이 다시 특별법을 공동 발의했다. 이 역시 상임위를 통과하지 못한 채 18대 국회가 끝났다. 8년 세월을 허송한 게다. 이번엔 다를까? 5월28일 토론회에서 사회를 맡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이렇게 지적했다.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인권 문제일 뿐이다. 수천 명의 피폭 생존자들의 고통과 한을 언제까지 두고만 볼 것인가. 피폭 1세는 대부분 고령이고, 2세는 각종 질병으로 건강이 위태롭다. 시간이 촉박하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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